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맥락 위에 놓인 엔딩 후의 이야기..라고 파악해서 본다면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하그리아 왕국 (작가: 난네코, 작품정보)
리뷰어: 영선, 23년 11월, 조회 105

이미 많은 분들이 리뷰해 주신 작품입니다. 저도 앞서 리뷰해 주신 분들과 비슷한 감상(꼼꼼한 세계 구현을 해내는 작가님의 열정과 의욕과 야망 등등)을 받았습니다만 굳이 또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마 저의 브릿G리뷰 최초로 자기반성용 리뷰가 아니게 되겠군요.

 

느린 속도에 관하여

꼼꼼함 세계 구현이라는 요소와 무관한 것은 아니겠지만, 『하그리아 왕국』의 서술상 특징이라고 한다면 빠른 전개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겠습니다. 물론 다른 리뷰에서도 지적하는 바입니다만, 느릿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가도 “잉? 언제 이렇게 진도가 나갔지?” 싶은 기묘한 매력의 속도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냥 느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든 서둘러서 나가는 전개는 아닙니다. 근래의 소설 쓰기 지침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아야겠죠. 이야기가 본격적인 흐름을 타는 것은 독살 사건부터지만 그 독살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 분량을 읽은 뒤이고, 독살 사건이 발생된 후로도 이야기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이야기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는 것은 아닙니다. 수시로 인물의 시선을 옮겨가고, 심지어 외전이라는 표를 달고 나온 작중 세계의 논문이나 에세이 같은 것들이 끼어들어 더더욱 속도를 늦춥니다.

 

일단 저는 이 부분이 부러웠습니다. 앗, 여기서 자기반성이 나오긴 나오겠군요. 저도 늘 작가님처럼 느릿한 대신 꼼꼼하게 세계를 채워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만, “전개가 느리다고 독자들이 읽다 그만둘 거 같은데…” 하는 초조함에 쫓겨 빠른 이야기 전개를 시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차분히 채워나가는 전개도, 빠르고 경파한 전개도 아닌, 매우 어중간한 결과만 냈다는 아쉬움이 드네요. 반면 작가님은 과감하게, 묵묵하게, 마치 넓은 면적으로 벽돌을 쌓듯이 이야기 속 세계를 쌓아 올립니다.

 

그런데 이걸 그냥 작가님의 욕심과 의욕,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향한 애정과 덕심이라는 측면에서만 칭찬하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느린 전개가 옳으냐 빨라야 유리하느냐의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하그라아 왕국』을 읽으며 빅토르 위고의 글쓰기를 연상했는데, 특히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웃는 남자』의 도입부를 떠올렸습니다. 『웃는 남자』의 도입부는 제 나름의 연구 과제기도 했거든요.

 

드라마에 앞서 맥락을 깔기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가 해양 지리학적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해도상의 이런저런 지형지물과 해류의 패턴 같은 것이 너무나 꼼꼼히 나열되는데, 독자들이 “대체 이게 다 뭐람?” 하고 의아해질 즈음 배 한 척이 나타납니다. 그 배는 위고가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해류에 휘말렸다가, 역시 위고가 장황하게 설명한 암초에 충돌해 침몰합니다.

 

배가 완전히 침몰한 후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루한 해양 지리학 강의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싶었는데,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갑자기 강렬하고 감성적인 드라마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배 침몰 과정의 드라마가 강렬했다는 이유만으로 충격을 받았던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해양지리학적 지식을 과도할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하는 데 있어 어떤 보탬이 되었던가? 하는 격렬한 탐구심이 생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근래에 모범 사례로 제시되는 『마션』의 도입부처럼

 

아무래도 좆됐다.

해양 지리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 배는 좆됐다.

 

이렇게 쓰는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위고는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는가…

 

200년 전 태어난 거장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나름대로 내려본 결론은 이렇습니다. 해양 지리학 지식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음으로써, 배의 침몰이라는 한 사건을 훨씬 거대한 맥락 속에 자리 잡게 했다고요.

해류 형성 과정은 크고 작은 규모의 상호작용이 연쇄되고 복합되어 일어나는 거대한 나비효과이고, 바다에 형성된  지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암초를 향해 떠밀려 오는 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배를 건조하는 데 들어간 목재에도, 배에 타고 있다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도, 배가 출항하게 된 역사적 맥락까지 각각이 고유한 과정을 통해 결성된 것이며, 그것들이 촘촘히 꿰어진 크고 작은 상호작용의 연쇄와 복합을 일으켜 지금에 이른다는 암시 –

위고는 그러한 암시를 형성해 놓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배의 침몰 또한 다음번 나비효과로 나아가는, 거대한 맥락 속에 자리 잡은 어떤 상호작용이라는 암시도 주는 것이죠.

 

침몰 장면에 “현실감”을 준다는 단순한 소리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사실, 자리에 앉아 막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일반 독자는 빅토르 위고가 전한 해양 지리학적 지식을 검증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저 그럴싸해 보이는 소설가의 날조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진실이건 날조이건, 독자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핵심은, 거대한 맥락 속에 배의 침몰을 배치했다는 것 그 자체니까요.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면 울분과 슬픔, 절망, 열망이 가득한 생사결의 드라마가 휘몰아치지만, 그조차 거대한 맥락에서 볼 때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미미한 현상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 미미한 현상조차 거대한 맥락에 합류되고, 이로써 형성된 맥락 위에다가, 위고는 또 다른 상호작용의 연쇄와 복합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웃는 남자』는 기이한 운명을 지닌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거대한 맥락 위에 주인공을 배치하는 위고의 장난 때문에, 이야기의 스케일은 한 사람의 행적에 국한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저의 해석이고 저의 가설입니다. 그런데 『하그라아 왕국』을 읽으면서는 제가 『웃는 남자』의 도입부에 대해 나름대로 내렸던 가설을 재확인해보게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하그라아 왕국』는 판타지 역사물이므로 작중 나오는 학술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들은 전부 날조죠… 그러나 위고가 늘어놓은 해양 지식의 날조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듯, 『하그라아 왕국』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으로 빨리 넘어가자면(이미 저도 위고에 준할 정도로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나요)  저의 『웃는 남자』도입부 분석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겠다, 라고 느꼈습니다.

 

『하그라아 왕국』의 전개가 느려지는 건 “외전”딱지를 달고 나오는 에세이들과 각 인물들의 속사정을 꼼꼼히 비춰주고 나서야 이야기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작성 방식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서술 전략이 『웃는 남자』의 도입부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하그라아 왕국』의 외전들은, 작중 사건들을 더 거대한 맥락 위에 놓인, 그 자체로서는 매우 미미한 상호작용으로 받아들이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독자들이 작중 사건을 더 멀리서, 더 큰 맥락에서 판단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죠.

 

맥락 속에서 판단한다… 라는 것이 뭐냐?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그라아 왕국』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당연히 현대 한국하고는 맞지 않는 세세한 문화 차이, 의식 차이는 있지만, 샤흐라자드 대왕(작중 여왕이라고 흔히 지칭됩니다만 이렇게 불러야 맞지 않을까요?)의 작중 행태에 대해 “군주는 가혹해질 필요가 있다” 거나 “사람이 저러면 안 될 거 같은데…” 하는 엇갈리는 평가가 작중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의 독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이 작중 세계에 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작중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하그리아인 고유의 관념으로 비판하기 위해, 그들의 독특한 정신 세계를 독자가 학습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님이 꼼꼼하게 풀어놓는 설정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중 인물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현대 한국인의 관념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럼 외전 딱지가 붙은 에세이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은 다 뭘까요.

 

작중 3왕자의 아버지 “소흐랍”의 이름은 얼굴만 잘생기고 정치는 개판으로 망친 암군에게서 따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고, 빈민굴 남창 출신인 사람에게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변태적일 정도로 잔혹한 농담이라는 충격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이 사람이 소흐랍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은 시점에서는 미남왕 소흐랍에 대해 몰랐을 것 같습니다. 그야 제대로 갖춰진 교육은 꿈도 못 꾸던 사람이었으니). 물론 이것도 작가님이 커다란 맥락을 만들어 놓은 효과 중 하나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죠.

 

이 작품은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작중 서술되는 역사적 사실들도 왕들의 역사입니다. 형성된 맥락이 이러하므로, 『하그라아 왕국』 읽을 때 선대왕들의 행적을 통해 현세대 인물들(즉 샤흐라자드 세대와 그 아들 세대 인물들)의 행적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외전 17에서 현명왕으로 칭해진 미흐리마 왕이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대놓고 시애미짓을 하다 사랑하는 아들과 의절까지 하게 되는 대목은, 현세대의 샤흐라자드의 행적과 겹쳐보게 하는 바가 있죠. 샤흐라자드의 경우 비슷한 문제가 둘째 아들 이스카와 벌어지고 있지만, 어머니와의 감정적 골이 깊어지는 것은 첫째 왕자 아르샨이지요. 심지어 미흐리마와 의절하게 되는 아들의 이름도 아르샨이라, 외전 17에서는 작가님의 의도가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읽혔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전부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똑똑하다는 이스카나 이사야, 아름답다는 누르자한, 심지어 하그리아의 황금기를 가져온 샤흐라자드 대왕마저도 언젠가 죽어 없어지고 더 거대한 맥락 속에 미미하게 자리 잡게 된다는 숙연함이 생기는 것이죠. 작중 세계에서도 역사의 필연성이 작용하리라고 믿게 되는 것은, 인물 각각에게 카메라를 비춰주는 군상극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행동의 배경에는 훨씬 커다랗고 구체적인 맥락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세팅의 부수 효과로, 독자로 하여금 작중 역사의 진보를 반성해 보고, 예측하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현대인의 기준에서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그리아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틀에서 판단하도록 하여( = 등장인물들이 작중에서 진행된 역사적 과정의 한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작중 인물들과 독자 간의 페어플레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새 꿈을 꾸는 자에 대한 경외심이, 이 세계관 속 인물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종교적 신념과 같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그 신념을 재고할 필요나 계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독자들은 이런 맥락을 기초에 두고 인물들의 향후 행동을 비판해보고, 바람직한 선택이 무엇일지 작중 인물들에 앞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독자가 적극적으로 창작에 동참하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죠. 단, 하그리아인의 입장에서요.

한편 하그리아 사람들을 비평하는 데에 있어 현대 한국인인 독자들에게 자리잡은 관념을 아주 배제할 필요는 없으므로, 작중 세계와 독자 사이의 페어플레이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 관심을 끄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네요.

 

그 아이디어가 뭐냐, 『하그라아 왕국』가 일종의 “엔딩 후의 이야기”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엔딩 후의 이야기 (그런데 그것이 커다란 맥락 위에 배치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 당연히 샤흐라자드 때문입니다. 샤흐라자드는 영웅이라 불리는 루스탐의 딸로, 성폭행을 두려워하여(여기에 불새 꿈으로 인한 광증까지 더해져 있습니다만) 칼을 가까이 놓지 않으면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유년기를 보내다, 거친 용병대를 이끌고 반역을 일으켜 폭정왕을 무너트리고 즉위, 하그리아의 황금기를 엽니다. 이 과정에서 몸, 두뇌, 얼굴 등 다양한 매력을 갖춘 남자들을 두루 섭렵하는 에로틱한 로맨스 이야기도 덤으로 놓여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역사극을 쓴다고 하면, 훨씬 흔히 채택되는 스토리텔링은 아무래도 이쪽이지 않나요. 용병 중에서도 가장 강한 거친 사내를 털어버릴 정도로 강하며, 아름다움과 냉혹한 지성을 겸비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공주의 투쟁기! 어지간하면 먹힐 이야기입니다. 거기다 “샤흐라자드는 폭정왕의 암흑기를 끝내고 하그리아의 황금기를 열었다”엔딩으로 깔끔하게 끝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그라아 왕국』는 그다음의 이야기를 이루죠.

 

『하그라아 왕국』를, 파란만장했을 청년기를 보냈던 과거의 주역들이 새로운 세대의 부모가 되어 겪는 일을 다룬다고 볼 여지도 많습니다. 뜨거웠던 과거가 옛일이 되어버렸다는 데에서 오는 애수도 작중에서는 상당하 맛스럽게 다루고 있기도 하죠.

 

 

저는 이와 같은 이야기 세팅이, “주인공은 왕이 되어 황금기를 열었다” 엔딩에 대해 재고하게끔 하는 것 아닐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더랬습니다. 사실, 저는 황금기 엔딩을 꽤나 삐딱하게 보는 입장이었거든요. 중세 시절의 황금기라 한들, 아래쪽의 민중에게 강대국의 “낙수”가 얼마나 떨어질지…

특히 “황금기”의 지표로 내세워지는 것이 영토 확장일 때 저는 더더욱 삐딱해집니다. 전쟁은 당연히 민중들을 징집하여 이루어집니다. 군량미를 충당하려면 평소보다 더 많은 세물을 요구받겠죠.

영광스러운 정복 전쟁에 끌려간 바람에 내팽개쳐진 밭은 돌 굴러다니는 잡초밭이 되어갈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 귀향하면, 그런 땅을 불구의 몸으로 다시 처음부터 개간해야겠죠. 민중들이 성문에서 들이붓는 끓는 기름을 뒤집어 써가며 정복한 땅은, 전쟁을 지휘한 귀족에게 하사되어 일차적으로 그의 부를 채워주고, 이차적으로는 그 영주와 연이 닿은 상류층에게 부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외팔로 돌밭을 개간하는 민중들에게 강대국의 좋은 점이란 “우리나라는 정말 영광스러운 대제국이야! 우리 대왕님도 엄청난 분이시지!” “내가 아무개 장군님의 휘하에서 창을 들고 싸웠지!” 하는 국뽕과 군뽕 정도일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위대한 왕이 즉위하여 황금기를 열었다” 엔딩에 의문을 갖는 이유이고, 특히 영토가 넓어졌으니 황금기…같은 식으로 서술하면 더더욱 삐딱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보니, 황금기 엔딩 이후를 다루는 『하그라아 왕국』, 저에게는 “그래서 뭐? 황금기인데 뭐?”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처럼 느껴졌더랬습니다. 설령 작가님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멋대로) 감상 포인트를 “엔딩 후의 이야기”로 잡아버린 바람에 저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폭정왕 시대에서 강건왕의 시대로 넘어오며 일반 민중의 삶은 얼마나 어떻게 개선되었을까? “황금기 엔딩”을 민중은 어떻게 누리고 있을까? 국왕이 행차할 때 축제 분위기에 들떠 꽃비를 뿌려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것입니다.

작중에서 설명되기로는 “샤흐라자드 대왕이 너무 훌륭한 국가를 이룩하여, 다음 왕이 바보가 아닌 바에야 어지간하면 무난히 통치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기반이 튼실하다고 믿어서인지 세 왕자 세력은 마음 놓고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데(사실 이럴 때 가장 적극적인 건 왕위 계승권자들보다도 거기 줄 선 사람들이죠), 그래서 여러분 생활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하고 하그리아 농민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거죠.

 

이 왕좌의 싸움에서 민중은 전혀 링 위에 올라오지  못하며, 열심히 주판을 튕기는 대왕님의 계산식에서도 빠져 있는 변수 같아 정확히 그들이 어떤 처지에서 살고 있는지 명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행히 소흐랍이 제 3왕자(즉 자신의 아들)을 타이르는 귀중한 대목은 민중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언급해 줍니다.

 

저는 흰색 관모를 쓰고 붉은 색 관복을 입어요. 저는 설탕에 절인 석류와 메추라기 요리를 먹어요.

보통 사람들은 저처럼 살 수 없어요. 백성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긴 했지만, 하층민의 인생은 어딜 가던 고달픕니다. 신께 죄를 지어서 하층민으로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저 태어나고 보니 삶이 시궁창인 것이죠.

 

하그리아의 황금시대라지만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라는 옛날식의 체념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와중에 높으신 분들은 축복받은 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이미 3명의 여왕이 즉위하였고, 현 시점에서 여왕이 훌륭한 통치를 하고 있는데도, 여성의 사회진출은 여전히 어렵다는 말이 작중에서 나옵니다.

하층민도, 여자들도,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있으나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중세 왕정국가니까요. 그냥 왕이 자비를 베풀어 주거나, 다음번 왕은 조금이라도 자기들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수뿐입니다.

 

 

그래서, 이건 엔딩 후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폭정왕의 엉망진창 정치에서 탈출한 하그리아입니다만, 그리고 국력은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룹니다만, 이것이 황금시대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입니다. 애초에 “하그리아는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라는 엔딩문구에서 역사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 후로도 역사는 이어지고, 새 세대의 아이들이 태어나 그들의 역사를 계속 써 나가야 하죠. 하필이면 『하그리아 왕국』는 그 점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야기 세팅상으로는요.

황금시대의 축복조차 머지않아 낡아버리고 새로운 사회 모순을 향해 갈 것입니다. 여왕이 나라의 기틀을 너무 잘 닦아서 다음 왕은 바보가 아닌 한…. 이라는 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기이한 낙관주의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시대 엔딩 이후의 이야기”라는 아이디어가 저에게 굉장히 유혹적이었습니다.

 

하그리아 내부에서도 시대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작중에서도 짚어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소흐랍의 핀잔에서도 드러납니다만, 소흐랍은 “너도 그렇고 며느리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배불러 터진 것들이 뭐 우울하네 아쉽네 하고 자빠짐?” 하고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풍요와 안정을 누리는 신세대에게는 신세대의 고충이 있는 법이죠. 그리고 그 고충을 개선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로의 진보를 열 것입니다. 그 진보가 하그리아에서는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의 여지가 좀 있습니다.

관련하여 샤흐라자드와 이스카의 정치적 견해 차이도 눈여겨볼만 하죠. 이스카는 “야만 종족”에게 감정 이입하여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샤흐라자드는 정복 군주이고 이스카의 이런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죠. 샤흐라자드는 야만족들을 그저 “휴먼-애니멀”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반면에 이스카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샤흐라자드가 황금기를 열었던 덕분에 누릴 수 있던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이야 어떻건 현재의 하그리아에는 안정감이 형성되었고, 이스카는 그 안정감 속에서 정복 전쟁 시대의 야만을 반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와 한바탕 싸우고 나서 화가 좀 풀리고 나면, “그러고 보니 그건 내가 좀 잘못했나..?” 하는 반성을 할 여력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카가 자신의 사상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있게 전할 수 있다면, 여기서 또 한 번 문명의 진보가 일어나겠죠.

하지만 이스카가 왕위를 잇길 바라면서도, 샤흐라자드는 오히려 이스카의 정치적 견해를 존중하거나, 그 정치적 견해에 기대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샤흐라자드는 화가 풀려서 친구와의 다툼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짚어보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이스카를 편애하는 대왕의 속셈을 잘 파악하기 어렵지만, 일단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로는 ①이스카가 가장 능력이 뛰어나서 ②거기다 불새 꿈을 꾼 마술사(소환사)라서 ③거기다 가장 애착 가는 아들이라서 왕위를 잇길 바라는 것으로 보이지, 이스카가 펼칠 정치나 미래 비전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스카가 평화 외교 노선을 채택하려 들면, 귀신으로라도 돌아와 아들의 견해를 억제하려 들 것 같군요. 안 그래도 폭력까지 써가며 이스카를 통제해, 주체성있는 성인으로 자라나지도 못하게 한 샤흐라자드입니다.

 

 

샤흐라자드는 황금기를 이루었으니, 그다음 단계에 적절한 정치적 이상이 세워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기껏 열어제낀 황금시대에 맞은 정치겠지요. 애초에 하그리아 왕국은 야만보다는 문명을 동경했던 한 이상한 유목민에 의해 시작된 나라이기도 하죠.

그러나 샤흐라자드는 자기가 황금기를 이루었던 방식 그대로 앞으로의 역사도 펼쳐지길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샤흐라자드는 새 시대의 관념을 나약하게 여기며 수구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오직 강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 라는 신념을 밀고 나갑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샤흐라자드의 정치와 방침을 존중하고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샤흐라자드가 살았던 시대에 한하여 그러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가령 작중 역사서술에서는 냉혈왕의 숙청 정치를 긍정합니다만, “그런 왕이 한 번쯤 있어줘야 한다”라며 시대의 특수성을 통해 인정했지, “모든 왕이 그러해야 했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샤흐라자드라도 예외일까요.

 

샤흐라자드의 반동적 행위는 아주 인상적이죠. 결투 재판이 그렇습니다. 작중 인물의 입으로도 야만으로의 회귀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샤흐라자드는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코패스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기껏 폭정왕을 물리쳐 놓고서는, 폭정왕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마치 아직도 폭정왕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처럼 굴 필요가 있나? 라고 의아해하는 정치적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결투재판은 정말로 결투재판으로 뭘 해보려는 것도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보다는 이스카가 정령 빙의를 통제하고 계승 정당성을 더욱 굳힐 수 있게 하려는 공작처럼 보이는데, 철두철미한 계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도 어처구니없는 야만으로의 회귀충동입니다.

그러니까, 불새 환영을 보고 광증을 일으키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해준 왕재다…. 라고 샤흐라자드는 주장합니다만(사실 이게 대왕의 본심인지 어떤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여튼 타흐마탄에게는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건 그냥 종교적 맹신처럼 보이거든요. 나라를 이끌 사람을 이렇게 정해도 돼?

 

물론 이에 대하여, 제가 중세 배경 판타지 소설을 현대 한국인의 관점에서 논평한다고 반론하실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신병 걸린 사람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하면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겠으나, 판타지 세계는 다르죠. 여기라면 신적인 존재에게 현실적 힘이 있으므로, 상황을 판단할 때 꼭 짚어야 하는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하그라아 왕국』에서도 불새 꿈을 꾸는 정령 빙의자가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제 주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일단 정령 빙의자가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것이 마냥 좋기만 한 축복이면 상관없는데 대가가 혹독한 힘이거든요. 서술을 보면 축복보단 오히려 저주입니다.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역으로 위험에 처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힘이니까요.

이 하이 리스크의 힘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폭정왕에게 도전해야 하는 입장인 청년기의 샤흐라자드에게는, 정령이라는 치트 능력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치트 능력이라고 해도 제 생각엔 그때부터 이미 도박수인 측면이 있었던 선택입니다. 물론 정령을 완전히 떼어버릴 방법이 딱히 없기도 하니, 샤흐라자드 입장에서는 이판사판 공사판인 것이고, 어차피 떼어내지 못할 바에야 잘 써먹자고 판단하는 게 제법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불새 꿈을 꾸는 자에 관한 신화도 있다 보니 자신의 즉위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고 여기며 의욕을 불태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껏 이룩해낸 황금기에도 그래야 할까요? 누구도 무시 못 할 국력을 얻었고, 국가 시스템도 재정비한 하그리아에서도, 여전히, 그 위험한 정령의 힘이, 최우선되는 왕위 계승 조건이어야 하나?

 

잘 판단해보면, 정령 빙의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살레굽의 황제도 잠깐의 통제 실패로 귀중한 왕손을 손실했고 그로 인한 정치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샤흐라자드도 자신이 정령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 알려지면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샤흐라자드 본인이 정령들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왔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둘째 왕자에게 악으로 깡으로 버텨 정령을 다스릴 것을 강요합니다. 왜냐하면 정령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일단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임에 틀림 없고, 샤흐라자드의 신념에 따르면 가장 강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죠?

 

 

정령에게 실질적인 위력이 있는 판타지 세계라는 요소를 감안한다 해도 저의 기존 비판은 유효합니다. 샤흐라자드는 기껏 황금시대를 열어놓고는 폭정왕의 시대에 유효했던 마인드셋을 계속 끌고 가려고 한다는 비판이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후손들이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숭고한 마음으로 자기 삶을 희생하여 기껏 한국의 풍요를 일으켜 놓고는, 그다음 단계의 진보를 밟아 나가려는 젊은이들이 못마땅해, 차라리 전쟁이 다시 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우리나라 노년층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인 저의 관점에서만 나오는 비판도 아닙니다. 이스카의 아버지인 타흐마탄 또한 “천재라고 해서 꼭 뛰어난 위인이 되어야 하나? 평범한 행복을 누리면 안 되나?” 하고 훨씬 진보적인 비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후루룩 읽다 보니 저는 그만 이스카가 세상의 멸망과 직면하는 부분이 이 『하그리아 왕국』의 클라이맥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랬다가는 큰 맥락 위에 기껏 배치해둔 이야기들, 파리샤티스와 아르샨, 스피타만의 이야기 등등은 괜히 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깨달음이 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이스카의 문제가 미처 다 마무리되기도 전 카메라는 스피타만의 문제로, 살레굽 문제로 넘어가더라구요.

 

넓게 맥락을 깔아가며 이야기를 높이 쌓아가는 기존의 기조가 유지되는 가운데, 샤흐라자드의 골 때리는 변덕이 또 한 번 일어나면서 “엔딩 후의 이야기”는 또 다시 예측 불가한 지점으로 가버립니다.

 

샤흐라자드의 입만 바라보는 엔딩 후의 세계

그 변덕의 의미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까지 읽고 보니, 이 작품이 다루는 “엔딩 후의 이야기”는 정령들의 괴롭힘으로 생명을 다해가는 샤흐라자드의 입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까지 쭉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중에는 “아, 이 모든 것은 대왕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포석에 포석을 깔아두고 계셨던 것!” 이라는 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제가 위에서 줄창 써 놓은 샤흐라자드 비판은 꽤나 헛소리처럼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샤흐라자드에 대한 비판이 너무 길어진 바람에 논지가 불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정리해 볼까요.

 

샤흐라자드를 이렇게 길게 비판한 것은 제 신념과 샤흐라자드의 입장이 너무 상극이라, 그만 감정적인 반발이 일어서 그랬던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샤흐라자드의 태도를 이렇게까지 짚어보고 비판해 보았던 건, ①제가 이 작품에서 “엔딩 후의 이야기”를 기대했고, ②이 직품을 “엔딩 후의 이야기”로 파악하자면, 꼼꼼한 배경 설정 배치를 통해 형성된 거대 맥락 속에서 ③황금시대 엔딩을 재고해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④그 황금시대 엔딩을 달성한 인물이 샤흐라자드 대왕이므로 ⑤샤흐라자드의 한계를 짚어보는 것은 곧 하그리아 황금시대의 한계점을 짚어보는 것이며 ⑥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의 통치(=황금시대 엔딩 이후의 역사)는 어떠해야 할지 논할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야기는 기획된 4권 중 3권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혹여라도 저와 비슷한 기대를 품고 당 작품을 감상하신 분이라면 으음, 잘못 짚었나? 하는 기분이 들 것도 같습니다. 원인은, 사실 현시점 왕국이 어떤 갈림길 앞에 서 있는가, 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빽빽한 맥락이 만들어지고 있음에도 이 부분은 비어있습니다. 샤흐라자드가 너무 나라를 잘 갖춰놔서 다음 왕은 어지간해도… 라고 간단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샤흐라자드를 존경한다는데 왜지? 그렇다면 그 존경이 철회될 위험성도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살레굽에서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날 것도 같지만, 그 때문에 하그리아의 운명이 크게 좌우될 거라는 분위기 조성이 아직 가시적이지는 않다는 인상입니다.

 

요컨데, 아르샨, 이스카, 스피타만 중 누가 왕이 되건, 심지어 파리사티스가 왕이 되더라도,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달라질지 별로 감이 오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엔딩 이후의 이야기”로 파악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스카만이 어머니의 정복 전쟁과 패권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정보가 공개되어 있고, 그가 왕이 된다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특히 그는 훨씬 선진적인 재판을 경험해 보기도 했고, 하층민의 삶을 겪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고 감상하다가는 별로 건질 것이 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드는군요.

 

사실 군중극이고 각자 동기가 분명한 인물들이 나옴에도, 왕국의 향방에 관해서라면 오직 샤흐라자드의 입에만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황금시대를 연 인물들과 황금시대 이후의 인물들의 대결구도가 치열하지 않습니다.

 

샤흐라자드에게 덤벼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황금시대를 연 정치철학과 그 이후의 정치철학이 충돌하는 현상이 적극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따라서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라는 신념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이유는 샤흐라자드가 너무 강해서 아무도 덤벼들 생각조차 못해서일 것입니다. 샤흐라자드는 너무 강하고, 비판의 대상조차도 되지 않습니다. 비판이야 받긴 하지만 아들에게 매정하단 정도로 이것이 정치적인 흠결로 파악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스피타만은 샤흐라자드를 적극적으로 카피해 대왕이 이룬 것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낼 정도입니다. 아르샨은 왕위보다는 어머니에게 서운한 마음과 동생에 대한 약간의 질투가 동기이고, 파리시타스는 적극적인 권력욕을 보이지만 사실 왕권을 얻은 다음엔 어쩔 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카는 그냥 왕 하기가 싫습니다. 이 때문에 황금시대 이후( = 샤흐라자드 다음 시대 )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때에, 왕위계승권자들의 입장이 그다지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작품의 흠이 되는지 아닌지는 그냥 독자 개인의 취향 문제일 듯 합니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샤흐라자드의 기괴하기 짝이없는 사고방식을 “우효”하고 감상하는 것으로, 우리는 샤흐라자드가 “너 왕 해라” 하면 그렇게 되고, “넌 하지 마”하면 그렇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며, 샤흐라자드가 너무 뛰어난 나머지 다른 인물들은 속절 없이 대왕의 장기말이 되어 각종 고생에 휩쓸리는 꼴을 지켜보게 됩니다(자기가 장기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요).

 

어쩌면 엔딩 이후 왕국의 향방은 이 작품에서 별로 안 중요했던 요소였지도 모릅니다. 제가 완전히 헛된 기대를 품고 엉뚱한 감상을 했던 것이죠. “샤흐라자드가 나라를 너무 잘 갖춰 놓아, 다음 왕은 바보가 아닌 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라고 세팅한 건, 애초에 “누가 되는 왕국은 잘 굴러간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라”라는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황금시대 엔딩은 문학적 기만에 불과하며, 엔딩 이후에도 역사는 흘러간다. 『하그리아 왕국』는 그것을 정면으로 지적하려는지도 모른다”라는 기대를 품고 리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황금시대 엔딩 이후로도 역사는 흐른다…라는 명제는, 사실 픽션의 논리를 간과하고 소위 현실적인 잣대만 들이민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픽션의 세계에는 “작가”라는 명백한, 초법적인 창조주가 있죠. 황금시대는 아무튼간 계속 이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권능이고, 자신이 기획한 이야기에 필요한 요소와 불필요한 요소를 따져 그 권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즉, 작가님이 그 권능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저는 장문의 뻘소리를 적어버린 게 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헛된 데에 신경 쓴 나의 패배인가…

 

이 작품은, 필부의 입장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지고의 존재를 바라보며 “이 여자 대체 뭔 생각인 거야?” 하고 당황하는 것이 감상 포인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만약에, 나중에 샤흐라자드가 계획적으로든 즉흥적으로든 행했던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요령(즉 특별히 대단한 존재에게 마냥 감탄하는)으로 감상해야 하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필부의 입장에서 샤흐라자드의 행동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이해해보는 것(제가 샤흐라자드 비판을 길게 쓰게 된 것 처럼)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담백하게 결론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소설에 실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영감을 주는 작품, 그리하여 제 2, 제 3의 아이디어를 파생시키는 작품을 훌륭한 작품으로 칩니다(물론 저 따위가 다른 분 작품을 훌륭하네 어쩌네 평가하는 게 딱히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하그리아 왕국』는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출중한 작품이죠. 특히 빙의하여 괴물로 변하는 이 작품 특유의 마법 체계는 저로 하여금 여러가지 변형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떠올려 보게 했습니다. 또 다른 리뷰에서 지적된 출중한 점들도 있고요.

 

저는 단지, “엔딩 이후의 세계”를 기대하고 『하그리아 왕국』를 읽는 것은 착오였던 것인가? 하고 새삼 다시 짚어보는 것뿐입니다.

 

다시 짚어보니… 저는 아직도 기대감을 접지 못하고 있군요. 어쨌든 샤흐라자드의 시대는 종결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이후 일어나는 일들로 그녀의 결정들이, 거대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철혈의 군주스럽게” 행동했던 온갖 것들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살펴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원인은 결과가 되고 그 결과는 다음 결과의 원인이 되어가며 개연성 있게 일이 굴러갈 테니까요.

특히 지독히도 아들들을 괴롭혔던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저를 궁금하게 합니다. 샤흐라자드는 루키예가 자기 딸이었다면 여왕위를 내려주기 위해 더더욱 혹독하게 대했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만, 그렇게 해서 루키예가 정말 훌륭한 여왕이 되었을지, 아니면 그냥 아동학대로 의기소침해진 사람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실제로 이스카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분명 철을 두드리면 단단해지긴 합니다만, 지금 두드리려는 게 쇳덩이인지 강아지인지는 분간하고 망치를 내리쳐야 합니다. 샤흐라자드는 그런 분간 없이 “쇠는 두드려야 강해지지! 쇠가 아니면 별수 없지!” 하는 식인데, 그러니까 실은, 이상한 랜덤박스 열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루 위에 올라온 것을 냅다 사랑의 망치로 두들겨 댄 결과, 의기소침해진 녀석은 의기소침해진 대로 단단해진 녀석은 단단해진 대로 샤흐라자드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어 결국 대왕님 계획대로 되었더라…라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일종의 엔딩 이후의 이야기인 것이죠. 샤흐라자드의 장기말이 되어 움직인 인물들도 이후 자신의 입장과 왕국의 앞날에 대해 생각을 정립해야 하니까 말이죠. 그 때에는 이미 샤흐라자드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즉, 샤흐라자드가 어려서부터 견지해온 태도는, 그녀가 죽은 후 아들들이 보일 행보에서, 그리고 그들이 황금시대 다음 단계의 역사를 어떻게 작성해 나가는지에 따라 평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샤흐라자드가 자신의 청춘시기를 거치며 정립해온 태도가, 더 커다란 맥락 속에서 대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샤흐라자드가 온 힘을 다해 살았던 젊은 시기의 추억이 샤흐라자드 자신에게서도,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의 기억에서도, 또 민중들의 의식에서도 퇴색되고 흐릿해지며, 거대한 맥락에 합류하는 과정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을 앞에 아직 (한 권의 책 분량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제 감상 포인트가 글러먹었다고 단정하기엔 이르다고 해야겠죠.

 

리뷰는 작품 3권 말엽까지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겠다고 설쳐댄 이래 처음으로 원고청탁을 받아봅니다. 논쟁적인 인물의 논쟁적 행보를 보이는 픽션은 역시 즐거운 리뷰쓰기의 원동력이 되네요. 여러모로 감사한 기회였습니다.

 

하여튼 샤흐라자드처럼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실은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리뷰에 쓸 내용들이 떠올라 한바탕 적어 놓으면, 또 나중 내용 때문에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가 일쑤였습니다. 연재분을 다 읽었을 즈음에는 리뷰의 기본바탕이었던 “엔딩 이후 이야기” 자체도 좀 흔들리는 기분이었고요.

 

어쩌면 완결이 난 이후 다른 시각에서 리뷰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튼,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작품은 그 강렬함이 이미 입증된 것이라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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