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라는 장르가 윤리적인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 맞지만, 그것이 항상 은유적으로만 서술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직유적인 소설이 항상 프로파간다적 소설과 같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은유적인 소설이 프로파간다적 소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거든요. 다만 우리가 호러 소설에서 직유법을 지양하는 이유는 자칫했다가 세심하게 다뤄져야만 하는 요소를 어떠한 범주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할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겠죠.
다만 저는 이번 리뷰에서 은유적으로 작품을 바꾸는 방법 말고 오히려 직설적인 면을 그대로 살린 채 더 깊게 파고드는 방식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이 작품은 주인공을 악인으로 사용해 심리적인 묘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만큼, 직설적인 화법과 묘사를 줄이게 되면 오히려 이도저도 안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면 오히려 날카롭게 파고드는 게 때로는 답이 될 수 있어요.
작품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드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때로는 그들이 상반되는 경우도 있으니 이전 리뷰와 반대되는 의견의 리뷰가 달렸다고 혼란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하네요. 방식의 차이니까요. 무얼 선택하는지는 쓰는 사람 마음입니다. 그럼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입장이니 참고한다는 생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정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자기혐오
2.타인혐오
주인공 Y는 자기보다 잘난 A를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M을 트로피나 보상 정도로 여기면서 사람이 아닌 사물로 욕망화하죠. 첫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서 혐오는 ‘역겨움’보단 ‘괘씸함’에 가깝다는 겁니다. 그러면 열등감에 빠져 있는 Y가 어떻게 괘씸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M은 Y보다 더 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물론 Y가 M을 그저 예쁜 여자, 사람이 아닌 사물로 봐서 그런 것 맞지만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지를 다루고 싶어요.
일단 시작은 자기혐오가 맞습니다. 주변에서의 부정적 피드백을 듣고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며 점차 반추적이고 부정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게 돼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혐오는 형태를 변형해요. 자기혐오가 타인혐오로 넘어가는 데는 한 단계가 더 있어요. 바로 자기연민이에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몸을 부풀려요.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일련의 합리화와 남 깎아내리기를 통해 볼품없는 자아를 비대하게 부풀립니다. 그러나 크기만 커다랄 뿐 안은 텅 비어있어요. 그래서 타인이 아주 살짝만 닿아도 자신을 펑 터트릴 것만 같이 화를 내죠. 요즘 말로 말하자면 ‘긁혔다’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더 환장인 점은 그 말도 안 되는 자아비대가 자신이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명분을 부여한다는 거예요. 일명 ‘참교육’이라고 하죠. 그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남을 깎아내리고 싶은 욕구를 참교육이라는 말 아래에 뭉뚱그려 정당화하고 자신에게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요. 그리고 맞은 사람이 반발하면 ‘감히 네가?’라며 상대를 사람으로 안 보고 자신이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물건으로 보기 위해 온갖 추문들과 더러운 라벨링을 붙입니다. 그렇게 타인혐오 사이클이 돌게 되는 거죠.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람은 자기방어기제라는 게 있어요. 물론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건 그것이 과해질 때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은 투사와 합리화 등의 방어기제를 통해 굴절되고 그 대상은 ‘그래도 되는 만만한’ 약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혐오는 타인혐오로 이어지며 합리화 과정에서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 피해자로 만들면서 연민에 파묻히게 돼요.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자기연민과 타인혐오입니다. 자기혐오는 밑바닥에 잔존해 있어요.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저 둘이죠. 그게 Y가 M을 욕망하고 A에게 과분한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예요.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비겁하기까지 합니다. 속된 말로 내로남불을 하거든요. 인셀들이 내세우는 논리의 패턴을 보면 이 부분에서 자기혐오보다는 자기연민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셀들에게 ‘자신이 보기에 ‘페미’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욕설을 먹어야 정당하고, 신상을 털리는 건 그들의 업보라고 생각하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 같이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렇게 묻죠. 여성을 피싸개라고 지칭하고 성희롱하는 인셀들의 신상을 터는 건 정당하냐고요. 그러면 그들은 되려 미쳤냐고 하며 사람이 아무리 잘못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상을 터는 건 안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신상을 턴다고 말하거나 협박하지도 않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역정을 내죠. 자기 그림자에 자기가 놀란 꼴입니다.
이를 통해 인셀들은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려고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팔이 안으로만 굽듯이요. 그리고 그 자기합리화에 기여하는 건 자기연민이고요. 나는 너희를 심판할 만한 사람이다,라는 자아비대와 남이 나를 똑같이 공격했을 때 ‘내가 남을 공격했을 때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 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자기연민.
제가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굳이 분리하여 말한 이유가 뭔지 유추되시나요? 자기혐오는 시혜적인 시선으로 어느정도 나아질 수 있지만 자기연민은 시혜적인 시선이 오히려 그걸 강화시킵니다. 해결방식이 달라요.
자기연민에 사로잡힌 사람들, 심지어 그로 인해 자아비대까지 갖게 된 사람들은 자기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에 매몰돼요.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몰라요. 오히려 타인이 자신을 안타깝게 보면 자기연민은 강화됩니다. 그럼 자기연민은 어떻게 벗어나야 하냐면, 직빵인 건 부끄러움입니다. 자기연민이 아무런 영양가가 없고 부끄러운 행위라는 걸 알아야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어요. 물론 이들을 다시 정상적으로 사회화 시키는데 어느 정도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가장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할 곳이 동정어린 시선인지, 아니면 처벌인지는 명확하게 다르죠.
분석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끈벌레에는 A와 나 자신을 비교하며 느끼는 부러움과 자기 혐오 그리고 M에 대한 왜곡된 욕망, 즉 여성 혐오가 들어있어요. 하지만 그 두 가지 뿐이에요. 주인공인 Y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피상적인 부분에만 한해서지 깊숙한 부분에 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더라고요.
엔딩이 Y가 번들번들한 끈벌레가 되어 잡아먹히는 강렬한 장면인만큼, 결말로 치닫기 위한 인물의 심리를 조금 더 강렬하게 묘사하면 좋을 것 같아요. 플롯 자체를 보자면 굉장히 깔끔한 호러소설이었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또한 없었지만 소재와 메시지가 혐오에 관한 것이고 서술의 방식이 주인공의 심리묘사 위주이므로 오히려 과감한 묘사를 해 전달성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