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날로 발전하는 이 시대에 SF 작품들에서 꾸준히 다뤄온 디스토피아, 대재앙 이후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일까. 나 역시 챗GPT를 비롯한 첨단과학기술의 발전과 여름과 겨울이 너무도 길어지는 이상기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디스토피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런 시점이라 이 소설 <남자 아이를 울려선 안 돼>의 작품 설명을 보자마자 당장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3차대전 이후 과학 기술의 수준이 중세 시대로 회귀했다는 것도, 여자들의 질 안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이빨이 생기기 시작했단 것도, 여자가 불쾌감이나 공포감을 느끼면 질 속에 숨어 있던 이빨이 나와서 몸속에 들어온 것들을 썰어버렸다는 것도, 초경을 한 이후에 발치 수술을 받으면 결혼하도록 만들었다는 것도, ‘종교 경찰’이 결성되어 시스템을 통제하는 국가라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초경을 한 이후에 발치 수술을 받는다는 기초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초경 이전에 발치를 할 경우 여성의 몸이 ‘불임 상태’가 된다는 것도 기발한 이야기였다.
이 소설의 도입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스토리를 끌어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설정의 신선함’이었다. 특히 인간의 욕망을 억압했던 중세시대의 설정을 빌려왔다는 것도 흥미진진했으나, 아쉬웠던 건 세계관이나 설정에 대해서 납득이 가지 않는 구간이 있었다는 점이었고 남녀 성별을 극명하게 나누어 평면적으로 서술된 거 같다는 지점이었다.
첫째, 중세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술이 파괴되고 물자가 귀해진 세상에서 인간은 문명화되어 있던 시절의 매너나 에티켓을 잃고 ‘짐승’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는 당연한 수순이나, 중세시대처럼 종교가 메인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요약하자면, ‘계기점’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 세계관에서 주된 권력을 가진 종교가 청교도에 가까운 형태의 기독교라는 건 알겠지만, “왜”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짐승같아진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권력의 ‘핵’에 두고, 종교경찰을 결성해서 사람들을 통제한 걸까. 통제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따를 만한 ‘이득’을 줘야만 한다. 이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또한, 이 세계관 속의 세계는 단일한 한 국가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주변 국가도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는 건지 궁금했다.
여성들은 ‘여글’만을 사용할 수 있고 남성이 쓰는 ‘글’은 다른 형태라는 데서 조선시대를 떠올렸는데,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하다는 설정 역시 조선시대와 비슷했다. 그 시대의 경우, 권력구조가 남성 중심으로 이뤄진 탓이 컸다. 조선이라는 주요 국가 시책으로 ‘숭유억불’을 내세웠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와 예법에 따라 남성은 ‘입신양명’하고, 여성은 그런 남성을 서포트하는 입장이라는 사대부들의 사상이 국가 전체로 퍼지면서 하나의 문화가 된 결과였다. 각종 사료에 따르면 고려와 조선 초만 해도 여성이 남성과 비교해서 별다른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경우에도 이러한 ‘계기점’이 분명하게 있다. 국가 시책과 국가를 이루는 자들의 공통된 생각이 어떠한 믿음을 야기했고 어떻게 퍼져나갔는가 하는 부분 말이다. 우리가 조선이라는 국가의 후예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겪은 불합리한 일들을 잘 알고 있고, 심지어 우리도 불합리한 일을 겪은 때가 있지만, 현재 30대의 여성인 나의 입장에서는 우리 정도의 세대가 되었을 때는 남성 역시 ‘남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불합리한 일들을 겪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세계관을 엄격했던 종교가 있었던 ‘중세시대’로 설정해두고 그 종교에 힘입어 여성들을 아랫사람으로 취급하였다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피해자 그리고 남성이라는 존재를 가해자의 형태로 이분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는 위험성이 따른다고 본다. 물론, 소설의 세계관을 그러한 이분법적 세계가 있다고 설정할 수 있다. 가상의 현실이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면 마땅히 그리할 수 있다. 다만, 그 세계가 ‘어찌하여’ 그렇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독자 된 입장에서 알고 싶다는 이야기다.
조금 더 이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이 사회의 경제/법적인 시스템은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일해서 먹고 사는지, 종교경찰 체계의 윗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 이 세계가 ‘어떠한 형태’로 이뤄졌는지 궁금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판타지, SF와 같은 세계관을 새롭게 짜는 형태의 글에서는 화폐는 어떠한 것을 사용하는지, 의복과 생활 환경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전반적인 신념체계는 어떻게 이뤄지는지까지 잡고 갔을 때 그 이야기가 모두 이 소설 안에 표현되지 않더라도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거 같다.
둘째, 폭력적인 가해자 형태의 남성 이외의 남성은 이 세계관에서 부재하는 것인가.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뒤에 궁금했던 지점이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남성은 루카스처럼 정신감정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빌런에 가까운 폭력적인 유형이 있거나, 아버지처럼 온화한 척하지만 사실은 더 큰 악을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사람밖에 없다. 하물며 그 엄격했던 조선시대, 심지어 성리학자 중에도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있었다. 천원권 지폐에서 자주 만나는 학자 ‘퇴계 이황’이다. 그는 지적장애를 갖고 있던 부인과 해로하며 부인이 자칫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도 부드럽게 감쌌다. 제사상 위에서 떨어진 배를 치마 속에 감춘 아내를 형수가 나무라자 아내 대신 사과했고, 그 이유를 물어봤을때 “먹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자 그 배를 손수 깎아주었다. 아내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 태운 탓에 붉은 첫을 기웠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경망스럽다고 비난했을 때도 “모르는 소리들 말게. 붉은 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거라네. 우리 부인이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라는 말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물렸다. 단지 이황뿐 아니라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본 케이스만 해도 여럿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이 한 사람의 성격을 결정 짓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이 아무리 우대 받고 대우 받는 상황을 겪었다 하더라도 안하무인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 소설 안에서 주인공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이는 폭력적인 가해자 형태의 남성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아내와 함께 주인공을 죽음의 위기 속으로 또 한번 밀어 넣는다. 주인공의 조력자가 될 만한, 보다 더 균형잡힌 남성의 존재는 이 세계관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이 많다 보니 다 보고 났을 때 머리가 어찔했다. 폭력적인 장면을 쓸 때 경계해야 하는 것도 너무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장면만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어쩌면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을 너무나 ‘피해자 형태’의, 피해자의 프레임 아래 두는 걸 경계하는 터라 더 불편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남존여비가 횡행한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여성이 더 큰 적이 되기도 한다.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그리했듯이. 아직까지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겪고 있는 고부갈등 역시 여성이 여성의 적이 되고야 마는 구도기도 하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머니와 주인공 구도를 활용해서 잘 다루었지만, 역시나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성의 어머니 역시 너무 ‘평면적’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보더라도 입체적이기 마련인데, 가상 세계 속의 인물이라면 더더욱 입체적으로 그렸을 때 더 공감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가해자로서의 가해자, 피해자로서의 피해자 말고 다른 형태의 인물이었다면 이입하면서 열렬하게 즐겼을 거 같다.
셋째, 주인공과 소피가 이 소설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 회차를 보면서 가장 아쉽게 느꼈던 점이다. 소피와 주인공이 함께 사건이나 갈등을 해결한 끝에 마지막 내용이 왔다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 같은데, 이 소설은 주인공이 겪는 비극적인 고통이 반복되던 끝에 소피와 함께 세상에서 달아나는 걸로 ‘자유’를 택한다는 걸로 읽혀서다. 나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좋아한다. 거기에서는 델마와 루이스가 각각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어떠한 선택을 반복하는지를 잘 보여주었기에 마지막 결말의 카타르시스가 정말 컸다. 영화 <아가씨>의 경우에도 아가씨와 숙희의 관계 설정이 잘 이뤄지던 와중에 아가씨와 숙희 각각이 겪는 이야기가 잘 짜여져서 자유로 향하는 두 사람의 결말에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내가 이 소설의 ‘소개’를 읽으며 기대했던 건 주인공과 소피의 ‘워맨스’ 였다. 불합리한 사회에 맞서는 역동적인 두 여성의 모험활극이 궁금했지, 비이성적인 형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는 사회를 보고, 그 사회 속에서 힘겹게 버티던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살인자가 되어 결말까지 가는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소설의 시작점과 끝에서 반드시 한번은 변화해야 하고, 주인공의 ‘주도적인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물론, 이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야 할 의무는 없다. 이 역시 내가 선호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게 했을 때 읽는 재미가 더 커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아쉬워서 리뷰가 길어졌다. 기초 설정이 신박하고 “아, 당장 읽어봐야지!”하는 생각이 든다는 건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니어서다.
고작 리뷰어의 입장에서 너무 쓴소리를 많이 한 게 아닌가 조심스럽지만, 나 역시 여성으로서 여성이 중심이 된 이야기와 워맨스를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꼼꼼하게 읽었다. 끝까지 이 소설을 다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다른 독자에게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라고 권하고 싶다. 반짝이는 발상에서 시작해 하나의 세계관을, 그것도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를 결말까지 끌고 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 리뷰에서 일일이 열거하지 않은 디테일한 에피소드와 설정들에서 빛나는 부분들이 분명하게 있었다. 특히 이빨을 발치하는 이모들이 있다는 건 너무 재미있었는데, 그 이모 중 한 명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소설을 써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나와 같은 의견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분들의 리뷰가 더더욱 궁금하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이렇게나 이야기할 여지가 많은 소설을 많이 읽어주시길. 저마다의 시간에 맞게 읽고, 신명나게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리뷰를 쓸 때 주로 내가 기억하는 것들을 활용해서 쓰지만, 가끔 이런저런 내용을 찾아본다. 이번 리뷰의 경우 이황의 파트에서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했기에 링크로 첨부한다. https://zrr.kr/LR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