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분신사바 등 학교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흔히 ‘학교 괴담’이라 한다. 특정 몇몇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주제로 시작했을 이 소재는 이제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고 독자에게 익숙한 내러티브가 되었다.
‘학교’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공간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학교의 교실, 복도, 화장실을 떠올려보라. 아마 크게 독특한 이미지가 생각나지는 않을 것이다. 정형화된 사각형과 열을 지어 정돈된 책상, 같은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2, 30명의 학생. 왠지 코끝을 스치는 듯한 냄새마저 익숙하다. 이처럼 학교는 개성도 특이성도 없는 장소다. 심지어 매일 학습이 이루어지는 정숙하고 조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곳이 어쩌다 무시무시한 괴담의 소굴이 되었을까.
학교는 몰개성한 곳이지만, 동시에 대부분 사람에게 친숙하다. ‘이야기’가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익숙해야 한다. ‘익숙’하다는 것은 ‘평범’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편한 옷’을 ‘평범한 옷’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야기에도 ‘편한’ 소재가 있다. 물론 먼 미래나 닿을 수 없는 우주 등 완전한 새로움을 시도하는 콘텐츠도 있다. 이런 시도는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이루어져야 한다. (장르로서의 SF에서 대체로 그러하다) 그들은 ‘개성’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그러나 늘 새로울 때 주목받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익숙할 때 환대받는 장르도 있다. 공포는 익숙해야 한다. 우주 괴담, 미래 괴담보다 학교 괴담, 엘리베이터 괴담, 화장실 괴담이 빠르게 유행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주 먼 우주나 가늠할 수조차 없는 미래 등 낯선 시공간을 배경으로 공포소설을 썼다고 가정해 보자. 독자는 그 이야기를 읽는 동안은 온몸이 곤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적어도 일상으로 돌아온 그에게 소설의 내용을 다시 떠올릴 만한 일은 많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 학교 화장실을 배경으로 하는 공포소설을 한 권 읽었다고 해보자. 책을 읽는 동안 소름이 끊이지 않을 만큼 무서운 이야기다. 그리고 책을 덮은 독자.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학교에 간다. 수업 중 잠시 배에 신호가 와 화장실에 간다. 당연히 강의 중간에 나왔기 때문에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다 문득, 화장실 거울을 본다. 전날 소설에서 나온 입이 쭉 찢어진 귀신이 거울 뒤쪽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며칠, 심한 경우 몇 주, 몇 달간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처럼 일상적인 공간은 특히 공포 장르에서 독특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야기의 일상성은 허구의 스토리텔링으로 그칠 수 있는 내용을 현실로 전위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되뇌며 무한한 으스스함을 느낀다. 분신사바도, 여고괴담도, 엘리베이터 귀신도, 화장실 귀신도, 여타 고전이 된 다수의 괴담도 이런 과정을 거쳐 대중성을 얻었으리라.
학교에서는 특히 밤에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스스로 걸어 다니는 운동장의 동상이나 피 흘리는 소녀상, 성적이나 교우관계를 비관해 자살한 학생의 혼령 등 가히 공동묘지만큼 할 말이 많은 곳이 학교다. 이런 곳에서 술래를 피해 숨으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밤에 중요한 교과서나 숙제를 두고 와서 학교에 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등이 주뼛 서도록 긴장하기 마련이다.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괴담, 그중 하나가 사실이라면 살면서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광경을 목격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야밤의 학교에서 ‘나 홀로 숨바꼭질’이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용기인가.
이 숨바꼭질은 정확히 말하면 ‘둘이서’ 하는 게임이다. 단지 한 명이 사람, 다른 쪽은 귀신일 뿐이다. “일종의 강령술”이라고 하는 귀신과의 숨바꼭질을 위해서는 “인형에 귀신을 불러들이고는, 칼로 몇 번 찔러 도발하고, 날 찾아보라며 어두운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 한다. 읽는 사람이야 흥미로울 수 있지만, 어디 실행에 옮기기가 쉽겠는가.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귀신보다는 사람이 먼저 도발되어야 한다. “치기 어린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들” 정도가 딱 좋겠다. 이런 일을 분위기에 휩쓸려 할 수 있는 나이라면.
어두운 밤, 한 고등학교 교실에 덩그러니 남학생이 홀로 서 있다.
손에는 칼과 인형을 들고.
첫 번째 술래는 영민이. 첫 번째 술래는 영민이. 첫 번째 술래는
지현상 작가의 소설 〈나 홀로 숨바꼭질〉은 두 가지 공포 요소의 적절한 배합으로 탄생한 단편이다. 첫째는 ‘학교’라는 공간의 일상성이다. 이는 서두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니 두 번째로 ‘숨바꼭질’의 이중성이라는 소재에 집중해 보자.
낮의 학교는 현실적이다. 그리고 밤의 학교는 초현실적이다. 현실과 초현실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숨바꼭질’이다. 현실의 학교는 독자에게 익숙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초현실의 학교는 매우 낯설고 두렵다. 숨바꼭질은 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선 ‘숨바꼭질’은 대중적인 놀이이기 때문에 낮의 학교에서는 일상성을 형성한다. 여러 사람이 숨고 한 명의 술래가 일정 시간 동안 그들을 찾아내는 놀이가 숨바꼭질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영민의 친구들은 신이 나서 ‘숨바꼭질’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숨바꼭질’은 은밀하고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그 숨바꼭질이 귀신과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본래 고전 게임으로서의 숨바꼭질은 숨을 만한 곳이 많은 개방적인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진행한다. 술래가 숨은 사람을 찾고, 들킨 사람이 그다음 술래가 되는 형식의 이 놀이를 보며 우리는 흔히 ‘술래’에게 정보값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술래는 누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른다. 숨은 사람을 찾아내는 게 술래의 임무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자신의 몸을 꼭꼭 숨긴다. 하지만 조금만 입장을 바꿔 보자. 참가자들은 술래가 어디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술래보다 훨씬 많은 정보값이 주어질까. 잠깐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가자 역시 술래가 어디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없다.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숨바꼭질은 술래와 참가자 모두 서로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게임이다. 불시에 누군가 들이닥쳐 자신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참가자에게 두려운 놀이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호 간 위치 정보가 단절된 채 진행되는 게임은 ‘불확실성’의 공포를 만드는 데에 유용하다. 사실 ‘숨바꼭질’의 공포는 이제 섬세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소재가 되었다. 영화와 노래 등 다종다양한 콘텐츠에서 숨고 찾음의 구조는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데에 넘치도록 차용되고 있다.
숨바꼭질의 클리셰를 넘어서기 위해 지현상 작가는 ‘귀신’을 소설 내부로 끌어들인다. 사람끼리 하는 숨바꼭질에서 술래와 참가자가 알 수 없는 것은 서로의 ‘위치’뿐이지만, 귀신과 하는 숨바꼭질은 술래의 ‘정체성’마저 모호해진다. 한 가지 더, 이 소설 속 숨바꼭질은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를 저울질한다. 인형을 칼로 찌른다는 강령술, 사람의 신체 부위를 매개로 물건이나 동물에 빙의하는 귀신, 악귀를 쫓는 소금은 이미 익숙한 상투적 공포지만, 작가는 이 익숙함에 그만의 새로움을 조금씩 첨가한다. 인형을 칼로 찌르기 전에 그 안에 쌀을 채우고 주인공의 머리카락을 네 개나 뽑아 넣는 친구들의 짓궂음이나 “치킨을 시키면 따라오는 바로 그 소금 한 봉지”를 귀신을 쫓는 데 사용한다는 설정은 창작자만의 유머가 이 소설에 유감없이 스며 있다는 증명이다.
영민의 숨바꼭질을 걱정하기는커녕 환영하며 완벽에 완벽을 기해 준비하는 친구들의 모습, 귀신보다 신나 보이는 친구들의 환호성에 겁먹으며 “이런 미친 새끼들아”라고 대꾸하는 주인공의 숨김 없는 반응. 바늘을 들이대면서까지 피를 뽑으려던 친구를 회상하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라고 회고하는 서늘함까지. 곳곳에 녹아 있는 디테일은 이 짧은 이야기에 작가만의 색을 꼼꼼히 칠한다.
그렇게 숨바꼭질은 모두가 잠든 새벽 두 시에 시작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현상들과 함께.
두 번째 술래는 누구야?
영민이 방문한 밤의 학교는 낯설다. 그곳에서 숨바꼭질은 시작된다. 사실 이 게임의 과정에서 영민이 크게 놀랄 일이 발생할 것임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작가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 ‘놀라움’을 새롭게 만들 방법이다. 독자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독특함이 결정적인 장면에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영민이의 숨바꼭질 장면은 조금 보완될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의 공포’는 무조건적인 모호함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민이의 숨바꼭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세 가지는 고장난 듯 큰 소리를 내는 텔레비전과 정체불명의 발소리, 교실 문을 열어젖히려는 미지의 존재다. 영민이 숨바꼭질을 준비하는 과정이 매우 유쾌했고 작가만의 유머가 도드라졌기 때문에 결말에서 보이는 이 세 가지 장면 안에도 약간의 신선함이 첨가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큰 소리로 지지직거리던 교실의 텔레비전 화면에 마치 누군가 촬영한 것 같은 영상이 갑자기 재생되는 것은 어떨까. 그 영상은 숨바꼭질을 준비하던 영민과 친구들을 뒤에서 찍은 듯한 구도다. 하지만 영민의 회상에는 그날 교실에 영상을 녹화하던 학생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텔레비전 속 영상은 누가 찍은 것인가하는 물음이 생긴다.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 마침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이 발소리의 주인공에게 의미심장하지만 상투적이지는 않은 대사를 하나 할애해 줘도 좋다. 영민이가 되찾지 못한 휴대폰도 결말에서 활용될 수 있다. 영민이의 휴대폰은 왜 마지막까지 주인에게 돌아오지 못했을까. 〈나 홀로 숨바꼭질〉은 구체성이 보완될 때 잠재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섬세한 유머 코드와 웃음 속에서도 서늘한 기운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 소재와 소재를 결합하는 센스와 배경의 적합성에 한 방울의 구체화된 설정을 더하면 충분하다.
재미있는 것은 숨바꼭질을 시도한 날 영민이에게 특별히 물리적인 충격이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민이는 귀신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다. 물론 초현실적인 몇몇 이상 징후를 보긴 했지만, 귀신을 대면하지도, 그에게 해를 입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오산이다. 영민은 그 뒤로 십여 년 동안 두려운 나날을 보낸다. 그는 부적으로, 소금으로 참가자로서의 수명을 연장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언젠가 끝이 오기 마련이다. 영민은 이 회상을 중단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술래가 영민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민의 회상이 마쳐지는 순간, 소설의 배경은 갑자기 현재로 바뀐다. 영민이 경험했던 숨바꼭질은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그러나 〈나 홀로 숨바꼭질〉에서 그의 회상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그 귀신은 여전히 살아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영민은 미쳐간다. 오랜 시간 귀신에게 쫓긴 주인공의 두려움이 이야기 밖의 독자에게까지 전해진다. “그게 벌써 10여 년 전이었다”로 시작되는 후반부의 문단을 현재형으로 썼다면 어땠을까. 그만큼 이 단편의 결말은 생생하다.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현재형으로 바꾸고 조금 다듬어 보자. 그럼 이 소설뿐 아니라 감상의 결론을 정리하기에도 맞춤인 한 줄이 완성된다.
“그 인형이, 손에 칼을 꼭 쥔 채 서서 아까부터 고개를 꺾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부적을 잃어버린 두 번째 술래, 영민이의 고개가 꺾인 다음 쫓을 세 번째 술래. 그리고 무한정 계속될 죽음의 숨바꼭질. 이 놀이의 마지막 특징은 ‘벌칙’이 있다는 점이다. 숨바꼭질은 술래가 참가자를 찾는 한 계속되는 게임이다. 게임의 유일한 벌칙은 술래가 되는 것. 게임에서 죽거나 제외되는 일은 없다.
그러니 영원히 뻗어갈 이 게임은 한낱 고등학생의 치기로 시작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날카로운 공포가 독자를 겨냥한다.
기괴하게 꺾은 고개의 인형이 숨바꼭질의 마지막 주자를 노려보고 있다.
그 눈에는 초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