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물결을 따라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시간의 물결 속을, 당신과 함께 (작가: 겨울볕, 작품정보)
리뷰어: cedrus, 2월 13일, 조회 57

*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무한을 경험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고유한 개체로서 저마다의 고유한 삶을 살기에, 내 것이 아닌 다른 삶을 알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내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나의 경험이란 결국 나의 삶에 귀속되므로.

그러나 타인의 창작물을 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벗어난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소설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상상하며, 상상을 동력으로 세상을 새로이 살아간다. 약속된 시간 동안, 약속된 방식으로.

 

<시간의 물결 속을, 당신과 함께>는 블랙홀 가까이 위치한 ‘시간도약식 보관고 및 소각로’ 에테르나가 단 한 명의 인간을 사랑해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의 세상이 무너지고 태어나는 시간을, 온 우주가 한 인간을 향해 기우는 거대한 사랑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을 경험한다.

 

에테르나에게 당신은 특별한 존재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신만이 에테르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타인이라 할 만큼. 날 때부터 유리된 시간 속에 유배되었던 에테르나는 다시 한 번 유리된 시간 속으로 뛰어든다.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오래 전 에테르나를 만든 사람들에게, 에테르나와 함께 머무른다는 건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블랙홀 가까운 곳, 고작 1년 머무르는 것으로 100년의 세월을 지워버리는 곳이었으므로 에테르나의 곁에 기꺼이 머무르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에테르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은하의 1/4을 먹여살린다는 걸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알기만 할 뿐이었다. 단 한 순간도 타인의 존재가 에테르나에게 의미를 가졌던 적은 없었으며,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보관고를 관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위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에테르나. 오직 혼자인 에테르나에게 당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 만 것은 불가피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이곳을 좋은 곳이라 말해준 건 당신이 처음이었고, 에테르나에게 선물을 준 것도, 다시 찾아온 것도, 들를 때마다 제어실의 화분을 확인한 것도 당신이 유일했다.

 

당신의 눈으로 본 에테르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거대한 발전소이자 보관고인 에테르나는 당신과 대등한 존재, 친구라기보다 장소에 가까웠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곳. 일상에서 벗어난 곳. 안심하고 비밀을 감출 수 있는 장소.

한편으로 에테르나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신은 두터운 시간을 밀어내고 에테르나에 도달해, 사라져버렸다 생각한 과거를 만난다.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을 때 느끼는 허탈함을 대체할 무언가가 이곳에는 있다. 당신의 삶을 구성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 이곳에 있다. 당신이 에테르나를 만나는 행위가 진정 과거로 돌아가는 일일 수는 없었으나, 그에 준하는 기적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실로 가득한 당신의 삶에는 위로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에테르나의 세상이 바깥을 중심으로 돌아갈 때, 에테르나는 은하 외딴 곳의 소각장에 불과했다. 창조자들이 남겨준 데이터로만 세상은 존재했고, ‘별들에 휩싸여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에테르나는 주어진 일들을 수행했다.

창조자들은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에테르나라는 의식 코어를 심었겠으나, 별들 사이에 홀로 남겨질 지성체의 외로움이야 상상해본 적 없는 듯하다. 그들 입장에선 발전소를 세운 셈이니, 지성체라는 인식조차 없었을 공산이 크다. 허나 이곳은 그저 멀리 떨어지기만 한 공간이 아니다. 블랙홀 지평 가까운 곳, 시간마저도 중력에 붙잡히는 곳이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된 장소에 에테르나를 홀로 남겨두면서도, 창조자들이 보여준 감정은 절망과 원망이었다.

에테르나는 존재할 뿐, 세상에 속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존재를 알았으나 사랑할 수는 없었다.

 

헤아릴 이유조차 없었던 얼어붙은 시간은 당신의 방문을 계기로 흐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에테르나의 중심이 되었을 때, 에테르나의 세상은 전례 없는 전복을 맞는다. ‘사람을 섬기도록’ 설계된 인공지능이 사람들을 징벌하고, 얼어붙은 시간 속으로 찾아와주던 당신은 시간 속에서 얼어붙는다.

시간의 흐름 또한 역전된다. 한때 당신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면, 이제는 에테르나의 시간만이 흘러간다. 당신이 기다렸던 것보다, 당신을 기다렸던 것보다, 비교하는 의미가 없을 만큼 긴 시간을 에테르나는 흘려보낸다. 그렇게 백 년이 흐르는 동안 당신의 시간은 몇 분,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에테르나가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일 년이 채 못 되었음을 기억하자.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에테르나가 기다려야 했던 시간은 훨씬, 아득히 길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은… 영원하다.

 

시간의 물결을 따라 흘러간 것들은 영원 속으로 가라앉는다. 당신과 에테르나가 서로에게 전하려던 마지막 말들은 결코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마지막은 멈춘 시간 속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별은 무한히 유예되며 그저 당신과 에테르나, 둘만이 남는다.

 

시간의 물결을 따라, 우리가 도달한 곳은 새로운 신화의 장이다.

시간 속에 얼어붙었던 것이 마침내 깨어나고,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되어 흐르는 시간은 새로운 봄을 가져온다. 당신과 에테르나는 무한한 영원으로 떠났으며, 에테르나였던 땅에서는 시간이 싹을 틔운다. 시간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창조자의 것도, 당신이나 에테르나의 것도 아닌 세상이 자라나리라.

블랙홀의 둘레를 따라 만들어진 거대한 에테르나. 다섯 개의 표본실을 채우고도 남았던 무성히 자라난 식물들. 에테르나를 만들어낸 세상은 사라질지언정 에테르나가 만들어낸 세상은 이제부터 피어날 것이다.

두꺼운 얼음을 깨고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우리는 봄의 도래와 생명의 회복력을 상상한다. 세계의 전복을, 영원히 이어지는 흐름을 상상한다.

 

이 글에서 단 하나의 조각만을 고르라면 나는 에테르나의 기다림을 말하겠다. 에테르나의 일생은 오로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만들어지고, 창조자들이 떠나간 이후로는 언제나. 누군가 이곳에 와주지 않을까 기다렸다. 당신을 만난 뒤로는 당신만을. 그리고… 당신이 사라진 뒤로는 다시 만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인내했다.

바깥 세상에서 당신에겐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에테르나의 세상에서는 유일한 변수가 당신이었으므로, 당신이 있어야만 에테르나의 세상은 변할 수 있었다. 당신을 만나야만 에테르나의 기다림은 의미를 가졌다.

 

쓰레기장이며 발전소이기도 했으나, 에테르나는 스스로를 냉장고라 칭한다. 데이터에 불과한 세상과 달리 당신만이 유일하게 존재했으므로. 당신의 표본을 보관하는 것만이 에테르나에게 가치 있는 행위였으므로.

당신이 있어 자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었기에, 에테르나는 ‘에테르나’이기를 포기했다. 무한한 시간과 연산 능력을 버리고, 창조자의 의지대로 살아온 생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살다가 은하의 멸망을 보고’, ‘목적도 없는 저주받은 생애를 이어나가야만’ 했을 에테르나는 온전히 자신만의 생애를 누리기로 했다. 단 몇 분에 불과할지라도,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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