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베스트에 올라와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중단편의 매력이 무엇인지, 짧은 글로 독자에게 어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쓴 소설이다.
분량이 짧아 아쉽지만 완벽한 기승전결과 수미쌍관의 구조적 완결성의 미학까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P로 지칭되는 중학교 동창이 살인을 저지르고 화자의 집으로 잠시 몸을 피하면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독자의 이목을 끈다.
사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 독자는 어느정도 집중력을 가지고 작품에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배경설명이든 주인공의 이름이든(일본소설에서 특히..) 독자는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 안에 빠져들기 위해
어느정도 통과의례적인 집중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글의 경우 P로 지칭되는 주인공,간결한 서술,명확한 플롯으로 인해 그런 고통의 시간들이 없다시피한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숨기고 있는 듯한 (초반엔 무슨얘긴가 하는데 결말에 가서 시원하게 밝혀지는) P와
화자의 조심스런 대화에서 독자는 위화감을 느끼지만 더이상 상황은 발생하지 않고 P는 쿨하게 집을 떠난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종료에 도망자 P를 숨겨주는데 따른 화자와 독자의 긴장감은 일견 해소되는 듯 하다.
이후 P의 과거사가 편안하게? 서술되고, 1인칭 관찰자 느낌으로 진행되는 화자의 담담한 서술로 인해 P의 사연과 도주중인 이유가 드러남에도 독자의 심박수는 빨라지지 않는다.
하, 지, 만…. 이 평온하고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부분,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거사 부분이 작가의 놀라운 솜씨와 만나 오히려 태풍전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스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결말부분에 문득 다시 찾아온 P와의 대화에 있어 작품은 1인칭 관찰자가 주인공 시점으로 변하게 되는 마법을 보여주고(일종의 시점트릭, 서술트릭일수도)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을 통해 독자의 뒤통수를 때린다.
흔히 1인칭 시점의 경우 화자를 신뢰할 수 있는 화자로 설정하므로 독자들은 화자가 전해준 정보를 아무 비판없이, 여과없이 받아들이며 1인칭 관찰자 시점의 경우는 그러한 경향이 더하다. 이 글에서도 독자가 초중반 화자의 서술을 큰 의심없이 밧아들인 탓에 초중반부의 암시와 중반부의 복선 조각들이 놀라운 퍼즐을 완성하게 되는 결말에 이르러 작가가 선사하는 결말의 충격이 배가되는 느낌이다.
읽는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잔향이 훨씬 길게 남는 진한 향의 고급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짧지만 굵은 단편의 미학이 잘 발휘된 이야기로, 작가의 중장편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