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가 되려면 쓰러뜨릴 만한 마왕이 필요하다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밑줄 (작가: 호수, 작품정보)
리뷰어: soha, 17년 7월, 조회 14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영웅들은 다들 자신에 걸맞은 악당을 가지고 있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마왕성에 도달한 용사를 기다리는 건 무자비하고 흉악한 마왕이다. 마왕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용사는 자신의 본모습과 마주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용사의 삶은 마침내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용기, 희생, 사랑, 희망 등의 가치가 용사에게 덧씌워지며, 마왕의 목에 칼을 꽂으며 용사는 자신의 위대한 여정을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어떨까?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악당을 찾아 나설 수는 없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나’가 영웅이 되기 위하여 자신에게 걸맞은 악당을 찾아서 물리치러 떠나는 여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가 물리치기로 결정한 악당에 대해 더 살펴보자. 악당은 모두가 볼 책들에 밑줄을 그으면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해석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과거의 고전들에 의미가 없음을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의 안목에 자신만만하고, 다른 사람들 또한 책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나’에게 있어서 이 악당의 존재는 매우 거슬릴 것이 틀림없다. 또한 용사의 여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가는 과정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해석한 의미를 강요하는 악당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때 ‘나’는 책에 밑줄을 긋는 악당의 행동에 지금까지 겪었던 사회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겹쳐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는 취업을 위하여 학부성적을 관리했고, 자격증을 취득했을 것이며, 공인영어점수를 획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직장에서 그는 그 모든 노력들이 실제 업무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이미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스펙을 다시 획득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사회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자신이 생각할 때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밑줄을 그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상을 강요하는 악당을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나’의 여정은 스스로의 신념을 긍정하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나’가 여정에 쏟은 노력만큼 쓰러뜨려야 할 악당은 무시무시하고 잔인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의 여정은 스스로가 쌓아올린 상징들을 떠받힐 수 있을 만큼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만의 준비를 갖춘 ‘나’의 앞에 마침내 나타난 악당은 거북목을 하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노인이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나’의 영웅이 되기 위한 여정은 실패했다고 봐도 옳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 끝에 기다리고 있던 악당은 잔학무도한 마왕도 아니었으며, 세계를 집어삼킬 음모를 꾸미고 있는 악의 조직도 아니었다. 모든 영웅들은 각자 자신에 걸맞은 악당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영웅은 자신의 여정 끝에 있는 악당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따라 평가된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여정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식어를 동원하여 할아버지를 보다 악당답게 만들려고 해보지만, 결국 할아버지는 특별한 악의는 없고 그저 어떤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일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심지어 할아버지를 설득하는 데도 실패했고, 멀어져가는 등 뒤에 돌을 던지지도 못했다. ‘나’는 자신의 신념을 긍정하려고 떠났던 여정의 끝에서 어느 ‘시시한 악당’의 신념조차도 꺾지 못한 것이다. 이 정도면 용사로서는 실격 수준이다.

‘나’에게 준비되어 있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만다. ‘나’는 다시 토익 공부를 하고, 이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사회의 관점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나’는 비록 악당을 물리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고, 여전히 자신의 여정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말들의 보잘것없음을 알고는 있겠지만 본문에서도 언급되듯이 아직 스스로에게 정신승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해서 ‘나’가 붙잡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뜨려버린다. 작가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성을 통하여 악당이 어쩌면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준다. 그것도 넌지시 암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가 한 시간이나 여성을 지켜보게 해서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이렇게 ‘나’는 용사라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악당조차도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더 이상 용사라고 칭할 수조차 없다. ‘나’의 여정이 가졌어야 할 의미는 그의 이야기를 떠받치는 한쪽 축이 붕괴하면서 영영 사라져버린다. 작가의 코멘트처럼 ‘나’에게 있어서 그의 여정은 ‘쓸떼없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쓰러뜨릴 만한 마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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