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나.
이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을 고민케 한 질문이다. 누군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질타받을 만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해 보자. 그를 처벌하는 건 누구의 몫일까. 아주 오래전, 법과 국가의 체계가 없고 사람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 없을 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식으로 복수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기준으로 타인을 벌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그리고 모든 사건이 전부 사실만을 드러내지는 않기에, 때로는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누군가가 처벌받거나, 벌을 피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벌을 내릴 권한을 지닌 사람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불공정한 잣대로 누군가의 죄를 판정할 때, 대중은 분노한다. 그리고 차라리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법이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이 공정이 아닌 더 큰 권력을 향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때 느껴지는 무력함은 생각보다 크다. 이 무력함은 때로 실제의 분노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 감정의 분출을 막지 않고, 직접 목소리와 몸으로,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피어난 이야기는 개인에게 초능력을 부여한다. 우리가 이렇게 평범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창작된 대표작은 역시 일본의 만화 『데스노트』다. 이 만화의 ‘데스노트’는 이름만 적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공책으로, 이미 대중들에게는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다’라는 표현이 관용구처럼 사용될 정도로 익숙하다. 법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던 대학생 야가미 라이토가 법의 불완전함에 고민하던 중 데스노트를 주우며 시작하는 이 만화는 ‘사람이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공책이라는 구체적인 물건을 제시하며 작가만의 의견을 펼친다.
이런 노트가 ‘법관’을 꿈꾸던 라이토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안전을 위한 장치였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역시 노트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음에 길드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개인에게 부여된 처벌권도 질서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복수가 가능한 가상의 이야기는 언제나 비극으로 흘러가는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안에서 최선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김아직 작가의 단편 〈김문조의 스케치〉는 이런 맥락에서 이미 비극이 예견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남자 김문조. 그는 평범하지 않은 그 능력을 40년 만에 사용하기로 한다. 누군가를 ‘벌’하기 위해서다. 독자는 소설의 도입에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데스노트』의 라이토가 그랬던 것처럼, 김문조 역시 파멸의 길을 걷지 않을까.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한 이야기의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그 과정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벌써 결론을 예측할 수 있는 주제를 작가가 굳이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김문조는 40년 만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는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 질병과 개인주의의 악당이 즐비한 2021년의 한복판이다.1
슬픔보다 강한 세월을 몰아낸 전염병
코로나19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2019년 11월로부터 벌써 4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독한 감기로 인식하고 있지만, 한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인류를 두려움에 몰아넣었고, 실제로도 참혹한 수의 사망자를 매일 쏟아냈다. 2024년 4월 현재 기준 700만 명의 사람이 이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백신의 발명 여부가 불투명하던 때는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했다. 마트와 식당을 비롯한 실내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놀이동산, 길거리 등 야외도 사람이 거의 없이 한산했다. 스치는 사람에게도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감염자의 동선이 시시각각 공개되는 등, 잠시 인간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린 모습의 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밖에 나갈 수 없던 시절. 아니, 마스크를 쓰고서도 밖에 나가기가 두렵던 이 때에는 미래가 가장 어둡게 점쳐지곤 했다. 사람들이 평소보다 민감하고, 서로를 향한 비방과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익명성이 강화되고, 개인주의가 심해지며 ‘포스트 코로나’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극도로 위태로워질 것임이 사실화되기도 했다. 이때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밖에 나오거나, 일명 ‘턱스크’라고 불렸던 불완전 마스크 착용은 마치 실내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처럼 타인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회의 질서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 남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는 마땅한 비난이 이어졌다.
〈김문조의 스케치〉 속 김문조는 아마 그쯤 사람들의 배려 없음에 환멸이 난 듯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실수로 동생을 죽게 한 그의 능력. 그림을 그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초능력을 40년 만에 사용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김문조는 마치 『데스노트』 속 라이토가 노트를 우연히 주운 것처럼, 갑자기 그 능력을 부여받는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능력’. 그러나 그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무엇이든’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 능력으로 김문조는 ‘최선’부터 ‘최악’까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이미 최악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단지 친구가 아빠의 차를 자랑하는 게 눈꼴사나웠다. 그래서 그 차가 저수지에 처박히는 그림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여동생이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처럼 김문조의 능력에는,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능력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 사람을 벌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해관계가 끼어든다. 이 사람이 벌을 받음으로써 위로와 이익을 얻는 집단이 있고, 오히려 상실감을 겪는 집단이 있다. 그 마음의 경중을 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건 생각보다 위험하다. 친구 아버지의 차가 추락하는 곳에 동생이 있을지는 몰랐다. 해방감을 줄 줄 알았던 그의 행동은 최악의 결과만을 내놓았다.
그런 김문조가 40년 만에 코로나19 팬데믹 속 악당들을 위해 다시 스케치를 시작한다. 그는 감염 수칙을 지키지 않으며, 특히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는 등 방역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입 모양을 전부 빨대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김문조에게 모든 사람을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몇 명을 본보기로 ‘턱스크’를 하지 않으면 입이 쪼그라든다는 괴담이 퍼져 나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라는 말이 가장 무섭다. 삶이란 항상 정해 놓은 ‘생각’ 바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은 김문조의 예상에서 어긋난다. 입이 쪼그라드는 증상이 두려워 사람들이 마스크를 단단히 쓸 것이라는 그의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두려워하지도, 조심해서 다니지도 않는다. 분명히 스케치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되지만, 그 역할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계속 무례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화가 난 김문조는 입이 쪼그라든 사람들의 마스크를 벗겨 그들이 방역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파렴치한들이라고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가 남의 마스크를 내리는 것 역시, 방역 수칙을 어기는 행동이다.
사람이 사람을 벌하는 것. 그 과정은 모순투성이다. 평등한 위치에 놓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어찌 판단할 수 있을까. 누구든 크고 작은 잘못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짓지만, 누구도 그 모두의 정확한 무게를 잴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정확한 양형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죄 아닐까. 결국 사람이 사람을 벌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잘못이 따라붙는다. 정말 신이 있다면, 초월적으로 사람의 잘못을 꿰뚫어 보는 동시에 모든 죄를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야말로 죄 없이 사람을 벌할 수 있을 것이다. 김문조가 타인의 마스크를 벗겨 그의 잘못을 세상에 알리고자 마음먹는 것은, 남의 죄를 밝히기 위해 그 자신도 죄인이 되는 모순을 상징한다.
김문조는 그렇게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벌하겠다는 명목하에 광적인 스케치로 사람들을 해치던 중, 같은 능력을 지닌 아이에게 그 자신이 심판받는다. 손이 스펀지 공으로 바뀐 김문조는 이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데스노트’처럼 위험한 물건을 신중하게 사용하지 못한 자의 말로다.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라는 생각은 이렇듯 쉽게 변한다. 질서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을 때, 개인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런 정의가 세상에 우후죽순 솟아나면, 큰 혼란이 야기된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코자 했던 개인들에게 잘못은 없다. 만약 누군가에게 잘못이 있다면, 개인들이 질서를 대변할 수 있다고 착각할 때까지 변질되어 버린 ‘질서’의 수호자들 또는 질서가 자신을 벌하지 않는 데에 비뚤어진 당당함을 가진 모든 이들이 죄인이지 않을까.
짧은 분량 안에 ‘사람이 사람을 벌하는’ 과정을 완결성 있게 담은 〈김문조의 스케치〉는 그 자체로 완성된 이야기다. 김문조의 행동에 종종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면모가 있지만, 모두가 혼란스럽던 팬데믹 시대에 그런 능력을 지녔다면, 그처럼 행동했을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날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진 지금에서야, 다행히 멀쩡한 입을 만져보며, 그러나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냉기를 느끼며, 그래도 내가 그 시절 폐보다는 선을 끼치는 사람이었길 바라 본다. 나의 불행보다는 행복을 비는 사람이 많았기를, 나로 인해 불편했을 사람보다 마음을 놓은 사람이 많았기를.
그리하여 김문조의 스케치가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쓸모가 없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병으로 모두가 두려웠던 시절에 감히 남을 쉽게 판단하고, 타인에게 더 큰 해를 끼칠 초능력 같은 건 아무에게도 없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