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무수히 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약속을 잡고 잠깐 만날 때 경험하는 가벼운 헤어짐도 있지만, 재회를 기약할 수 없거나, 다시는 불가능한 헤어짐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 사랑하던 사람, 하나뿐인 자식처럼 귀한 사람과의 이별은 특별히 더욱 어렵다. 각별한 사이일수록, 이별의 시간이 길수록, 강제적일수록, 갑작스러울수록 헤어짐의 슬픔과 고통은 크다. 그리움은 인간 보편의 감정이다.
그리움은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의 정도는 그리움에 비례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그리움은 역시 사별에서부터 온다. 사별은 헤어지는 두 사람의 사이를 죽음이 가로막기에 돌이킬 수 없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노인성 변화로 인한 사별도 고통스럽다. 하물며 갑작스러운 병환이나 사고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다. 한 사람의 기억을 인생에서 완전히 도려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잊지 못하고 그저 참는 것. 그것이 사별한 사람을 기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겪은 이들은 ‘그 사람이 한 번만 내 앞에 나타났으면’하고 바라게 된다. 떠난 사람에게 못다 한 말,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것, 그와 가지 못한 곳, 그와 보내지 못한 시간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림과 사진으로 그 사람을 추억하곤 했다. 사진 앞에 대고 무어라 말하면 감정이 해소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상 현실 기술의 개발로 이미 사망한 사람의 형태와 목소리를 그래픽으로 복원해 짧은 시간 경험케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1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추억은 진짜가 아니다. 얼마나 사실적이든,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는 될 수 있지만, 그리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오히려 실제를 완벽히 복원하려는 과정에서 더 큰 상실과 공허를 만날 수도 있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곳. 생전의 형태와 모습으로 그 사람을 대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별의 경험이 있는 모두는 매일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
자전거를 타고 일본을 종주하다가 우연히 들른 작은 마을.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입에서 입으로 이상한 소문이 들린다. 그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동네 ‘타요리가나이’에 가면 ‘간절히 소망한 이’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몽롱해지던 정신이 선명해진다. 그곳에 찾아가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그리워하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보고 싶은 이름들을 곱씹을 필요도 없이 ‘나’에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아니,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그길로 타요리가나이를 찾는다. 낯선 지명의 낯선 방. 누구나 한 번 들어가면 소식이 없어진다는 마을, 타요리가나이에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그의 방으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늦은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대문을 지나온 사람의 얼굴은 3년 전 떠나보내고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 사람, 보고 싶어 마지않던 그녀였다.
처음에는 다들 그런다오.
김은애 작가의 단편 〈타요리가나이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마을 ‘타요리가나이’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타요리가나이(便りがない)는 일본어로 ‘소식이 없다’라는 뜻이니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는 제격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사람들에게서 소식이 들릴 수는 없다. 아내를 병으로 잃은 쇼우타 씨가 ‘평화’를 찾았다고 말했다는 그 마을. 하지만 누군가는 한 번 다녀와 미친 사람처럼 목숨을 끊었다는 정체불명의 그곳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이 마을은 가는 길부터가 평범하지 않다. 큰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산 밑의 오솔길에서 ‘오른편’으로 꺾어 내려가면 된다. “왼쪽은 쳐다보지도 말고” 가야 한다. “거기엔 길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오른편 길로 가면 마을이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는 갑자기 웃으며 자신이 그 마을 사람이라고 답한다. 왠지 미심쩍지만 계속 가보기로 한다. 강한 그리움은 때로 공포심을 이기는 법이다. 마을에 도착한 날 밤 자정쯤, 드디어 ‘나’는 그리운 사람을 만난다.
마을에 오는 길이 하도 수상하고 의심스러웠기에, 다시 만난 기쁨에 마냥 설레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계속 내 곁에 있다면, 그가 없는 마을 밖으로는 조금도 나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고립시키고, 결국 ‘소식’조차 끊기게 하는 곳이 바로 ‘타요리가나이’다. 세상으로부터 사람을 격리하고, 그들만의 환상 속에서 살게 하는, 생각해 보면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곳이다.
다행히도, 그 마을에는 금기가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가지 않아야 한다. 어떤 소설이든 금기가 있으면 반드시 깨지기 마련이다. 비가 쏟아지는 날, 밖에 나간 주인공은 아내를 잃지만, 자신이 본 모든 게 가짜였음을 깨닫는다. 이 소설 안에서는 금기가 깨짐으로써 주인공이 현실로 되돌아온다.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일종의 관문인 셈이다. ‘나’는 언젠가 마을에서 탈출한 누군가가 읊었다는 ‘없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타요리가나이는 어쩌면 소식이 아닌 ‘실체’가 없는 마을인지도 모르겠다.
없어, 없어
김은애 작가는 쓰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 먼저 소설의 분위기를 독자에게 인식시키고 그 안에 배경과 인물을 꼼꼼히 배치한다. 〈타요리가나이의 사람들〉도 정확히 그런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일본어로 보이는 제목의 ‘타요리가나이’를 본 독자들은 그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보게 된다. ‘소식이 없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면, 먼저 소설의 분위기가 어떠할 것인지가 느껴진다. 미스터리하고, 으스스한, 소식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리라는 직감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진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은 정확히 제목의 분위기에 부합한다. 타요리가나이는 주인공 ‘나’가 먼저 들렸던 마을에서 환각제를 사용해 만든 가짜 마을이었다. 죽은 사람을 향한 그리움으로 외지인을 끌어들여 고립시키고, 그 고립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목적이 현재로서는 소설에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만약 마을 전체가 도모해 외부인을 가둘 만한 이유를 정한다면, 민간 신앙에 기대어 인신 공양을 드린다거나, 금품을 갈취해 마을 전체가 먹고 사는 일종의 사업이라는 설정을 추가할 수도 있겠다.
사람의 감정을 멋대로 이용해 이윤을 추구하는, 소위 ‘사기’에 마을 전체가 경도되어 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환각제의 사용도 서슴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신비한 마을. 단순히 환각제로 인한 현상이라고 하기에 이 마을은 잘 꾸며져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더 세부적인 공포를 조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외지인의 소지품에 들려 있는 사진을 참고해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분장을 하고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찾아가는 것이다. 환각제를 먹은 상대는 확실히 그것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분장’을 활용하면 비가 올 때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규칙도 산사태를 활용했을 때보다 좀 더 현실적인 금기가 된다. 비 오는 날 외출하면 화장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사실 환각제만으로 없는 마을 전체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런 사실적인 뒷배경을 추가한다면, 오히려 환상적으로만 느껴지던 마을이 실제로는 다 허구였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줄 수 있다. 정교하게 구성된 가짜는 때로 진짜처럼 보이는 법이다. 지금은 ‘환각’이라는 이름으로 다소 모호하게 스케치 되어 있는 마을의 세부 내용과 그 안에 담긴 충격적인 진실을 작가 고유의 상상으로 풀어낸다면, 훨씬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소설의 끝에 이 마을의 진상이 밝혀지는 다큐멘터리의 부분이 인용된다면 어떨까. 일본의 한 마을. 드라마 세트장처럼 산 아래에 또 다른 고립 지구를 만들고, 그 안에는 환각제에 중독된 외지인들이 득시글거리며 그리운 사람을 찾아 배회하는, 그런 마을의 실체가 드러난다면, 시청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지금의 결말은 그저 마을이 ‘환상’이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일들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이후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건 작가의 몫이다. 그러나 종교와 마약, 사기 등 실제의 범죄로 인해 충분히 구체적인 사건이 될 수 있는 이 마을의 진면모가 독자로서 궁금해진다. ‘타요리가나이’라는 으스스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가 독자에게 더욱 풍성한 해석의 여지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더하여, 그 마을 안에서 속절없이 갇혀야 했던 그리운 마음들이 언젠가는 현실로 되돌아와 반드시 회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