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라는 껍데기에 종말 향 첨가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좀비 버스 (작가: 1713, 작품정보)
리뷰어: 기다리는 종이, 23년 11월, 조회 35

좀비 버스는 꽤 직관적인 소설입니다. 소설이 단순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외려, 이 소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이죠.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을 알아보기 그다지 어렵지 않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진 않지만, 직관적인 소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이 소설의 장르를 좀비 소설, 더 나아가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로 읽어낼 수 있는가는 약간 개인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 눈치챈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 소설의 좀비는 일종의 도구로 사용될 뿐인, 껍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 자체는 꽤 짧으며, 구조는 간결합니다. 주인공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기 위해 버스에 올라탑니다. 버스 내에는 여느 때처럼 열댓 명의 사람들이 타 있으며, 그들은 각각 자신이 할 법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은 정말 꽤나 평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피곤한 회사원, 노약자석의 노인, 남에게 관심 없는 대학생 남자 등… 이는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안은 여성에게 다른 중년 남성이 자리를 양보했는데, 이른바 ‘꼰대 남성’이 그 자리를 냉큼 앉아버리면서 극대화됩니다. 그러면서 식료품 봉투를 가득 든 중년 여성과 꼰대 남성 간의 언쟁이 시작되고, 교복 차림의 여고생이 그 모습을 촬영합니다. 떡진 머리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뚱뚱한 남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평면적인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실제로 기능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실제로 그런 의도였는지는 무론 알 수 없지만, 버스 안에 실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것을 보면 얼추 제 생각이 맞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버스에는 노인이나 중년 남자부터, 중년 여자나 대학생, 여고생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타 있으니까요.

이런 다양한 계층이 탄 모습은 흔하게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평범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풍경이 갑자기 변화합니다. 막대한 수의 좀비들이 나타나서, 버스가 가는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죠. 버스 안의 사람들은 일상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좀비 사태에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중년 남성의 진두지휘 하에, 버스 밖으로 나가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쉽게 진행될 수는 없습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중년 남성의 지휘 하에서도 조금씩 마찰을 일으키며, 특히 버스 밖으로 어떻게 안전하게 나갈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버스 안에는 개나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 다리를 다친 사람, 노인 등 말하자면 ‘약자’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고, 따라서 이런 좀비 사태에서 굳이 데리고 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죠.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은 다리를 다친 남자에게는 같이 나가자고 하지만, 아이와 개를 데리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노인은 처음부터 나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자리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뚱뚱한 남자는 여고생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유령 취급을 받게 됩니다.

버스 안에서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 일어난 것이죠.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버스 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꽤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약자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서사적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대답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고, 아예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기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버스를 나가려는 사람들은 개와 아이를 데려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창 밖에서, 전 남자친구인 현우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조현병을 가지고 있으며 환각과 환청을 겪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버스를 나가려는 사람들은 나갈 준비를 하고, 버스 안에 남아 있던 뚱뚱한 남자는 사실 밖에 좀비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줍니다. 버스 문이 열리고, 도망치려던 사람들은 쏟아지는 좀비에 휩쓸려 사라집니다. 그리고 좀비가 된 전 남자친구가 주인공에게 달려들지요.

다만 주인공이 환각, 환청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소설을 보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애초에 좀비가 존재하기는 했을까요? 2년 만에 다친 모습으로 나타난 남자친구가 진짜일 리 없는 것처럼, 좀비도 환각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며 소설을 곱씹어 보면, 사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버리고야 맙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설령 소설 초반의 모든 부분이 가짜라 하더라도 주인공이 그것을 상상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즉, 그것이 환각이라도 주인공이 생각한 사회의 모습이 반영되었다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좀비 버스는 좀비 소설이나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의 좀비는 단순히 막을 수 없는 폭발적인 재난에 가까우며, 다른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전혀 상관 없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좀비가 아니라 급작스러운 홍수가 일어났고, 물에 반쯤 잠긴 버스에서 밖에 고무 보트를 탄 해적들이 지나다닌다고 하더라도, 소설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 소설은 꽤 직관적으로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사회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사라졌을 때 약자들이 어떻게 대우받게 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 안전망이 사라진 사회, 무법적인 사회를 종말, 즉 아포칼립스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좀비 소설은 아닐지 몰라도, 어떤 측면에서는 아포칼립스적 우화라고 읽어낼 수는 있겠습니다.


리뷰 시작 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꽤 짧고 간결합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의 조현병은 놀라움보다는 아쉬움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읽은 모든 것이 그저 환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요. 다만, 그것보다는 더 곱씹어 볼 부분이 있기에 비평을 적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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