목차
1. 요약 정리
2. 2차 세계와 호러
3. 남겨질 자들에 의한, 남겨진 자들을 위한
1.
딸은 대공원에 가는 일을 많이 기대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자신의 기대감에 「나」와 남편이 응해주기를 기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골이 상해가는 둘 사이를 중재하며, 기시감에 빠진다.
「나」는 과거 대공원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 회전목마를 타려고 했지만, 고장으로 탈 수 없었다. 나의 회전목마에 대한 강한 미련 때문에 아빠와 엄마는 싸운다. 아빠는 말한다. “마누라나 애새끼나.” 그렇게 나를 버려두고 어딘가로 가버리고, 엄마는 소풍 도시락을 찾으러 잠깐 떠난다. 그 사이 요의를 느낀 난 아무 사람에게 부탁하여 화장실을 들린다. 문제는, 화장실을 나온 순간 아무도 없었고, 엄마가 기다리라고 한 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나는 부모님을 찾아 헤메던 중 어느 이상한 곳으로 흘러들어간다. 아이들만 있는 곳.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기구를 타며 논다. 그리고 아이들은 제안한다. 자기들과 함께 영원히 놀자고. 나는 그말에 위화감을 느끼며 도망친다.
그렇게 공원의 안쪽으로 도착하자 자신을 찾던 직원에 의해 엄마와 재회한다. 엄마는 말도 없이 사라진 「나」의 뺨을 때리고 윽박지른다.
그 일 전후로 아이들이 실종된일들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나의 이야기에 따라 주변을 조사했지만 아이들 같은 건 없었다. 가족도 어느 샌가 그런 일은 없다고 잡아 땐다.
다시 현재에 이르러 아이는 의기소침하게 선생님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고민을 한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말해준다. 내가 너에게 갈 거라고. 가는 길을 안다고.
2.
호러 소설의 목표는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줄곧 무서움을 즐겨왔다. 스릴과 짜릿함 때문일까. 아니면 공포가 풍기는 진득하고 독특한 맛의 무언가일까. 그리고 이 무서움을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느끼는 것일까.
일월명 작가님의 대공원이 가진 공포적 요소는 보편 경험을 다루는 데에 있다. 작중 내에 전개되는 가정 폭력은 누군가가 한번쯤 겪어봤을 그러한 종류다. 이런 보편 경험은 시대적 흐름 하에 있다. 아이가 아이다움을 잃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부모에게 있다는 이야기는 이 시대 공감할 수 있는 명제 중 하나다. 물론 아이다움을 잃게 되는 원인이 그 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마지막 방파제 역할은 수행해야한다. 그것이 어른이자 부모의 의무니까.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설 내에서 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마누라나 애새끼나” 라는 발언에서 아빠란 인물은 가족 속 분절된 단위의 부외자로써 존재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부장제 속 의무와 권위의 모순이 명료하게 드러날 때, 이 빌드업을 소설 내에서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이어 직조해낸다. 그렇게 아빠 – 남편 / 나 – 딸 이라는 도식 속에서 소설은 뒷맛이 꺼림찍한 현실의 찌꺼기들을 은근스럽게 드러낸다.
이렇게 보편 경험 속의 현실을 이어 붙이며 우리는 공감이라는 영역을 확대해나간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호러 소설이라기보단 르포 소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공원이라는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무언가 어렴풋하고 기괴하며 다정한 것을 소환한다. 바로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로 닿는 방법은 흡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이세계로 이어진 듯한 느낌을 풍긴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내가 읽을 수 없는 글자 팻말이 군데 군데 서있는 흙길을 따라 걷는다.”
“굵은 가지들이 얽혀 만들어진 아치 끝을 지나 텅 빈 광장에 도착해서야 나는 멈춘다.”
읽을 수 없는 글자 팻말이라는 소재는 중의적이다. 내가 어린 아이기에 배우지 않아 읽을 수 없는 종류일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애초에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팻말이 보통은 이정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세계로 안내한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굵은 가지들이 얽혀 만들어진 아치 끝’은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것 같은 문처럼 보인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액자 소설 내의 세계는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다. 책임을 방기한 어른들과 부대껴야하는 현실과, 이에 벗어나 아름다운 대공원에서 영원히 노는 세계가 그것이다.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회전 목마. 그 외의 재미있는 기구들. 이 후자의 세계는 마치 피터팬의 네버랜드처럼 아름답고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이 곳에서만큼은 상처입지 않을 수 있고,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른들로부터 버려지고 상처받은 이들의 낙원은 그 원인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아무리 놀이기구를 타면서 재미있게 놀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으로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운다고 해도 원인은 해결되지 않는다. ‘시꺼먼 물과 나뭇잎, 스티로폼 조각, 물어뜯은 이자국이 있는 자잘한 스펀지’등은 아까 전만해도 분명 달콤하고 맛있었던 아이스크림의 존재일 것이다. 원인을 바로보지 않는다면 원인은 해결할 수 없다. 곪고 썩어버린 상처들의 환상이 바로 아이들의 세계일 것이다.
주인공은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고. 그 이 지점에서 집이라는 소재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매개체이자, 주인공이 상처받은 곳 그 곳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돌아왔을 때, 안아줄 것으로만 알았던 엄마는 주인공의 뺨을 때린다. 구제받지 못한 아이의 세계는 헐겁고 위태롭게 서 있게 된다. 공감따위 없는 싸늘한 현실의 의미만이 유원지에 맴돈다. 그리고 끝내 엄마는 그 일을 부정하는 데에 까지 이른다.
액자 소설 내에서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느것 하나 해결되지 않고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지극히 사실적인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세상의 무기력함이기도 하다. 이 무기력함이 반영된 세태가 공포의 핵심이다. 공감하고 싶지 않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트라우마 같은 것. 외면하면 편해질 버려진 아이들의 세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며 그 곳으로 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곳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양가성 속에서 공포는 발현된다. 가지 말아야할 가고 싶은 곳. 이 금단의 주박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를 마주할 거냐고.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순간 세계는 가정 폭력에 대해 더욱 명확한 해상도를 가진다. 이런 이차세계를 거쳐 현실로 돌아오는 구성은 판타지의 변주이기도 하다. 이는 로지 잭슨의 점근축 이론처럼, 현실을 국지적으로 변형시켜, 되려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계에서 돌아옴으로써 마주할 용기를 갖는다. 그리하여 딸과 나는 약속한다. 딸에게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 네가 길을 잃고 그 곳으로 가게 되더라도 너를 찾아낼거라고.
3.
“지금 가면 다음엔 안받아줄거야.”
길을 잃고 헤메는 경험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막막함.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답답함. 그리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는 소속감의 부재에서 오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 내, 한가지 가정할 수 있다. 만약 그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그 끝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다행스럽게도 소설 내 주인공은 엄마와 상봉한다. 물론 그 상봉이 위안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문제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엄마와 다시 돌아와 소속감을 재획득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소속감을 면밀이 살펴보면, 그 것이 꽤나 성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마다 엄마는 날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책하다가, 내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반나절 동안 멋대로 사라져 이상한 거나 주워먹고 다닌 것을 가벼운 사고라고 말하거나, 언젠가부터는 내가 먼저 그날 이야기를 꺼내도 그런 일은 없다고 잡아 떼었다.
이 성긴 소속감은 아빠의 마누라나 애새끼나라는 발언부터 아이들을 거쳐 그런 잃은 없다고 잡아 뗀 일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고독한 가변성 속에서 주인공은 모든 소속감 속에 서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이 ‘될 수도 있었음’을 상기하자.
이런 점에서 아이들은 일종의 관념체로써 존재하게 된다. 가정폭력을 당해 있을 곳을 잃은 아이. 버려졌거나 혹은 도망친 아이들. 이렇듯 될 수도 있었음이 나에게서 우리에게로 확장될 때 공포는 명징해진다. 하지만 공포의 기능 중 하나가 이런 스릴을 알아차리고 학습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때 보다 위안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소설은 말할 수 있다. 남겨진 자들에 의해, 남겨질 자들을 위로하고자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