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잡히지 않는다. 다른 것은 조금 잡혔지만, 배가 텅 빈 것만 같다.> 이 구절에서 나는 잠시 멈추었다. 한번, 두번, 세번을 거듭 읽었다. 이상하게도 울컥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 한동안 머물렀다. 기묘하지, 맨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 딱 이 문장에 홀린 것이. 어쩌면 이 문장에서 주인공이 소년 시절부터 주낙 낚시를 익히면서 생을 일궈온 하나의 터전이 사라졌다는 게 너무도 여실히 느껴져서 일 테다.
이 소설 <해랑의 춤>은 꼭 어르신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같다. 잔잔한 파도와 격렬한 파랑이 함께 도사리는 바다를 보는 것처럼, 물살에 휘말려 너울너울 물 속을 헤매이는 사람이 된 것처럼 한동안 이 소설 안에 잠겨 있었다. 담백한 어조에 유려한 어휘, 곡 필요한 순간에 ‘리듬감’을 더하는 문장이 끝까지 몰입하게 만들었다. 또, 나는 잘 몰랐던 뱃사람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기이하게도 바다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읽는 내내 부모님을 따라 걷던 포항 죽도시장의 비릿한 생선내음이, 비오던 어느 날 그 주변 바다를 걷다가 거세게 불어 닥쳤던 바람이 생각나서 좋았다.
앞바다에 큰 대구가 많이 잡히던 시절 해덕포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판타지지만 어쩐지 한반도와 닮아 있다. 고요하던 어촌 마을에 대구가 잡히는 때면 외지인들이 찾아와서 온 마을을 들쑤시고 가는 것도 비슷하다. 단 한번도 우리 스스로 문호를 열지 못했는데 외세가 들어와서 갑작스레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전통이 짓밟혔으며, 오랫동안 섬겼던 옛 자연신들이 이제는 ‘잊혀져’ 버렸으니까.
마을에 들어오는 외지인들은 마을의 ‘지속가능한 발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더 많은 대구를 잡길 원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숲으로 침범해 들어가서 그 땅을 지키던 곰을 죽이고, 바다를 누비던 범고래를 사냥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돈을 좇아서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따르고, 생태계는 무너지고 만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렸을 때 재밌게 보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가 생각나기도 했다.
외부적인 서사를 간략하게 소개해 봤지만 막상 이 소설 <해랑의 춤>에서 중요한 건 이러저러한 서사가 아니다. 물론 탄탄하게 잘 짜여져 있었지만 내가 반했던 건 제목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해랑의 춤>이었다. 춤을 출 때마다 먼바다에 바람이 인다는 ‘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여인,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게 뒤늦게 밝혀지지만 이 리뷰에서는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해랑이 첫 등장한 장면에서부터 심장이 뛰었다. 본래 춤을 좋아하고 흥이 나는 글을 좋아하는 탓도 있지만, 이렇게 담백하고 담담한 어조로 적고 있는데도 리듬감이 통통 튀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은 오랜만이어서다. 아래 짧게 소개해보겠다.
“하지만 해랑은 여자들이 흉보는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새파란 새벽하늘과 그보다 더 짙고 검은 바다를 무대 삼고 움직였다. 팔을 뻗었다 감아 들이고 발끝을 세워 개흙이 바작바작 밟히는 선창을 밟고 돌았다. 음악이라고는 해랑이 스스로 춤추며 연주하는 장고 박자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나는 해랑이 춤추는 가락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가락이 점점 빠르고 격렬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춤사위, 아무런 음률 없이도 ‘고요’ 속에서 ‘음’을 갖고 노는 여인. 묘사를 잘하고 있어서, 리듬감이 느껴져서 이 문장들은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장면’으로 당당하게 이 소설 안에서 기능했다. 대체로 이런 장면을 묘사할 때 ‘설명형’의 문장이 많이 나오기 마련인데, 필요한 ‘상황’을 잘 선택해서 효율적으로 묘사해낸 게 보여서 좋았다. 이러한 문장은 그 뒤에도 나온다. 나는 또, 넋춤을 출 때 너무 좋았다. (너무 개취일 수 있지만 궁금하면 소설을 읽어보시길, 그 춤사위가 눈 앞에 선연하게 그려지니까. 특히 좋았던 구절들만 잠시 소개해본다)
“흰옷 위로 붉은 띠를 가로질러 맨 해랑은 느린 걸음으로 넋길의 양 끝을 오가며 춤을 추었다. 함파는 평소의 피리나 장고 대신 구슬픈 구음으로 가락을 풀었다. 해랑은 긴 명주 수건을 들고 바닥을 짚듯 느리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이것을 하늘로 바치듯 높이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면 해랑의 손에 들린 명주 수건은 함파의 구음 가락 위에서 춤을 추었다. 해랑이 손을 쳐들면 흰 천이 펄럭, 하늘로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흰 손 끝에서 그보다 더 흰 명주 수건이 파도에 휘말리는 가실 아버지의 넋인 양 너풀거렸다.”
앞에서의 춤사위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처연한 서글픔까지 품고 있는 듯한데 정작 문장은 아주 단아하고 표현에도 ‘절제’가 배어있다. 나는 진도 씻김굿을 좋아하는데 이 묘사를 읽으면서 내가 몇 차례 유튜브를 통해서 봤던 씻김굿의 장면이 떠올랐다. 망자를 떠나보내며 그가 갈 길에 새하얀 천을 깔아주는, 그가 가는 길에 막힘이 없도록 그 길을 또 정성스럽게 닦아주는 마음이 좋아서 한동안 그 굿에 빠져 있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해랑의 춤>인 것은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정서가 바로 이 ‘넋춤’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떠나보내주는 것, 그의 갈 길을 차분하게 닦아주고 함께 걸어가는 것, 어찌할 수 없음을 어찌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애도하는 따스한 마음이 곳곳에 밴 소설이었다. 작가가 참 따스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이 리뷰는 치우쳐져 있다.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참 많은 소설이어서다. 바닷가의 풍경, 풍랑이라던가 춤 그리고 굿에 가까운 것, 살풀이는 내가 좋아하는 정서다. 작가이기도 한 내 입장에서 많이 쓰고자 하는 소재이기도 한데 이 소설은 내가 풀어내는 방식과 달라서 좋았다. 나는 발구름을 마구 하고 호령을 하며 챙챙챙 소리나는 칼춤까지 신명나게 추고 난 뒤에야 ‘살풀이’를 해낸다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 서늘하리만치 차분한 바람결에 따스한 숨결이 깃들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정제되어 있다는 건, 담담할 수 있다는 건 무수한 수양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한 문장씩 곱씹어가며 읽었다.
본래 리뷰에 스토리에 대한 설명과 캐릭터 설명을 하는 나지만 이 글에는 그것이 빠져 있다. 아마 리뷰를 지금까지 읽어온 사람들은 알 거다. 중요하지 않다. 서사와 캐릭터는 탄탄하게 잘 잡혀 있다, 물론 좀 아쉬운 지점도 있다. 주인공과 해랑의 만남과 이야기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된다거나, 조금 더 머물러서 표현해줬으면 하는 장면과 이야기가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거나 다분히 작위적인 구간이 있다던가 하는 것인데… 이 소설에서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다. 예전에 한 작품을 리뷰하면서 했던 말이기도 한데, 문창과 다니던 시절 우리 과에는 ‘못잘썼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여러모로 완성도를 따져보면 잘 쓴 건 아닌데 매력적인 게 확 마음을 사로잡아서 ‘잘썼다’ 그러니까 못잘썼다는 건 평범하게 잘 쓴 거보다 훨씬 뛰어난 거였다. 팬을 양산할 만한 글이기도 했다. 나에겐 이 소설이 그랬다. 별로 따지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려하게 잘 읽혔고 집중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 서사, 에피소드를 잘 배치했다. 예상 가능한 경로로 흘러가기도 했지만, 묘사가 잘 되어 있어서 그 ‘예상 가능함’을 충족해준다는 게 오히려 좋았다. 허니 이 리뷰는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기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리 긴 분량은 아니어서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다 읽게 될 것이다. 주말 동안에 혹은 여유가 나는 시간에 한번 스윽 읽어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