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아침의 나라 : 정의는 결코 선하지 않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요란한 아침의 나라 (작가: 신원섭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난네코, 23년 8월, 조회 46

※ 본 리뷰는 <요란한 아침의 나라>를 1화부터 42화까지 전부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진보도 이익집단이다

3. 정의는 결코 선하지 않다

4. 결어

 

 

 

1. 들어가는 말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8월 28일 기준으로 브릿g 종합베스트 8위이자 황금가지 출판소설인 <요란한 아침의 나라>를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얽히고 섥힌 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풀어낸 수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가양시라는 가상의 지방 중소도시를 배경으로 이권 문제를 놓고 진흙탕 싸움을 펼치는, 결코 선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장편 소설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로 나오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결말까지 쭉 정주행을 했습니다.

대체로 1화부터 4화까지만 별점이 찍혀있고 뒤로 갈수록 보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슬펐습니다. 물론 정신없이 읽느라 댓글과 별점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정치쪽으론 문외한임에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요란한 아침의 나라>를 읽은지는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흥미로운 장편소설이라서 리뷰를 아니달 수가 없었습니다. 단순히 브릿G 출판도서라는 타이틀을 제쳐놓고, 신원섭 작가님의 글을 놓고 보면 캐릭터들 간의 감정과 욕망이 드러나서 즐거웠습니다.

 

 

2. 진보도 이익집단이다

정치이념(political ideology)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진보’의 이미지는 어떤가요? 진보(進步)란 사회내외에서의 변화 또는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진보 성향의 정당들은 보수세력과 대립되는 포지션을 가지는 편이지요. 진보는 약자, 소수자, 소외계층의 편에 서는 정치세력이며, 진보가 내거는 캐치프레이즈는 사회경제적 개혁과 재분배입니다. 깨어있는 식자층이나 젊은 학생들은 진보의 매력에 빠집니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시각이기 때문이지요. 

대한민국의 보수-진보는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이념의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세대, 지역, 계층, 성별 등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것은 진보와 보수로 편이 갈려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보와 보수는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현안과 쟁점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런 이념적 양극화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이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공론장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보수던 진보던 어떤 목표와 이념을 가지고 활동하는 정치세력들은 모두 이익집단이라는 것이지요. 보수적인 정치세력도, 진보적인 정치세력도 그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고결한 정신과 완벽한 정의로움 따위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금전적, 정치적으로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뿐이에요. 따라서 아무리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 정치적 이익에 따라 언젠가는 부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보 세력은 왜 집권 후 기존의 “사회경제적 개혁과 재분배” 기조를 완화하고 성장 우위의 경제정책을 수용하여 실용적 노선으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이는가?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소한 세 번의 진보 정부를 경험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집권 전이나 집권 초기에는 경제 민주화와 재분배, 이를 위한 재벌 개혁에 초점을 두지만 집권 중후반으로 갈수록 성장 우선의 정책으로 돌아서며 재벌 개혁에서도 다소 후퇴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 발전주의 체제의 개입주의적 국가와 부채 의존적 재벌을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규정하며 “자유시장과 균형 발전”을 강조했다. 그러나 1998년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정통 경제관료들을 다시 경제정책 핵심 라인에 기용하며 정책의 전환을 꾀했다. 산업 경쟁력 개선에 초점을 둔 경제관료들의 대안은 발전주의적인 국가 개입의 지속을 의미했으며 재벌 해체 기조의 완화를 수반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 발전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경제적 민주화’를 천명하며 노동자와 고용주 간의 권력 균형, 노동자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 참여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임기 중반 이후 노무현 정부는 수출 주도 성장을 강조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무역 자유화 정책을 확대하고 차세대성장동력 육성과 같은 산업정책을 강화했다.

집권 초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을 추진하며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밀어붙였던 문재인 정부 역시 2018년 이후 혁신성장 정책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 우선 순위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한국 진보 정부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정책 전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왜 한국 진보 정부는 집권 후 경제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재분배에 초점을 둔 전통적인 이념 지향에서 후퇴해서 경제관료 주도의 성장 우위 발전주의 정책을 수용하였는가?

한국 진보 정부의 정책 전환을 설명하는 기존 연구들에서 지배적인 입장은 무엇보다 구조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구조화된 지배 담론에 초점을 두는 연구들은 박정희 시기 산업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성장지상주의 담론이 한국 사회의 공고화된 재벌체제와 관료집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보수 언론에 의해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최장집 1996; 2002; 홍덕률 1996; 이일영 2008; 윤상우 2016; 조희연 2003; 이광일 2003).

한국 경제의 재벌 지배력과 보수 언론 구조, 성장우선주의를 지향하는 관료집단과 산업화의 성공적인 경험에서 축적된 한국인들의 성장우선주의에 대한 선호는 무시하기 힘든 구조적 조건이다. 그러나 구조적 관점은 동일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적어도 세 번의 진보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 진보 정부의 집권 승리에 기여한 대항 담론은 집권 후 급격히 힘을 잃게 되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과거 사회 제세력간 권력 불균형의 측면을 강조하던 구조적 접근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항 세력의 담론의 취약성에 대한 반성적 연구들 로 발전하였다(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2008).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 역시 대안 담론 자체의 문제보다는 실행 능력과 전략의 부재에 초점을 둠으로써 거듭된 실패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경미. (2022). 한국 진보 정부의 정치적 동학: 경제정책 전환의 정치. 韓國 政治 硏究, 31(3), 127-156.

 

 

3. 정의는 결코 선하지 않다

 

시민사회가 활성화되면 국가와 시장에 대한 견제와 감시, 사회 속의 다양한 문제 해결, 정부가 공급하기에 한계가 있거나 힘든 공공재 공급의 보충적 역할 수행,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 옹호 및 공론장과 사회적 자본 창출 등 그 본연의 기능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오현순, 2019: 1; 김동철·김대건, 2021). 특히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절차의 제도화는 물론 민주적 시민사회가 정착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김호기, 1997: 133).

아울러 민주주의 발전과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건강한 시민사회가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지 않고 권력과 자본을 견제하지 않으면 이들에 의해 사회가 좌지우지되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김소연·조철민·이강준·오현순·옥미애·김문주, 2018).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시민사회는 동학혁명 시기나 3.1운동 시기, 해방정국 또는 4.19혁명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는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김성국, 2001; 박상필, 2004; 손호철, 2001).

특히 한국의 시민사회는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라는 시민단체가 창립되고, 경실련이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와 정책제안 등 폭넓은 활동과 영향력 행사를 통해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박상필, 2015: 46). 이후 환경운동연합(1993년), 참여연대(1994년) 등이 설립되고 이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의정부 법조비리 폭로(1998년)’, ‘제16대 총선 낙선운동(2000년)’, ‘새만금갯벌 개발반대운동(2003년)’ 및 ‘경부고속철 천성산터널 반대운동(2004년)’ 등과 같이 다양한 사회영역에서 주창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주창범, 2014).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이 성과를 거두면서 시민단체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하였다(권혁철, 2002; 김강민, 2011, 2012; 박재창, 2010).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시민단체들은 사회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이 시민단체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국내 학자로서 사득환(1997)은 시민단체들이 정부관료제와 함께 강력한 정치행위자로 부상하고 있으며, 정책과정에서도 영향력과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민단체의 정책과정에서의 역할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정책형성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을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켜 정부가 이를 고려하도록 하는 이슈 생산자 역할, 둘째,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시민단체 구성원 및 시민들의 관심을 동원하거나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는 정보제공자 역할, 셋째, 체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적극적으로 정책대안을 개발·제시하는 대안 제시자 역할, 넷째, 대의민주주의를 시정하거나 보완하는 감시자 역할 등이다.

시민단체가 시민들로부터 점점 신뢰를 잃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연구가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먼저 박병옥(2007)은 시민단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진단하면서 다섯 가지 원인을 지적하였다. 첫째, 정파적 편향성의 문제로서 비당파성 원칙은 시민단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시민단체 인사들이 정‧관계에 진출하거나 정부기관 내 각종 자문위원회 등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특히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시민단체의 활동이 정파적으로 편향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시민들의 실제적 필요에 대한 반응성과 효과성의 문제로서 시민단체들이 정치적 이슈에 매몰되어 지나치게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시민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에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셋째, 일방주의적 운동방법론의 문제로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거나 그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밀어붙이거나, 사회갈등을 예방하고 해소하려는 갈등해소 지향적인 운동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넷째, 전문성 취약의 문제로서 시민단체에 대한 전문성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가 부족하지만,

특정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시민단체들이 이름걸기식 연대운동을 펼치거나 얼굴을 내미는 등 밀어붙이기식 운동방식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째,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문제로서 이는 대다수 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인데, 시민단체들의 전체 수입에서 회비수입의 비중이 낮으며, 주요 의사결정기구에서 일반 시민들의 참여비중의 낮고, 특히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원봉사 활동가들의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한편 윤태범(2009)은 시민단체가 사회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요인들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째, 시민단체의 정치 권력화 문제로서 이는 개혁적이든 보수적이든 많은 시민단체 인사들이 정치권을 문을 두드렸는데, 이는 본인의 정치활동을 위해 시민단체를 이용한 것으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시민단체 인사들이 정책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문제로서 이는 폐쇄적인 정책과정에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참여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서 ‘시민 없는 시민단체’의 문제로서 시민단체의 수는 증가하였지만,

이와 비교하여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넷째, 시민단체의 투명성 문제로서 몇몇 시민단체의 회계 관련 비리나, 의사결정과정, 조직운영 등 시민단체 운영 전반의 투명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승종(2009)은 시민단체의 신뢰도 하락과 관련하여 네 가지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첫째, ‘시민 없는 시민단체’의 문제이며, 둘째, 시민단체의 민주성 문제로서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내적으로는 몇몇 상근활동가의 활동 의지에 따라 운영됨으로써 내부 의사과정에서 소외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시민단체들이 여론과 괴리되어 운동을 함으로써 시민과의 공감대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셋째, 시민단체의 효율성 문제로서 한국 시민단체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지 않고 ‘백화점식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마지막 넷째, 시민단체의 공정성 문제로서 한국 시민단체가 비판과 주장은 활발하게 하지만 자기비판과 성찰에는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임재형,김재신,김강민(2021). 시민은 시민단체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시민단체의 역할과 신뢰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60(2), 455-474.

 

<요란한 아침의 나라>는 진보적인 시민단체들도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정치세력이며, 시민단체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매우 잘 묘사합니다. 미혼모 쉼터인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시민운동가 오유라와 젊은 인권변호사 하나연은 겉으로보기엔 정의롭고 좋은 일 많이하는 시민단체의 대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둘다 금전적인 이익(미혼모 쉼터 후원금을 사적으로 이용, 부동산 투기업자와 손잡고 쉼터 땅을 빼앗으려함)에 움직일 뿐입니다. 시민단체의 대표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가들도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오유라는 부패했고, 하나연은 권력지향적이니까요. 그나마 ‘선한’ 인물이라고 꼽자면 고영희 정도를 꼽을 수 있겠어요. 고영희는 오유라 부부에게 노동착취와 위계적 성폭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10대 때 학교를 자퇴한데다 아이가 있던 미혼모라서 학력도 경제력도 없었지만 하나연과 어울리게 된 뒤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오유라와 남편 이진상을 몰락시키는데 크게 일조합니다. 물론 하나연도 근본적으로 완전히 선하고 정의롭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그래도 하나연의 파멸보다는 오유라의 파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4. 결어

군상극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이 잘 비춰졌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진보-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진보답지 않은 진보와 진보의 대립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브릿g에 계신 많은 분들이 결말까지 쭉 일독하길 바라옵니다. 그럼 이만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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