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날, 시골집 마당에 뚜껑 덮인 독이 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그 독을 누군가 들어 당신 앞에 가져다 놓았다고 해보자.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텍쥐페리는 구멍을 세 개 뚫어 놓고 양이 들었다고 둘러댈 것이고, 슈뢰딩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고양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독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종류의 수수께끼인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우선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일반적으로, 고추장이나 간장을 담근 항아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문제에는 좀 더 창의적인 답이 필요하다. 우주, 바다 같은 말도 안 되는 것이어야 신선한 답이 될까.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물이 들어있다면. 그 모든 게 아니면 텅 빈 독일까.
사실 뚜껑을 열어볼 때까지는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면 슈뢰딩거 씨가 저 멀리서 슬며시 웃겠지만, 그의 손을 완전히 드는 것은 아니다. 이 독에 무엇이 들었는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 이 독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조금 늦게 밝히게 되어 미안하지만, 당신 앞의 독은 현이랑 작가의 단편소설 〈독〉에서 꺼내 왔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었다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거나 걸음아 날 살리라고 도망갔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음, 약간은 뒤로 물러나서 추리를 해보는 것이 좋다. 어쨌거나 이 문제의 답을 밝히기 위해서는 독의 뚜껑을 열어야 할 테니까.
힌트를 하나 주겠다. 이 독에는 소금이 가득 차 있다. 그 소금의 용도는 무언가를 절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금과 함께 절일만한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답을 알았다면 당신의 식성은 좀 일반적이지 않은 듯하다. 아, 그 절인 것을 먹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니 지금 답을 맞히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거나 이상하지는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힌트를 너무 많이 준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니 이제는 대충이라도 추측을 해보시길. 머리를 스치듯 문제의 답이 지나갔으나 ‘설마’라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과감해져 보라. 거의 답에 근접했으니.
이제는 더 끌지 않고 이 독의 뚜껑을 열고자 한다. 미리 경고하는데 자신에게 심신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만약 당신이 청소년이라면, 독의 입구가 보이지 않도록 물러나기를 권한다. 음. 당신 옆에 경찰이 있는 건 이 독 안에 든 것의 후속 조치를 위해서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 독을 소설 안에서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 안에 든 ‘무엇’을 내가 넣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나오더라도 나를 의심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자 이제, 독의 뚜껑을 연다. 당신이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내부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을 수 있기에, 누구보다 먼저 이 독 안을 확인했던 소설 속 둘째 고모의 비명을 함께 인용한다.
“윤명아, 사, 사람이다!”
현이랑 작가의 단편소설 〈독〉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일가친척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장독 안의 시체가 절인 채 발견되며 시작한다. 도입에 배치된 매우 충격적이고도 믿을 수 없는 사건에 독자의 감정은 빠르게 소용돌이친다. 누가, 왜, 장례 절차가 채 마무리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 사람의 시체를 절여 장독에 넣는 잔혹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어른들이 아이들을 방안으로 집어넣는 동안 독자들은 이미 자신이 이 소설 안으로 들어왔음을, 소설 속 인물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이제는 모두가 목격자다. 유난히 북적이는 대가족 안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그 행동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장례를 이제 막 끝내고 모인 소설 속 가족들은 그 수가 꽤 많다. 첫째 삼촌부터 막내 고모까지, 두 돌에 돌아가신 다섯째 고모를 포함해 그 항렬의 어른들만 줄 세워도 자그마치 일곱 명이다. 보기 드문 대가족이지만, 노동력이 중요했던 과거에는 아이들을 그렇게 많이 둔 집이 지금만큼 드물지도 않았다. 사실 일곱 명이라는 가족의 ‘수’에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하다. 이렇게까지 가족의 수가 많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독에서 발견된 시체. 그것이 많은 사람 앞에서 보여야 더욱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누구도 자신이 아닌 타인과 완벽히 마음을 같이할 수 없다. 하나의 인생은 하나의 세계와 같다. 그 안에서 견고히 쌓인 경험과 시간을 다른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사람보다 세 사람이, 세 사람보다 네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기 어렵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일곱 명의 사람은 어떨까. 그들이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서는 일곱 차원의 어긋남이 조율되어야 한다.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지금 이 가족의 수는 일곱이 훨씬 넘는다. 형제의 수가 일곱일 뿐이지 그들의 자식까지 따지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마음의 수가 많을수록 삐걱거리는 소음은 커진다. 요컨대, 이 가족들에게는 이미 모임 자체가 소음이다.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 그들의 인성에 특별한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불필요한 소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는 완벽히 가릴 수 없던 하나의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은 소설의 일인칭 서술자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나’와 깊은 연관이 있다.
‘나’는 부모님과 친자 관계가 아니다. 어른들은 쉬쉬했지만, 아이들의 눈치는 언제나 어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빠르다. 감춘다고 감추어질 리 없는 입양 사실을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벌써 알았다. 사실 부모님이 필사적으로 감추어 왔다고 생각하는 것 치고는 허망하게 밝혀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나’는 친척 집 세쌍둥이의 부주의한 언행으로 출생의 비밀을 깨닫는다. 일곱 가족이 공유하는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다. 사람이 많으면, 누군가는 입을 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독자에게 두 갈래의 추리를 모두 요한다. 첫째로, 독 안에 시체를 넣은 사람은 누구인가. 둘째로, ‘나’의 친부모는 누구인가.
신기하게도, ‘나’의 부모는 친척 중 한 사람으로 좁혀진다.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부모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그들 중 부모가 누구일지 추리하기 시작한다. (사실 ‘나’가 친부모의 정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조금 현실성이 떨어진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비밀을, 아무리 아이가 자고 있다고 해도 함께 있는 차 안에서 얘기한단 말인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다행일까. ‘나’는 침착하게 어른들의 면면을 훑는다. 그러나 누가 친부모일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독 안에 시체를 넣은 범인 또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범인을 찾아야 하는 모두는 의외로 시체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이미 한 사람의 초상이 마무리된 집에서 발견된 또 다른 시체는 모인 사람들의 피로도만 높일 뿐이다. 하지만 친척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뒤에서 이야기한다.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설령 그 방법이 무례하고 불쾌하다 하더라도, 서로의 신경을 긁는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 이 가족들은 그런 식으로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런 느낌이 소설 전반에서 느껴진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맞물리지 않고, 이 의견과 저 의견 사이에서 마찰이 생긴다. 그리고 그 모든 균열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나’는 일가친척들이 쉬쉬하는 비밀의 주인공이다. 그가 변방의 인물 같지만, 항상 대화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사실 이 소설에서 ‘나’의 비밀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다. ‘나’라는 인물과 그가 얽힌 과거 사건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비밀은 좀 더 견고한 껍데기 안에 단단히 밀봉되어야 한다. ‘나’의 캐릭터가 조금 더 비밀스러울 때 비로소 마지막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충격적인 과거의 진실이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실’과 함께, 전혀 관계성이 없어 보이전 ‘나’의 부모와 살인자가 밝혀진다. 현이랑 작가는 부모의 정체가 궁금한 ‘나’와 살인범의 정체가 궁금한 독자의 마음을 이야기의 끝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결말에서 드디어 드러낸다. 그 둘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친부모 명단에서 이미 먼저 제외된 막내 고모의 자식이었다. 막내 고모는 말수가 적고 어수룩하다. 소설 전반의 묘사로 보아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나’의 친부모 리스트에서 빠졌다. 그러나 독 안의 시체, 그의 정체가 밝혀지자, 모든 퍼즐이 한 번에 맞아들어가기 시작한다. 큰아버지의 아들 충수는 과거에 막내 고모를 강제로 임신하게 했다. ‘나’는 막내 고모와 큰아버지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일곱 형제로 구성된 대가족에서는 흔히 ‘족보가 꼬인다’라고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삼촌과 조카의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거나, 같은 항렬이라도 큰 어른의 큰 자식과 막내 어른의 막내 아이 나이가 몇십 살도 차이 나는 일이 많다. 그럴 때 발생할 수 있는, 그러나 발생하면 안 되는 사건이 이 소설 속 가장 큰 비밀이다. 조카가 고모에게 아니, 사람이 사람에게 저질러서는 안 되는 짓을 독 안의 시체, 충수는 과거에 저질렀다.
충수의 성적 폭행으로 막내 고모는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나’가 태어난 것이다. ‘나’에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도, 친척들이 유달리 ‘나’의 비밀을 감추던 것도 모두 이해가 된다. 몇몇 못된 어른에게 ‘나’의 탄생은 실수였으며 가문의 치부다. 몇몇 다른 어른에게 ‘나’의 탄생은 세상에 굳이 공개될 필요 없는 군더더기다. 이후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나’에게 닥쳐올 아득한 충격, 또는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되었을 어두운 결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가만히 상상해 볼 뿐이다.
“저 이는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거다. 다만 늦게 받았을 뿐이야.”
벌을 늦게 받은 것, 지연된 시간으로 인해 훼손된 여러 사람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줄 수 있을까. 소금에 절인 시체와 막막하게 사라진 시간 중 무엇이 더 중할까. 경중을 따지기보다는 그저 이 상황에 놓인 자체만으로 몰려오는 충격파를 온몸으로 가만히 느낀다. 그리고 이 어긋난 가족들의 잔인한 틈에 조금씩 끼어 있던 ‘나’와 고모의 시간을 빼내 모아 온전히 붙여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죽음보다 잔인했을 누군가의 순간 앞에 놓을 수 있는 최선의 애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