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를 전제하고 리뷰합니다. 참고해주세요
언제나처럼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번엔 조금 깊게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부재不在는 무엇입니까?
나를 비어버리게 하는 것, 나의 어둠, 나의 공허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봅시다.
우선, 코즈믹 호러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잘 아는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코즈믹 호러는 인간의 인지 한계를 다룸으로써 그 너머의 것, 즉 인간이 처리할 수 없는 대상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논하는 장르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인간의 인지 너머의 것’은 무엇일까요.
이 작품은 어둠으로 시작해서 어둠으로 끝납니다. 작품 내에서 어둠은 상당히 많이 변주되죠. 누구나 각자의 어둠이 있을 것이고요. 그러니 오늘은 인용 위주로 살펴보겠습니다.
극복해야 할 것
처음에 어둠은 이렇게 소개됩니다.
인간이 우주로 진출했다고 하지만, 결국 생존권역을 우주로 쏘아 올린 것일 뿐, 진정으로 우주에 진출한 건 아니었다. 인간의 몸으론 우주에 진출하기는 커녕 우주의 어둠조차 극복하지 못할 게 뻔했다. 저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나 있을까?
어둠을 왜 극복해야 하나요?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우주에서 어둠은 극복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있는거죠. 어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부재하는 것들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작중 인물들은 어떻게 말하나요? 카르멘은 말합니다. “생각보다 어둡지 않네요” 라고요. 대체로 인물들은 어둠을 직접 맞닥뜨리기 전까지 어둠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왜냐, 우리는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가로막힘, 또는 끝이 없음. 그리고 ‘알 수 없음’
카르멘은 수사 과정에서 벽을 만나죠.
그때 그거, 벽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둠이었어요. 지독하게 새까만 어둠이었다고요.
벽은 여기서 어둠과 동치됩니다. 벽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막막하고, 더 다가갈 수 없는 심상입니다. 그런 벽이 어둠이라는 이미지와 이어집니다. 어둠은 어떤가요? 시작도 끝도 없는 겁니다. 벽을 만졌더니 그 너머에 어둠이 있었단건 말 그대로 끝 이후의 영원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로 읽히죠. 그런 벽을 화자는 이렇게 인식합니다.
물론 이렇게 어두운 콜로니조차 우주보다 어둡진 않았다. 개척되지 않는 미지의 어둠은 차갑고 비정하다. 또 알 수 없기까지 하다.
카르멘은 어둠과 접촉하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인물들은 처음으로 어둠이란 ‘알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합니다. 알 수 없는 것. 코즈믹 호러의 중심이죠. 알 수 없는 것. 미지의 대상을 마주했을 때 인물들은 미치는 대신 어둠에 ‘몰두’하게 됩니다. (미쳤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리뷰에선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번 인식해버린 어둠은 돌이킬 수 없이 내면에 자리잡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여기서 슬슬 제가 읽은 어둠을 밝혀야겠네요. 극복해야 할 것, 벽 너머에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번 소제목 ‘돌이킬 수 없는 것’. 어둠은 뭘까요? 직관적으로도 어둠은 절망, 우울, 불안, 두려움 등의 감정을 호출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둠을 ‘부재’로 읽으려 합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부재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언가로 읽어봅시다.
부재, 즉 아무것도 없는 것. 절망이나 두려움과 같은 벽을 넘어서서도 존재하는 어떤 상태. 그것에서 발견되는 알 수 없음 그 자체. 코즈믹 호러에서는 꽤 익숙한 나열입니다.
여기까지 보고 더 읽어봅시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선 해명을 두려워했다. 해명으로 알게 될 것이 두려웠다. 정녕 파고드는 게 맞을까?
이미 V는 부재를 인식했습니다. 두려움 너머에도 무언가 있다는걸 알았고, 그걸 알아내는게 옳은지 아닌지 고민하면서도 “알아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V는 주드의 “납득할 만한 답” 을 찾을 거라는 말에 격분했고 “넌 이대로 만족할 거냐”는 말에 무언가 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둠은 우주의 “불가사의” 이며 “그 무엇도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외칩니다.
당신은 절망할 겁니다! 베넷이 말한 게 옳아요! 이 우주는 지독하게 어두워요! 당신 따위가 밝힐 수 없을 만큼 어둡단 말입니다!
왜 갑자기 ‘밝힌다’는 말이 나올까요? 앞뒤 어디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런 대사가 나온다는건 꽤 의도가 있다고 읽힙니다. 앞에서 부재를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정의했습니다. 부재를 뒤집으면 뭐가 되나요. 존재? 부재라는 상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요. 복잡한 말장난 대신 대사에 집중해봅시다. 다행히도 이 글은 꽤 직관적인 이미지를 줍니다. 우주는 지식으로 밝혀낼 수도 빛으로 밝힐 수도 없죠. 주드가 우주를 납득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어둠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 완전한 부재니까요. 납득하거나 만족할만한 답을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우주는 ‘어둡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우주와 어둠은 하나의 은유처럼 읽힙니다. 우주, 인간의 정신. 어둠, 인지의 벽 너머 무언가. 그걸 생각하고 아래 문장을 읽어봅시다.
우주는 어둡다. 그것도 지독하게 어둡고, 무언가로 밝힐 수 없을 만큼 어둡다. 누군가를 순식간에 실종시킬 만큼 어둡고, 또 누군가를 박제하고 다닐 만큼 어둡다.
어떻게 읽히나요? 저는 이렇게 읽힙니다.
“OO는 보이지 않는다. 지독하게 막막하고,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거나, 또 누군가를 한 곳에 영원히 고정해버릴 수도 있다”
빈 칸에 들어갈 단어는 공허, 절망, 고통, 우울 뭐가 됐든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건 어둠이 그 너머의 무언가라는 사실이니까요.
빠져나올 수 없는 것
그렇다면요. 이렇게 부정적인게 어둠이라면 인물들은 왜 계속 어둠에 집착하는걸까요. V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그런데 왜 나는 카르멘에게 연락하고 있는 걸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알 수 없는 관성에 의해 움직입니다.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요(“그 책임을 지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설명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은 양(positive)의 방향, 즉 무언가를 원하는 방향이라기보단 음(negative)의 방향, 다시 말해 하지 않을 수 없는 방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을 찾으려는 욕망보다는 알아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몰두인거죠.
그러나 인간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이 모든 관성과 충동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경종을 울리는 불안”과 같은 공포가 솟아나는건 그 무한한 부재와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하는 인간의 미약한 생존본능일 겁니다. 자기보호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더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존 본능과도 같은 거부감이 V에게 공포를 심어주지만 이미 알아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습니다. 부재가 존재의 반의어가 아니라는걸 안 사람은 부재에도 존재에도 속하지 못하겠죠.
꺼내지지 않는 것
탐색을 계속하며 V의 두려움은 커져만 갑니다.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죠.
카르멘은 내게서 무엇을 봤을까?
내 공포, 내 환각, 내가 마주한 근원적 의문을 마주했을까?
극도로 두려워하며 자신이 무엇에 속해있는지, 근원적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그러나 카르멘이 그걸 아나요?
그러는 당신은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 침착하신 겁니까?
제가 침착해 보이십니까?
모릅니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아무리 공포와 혼란이 이성을 갉아먹어도 어둠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꺼내어 보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대해 알지 못하니까요. 카르멘도 어둠을 인식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을겁니다. 어둠에 끌려가기 전까지요.
그렇다면 어둠에 갇힌 사람들이, 실종되어 박제 된 사람들이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사람들이 실종되기 전, 어둠에 대해 말하기 전, 우리가 그들을 붙잡을 방법은 없는걸까요. 글은 이 의문에 꽤나 닫힌 대답을 내놓습니다. 하나의 장면을 통해서요.
카르멘은 파우스트를 꺼내려고 합니다. 꺼낸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그런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실패하죠. 어둠은 그걸 인식해버린 사람 뿐 아니라 거기에 갇힌 사람을 꺼내려고 하는, 일종의 인력을 가진 무언가처럼 그려집니다. 누군가 어둠 너머로 가버렸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중간에 건너 뛴 문장을 다시 살펴봅시다. “어둠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내재된 광증을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마치 원래 자리했어야 할 곳을 찾는다는 듯이 말이다.” 꽤 직접적인 문장입니다. 어둠을 알아버린 사람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거기서 ‘꺼내려고’해도 소용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둠에서 사람을 꺼내려면 어둠을 마주해야하고 어둠은 접촉하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인데요.
그러면 우리는 이 실종을 두고 봐야만 하나요. 어둠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합니까.
암흑색맹
결말부를 봅시다. 이 작품은 왜 우주는 어둡다는 말을 반복하는걸까요. 왜 이렇게, 우주가 어둡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해야 하나요? 만약 이것이 경고라면 어떻습니까. 결말부에서 V는 우주가 어둡다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V는 압니다. 우주의 어둠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고, 끝이 없는 것이며, 가로막힘 너머에도 존재하는 알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빠져나올 수도 없고 꺼낼 수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러니 반박하죠. “그걸 누가 모릅니까?” 다른 사람들은 우주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지 못하는게 맞습니다. 닿고 나면 돌이킬 수 없지만 닿기 전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쯤해서 제목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암흑색맹. 암흑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단어입니다. 암흑이 있음에도 볼 수 없는 암흑색맹의 콜로니 사람들과 암흑을 본 후의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한 번 암흑을 보고 난 후에는 다른 것도 볼 수 없게 되겠죠. 어둠을 알고나면 그 속에서밖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모든걸 덮으니까요.
암흑을 보고 난 사람들이 이걸 아무리 경고해도 암흑색맹인 사람들은 “그걸 누가 모릅니까?” 라는 말만 하게 될 겁니다. 보지 못하니 어쩔 수 없죠. 결국 누구든 그 안에 빠지고 나서야, 그 진실을 깨닫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며 그때에 할 수 있는 말은 “우주는 당신들 생각보다 어둡다”는 말이 전부일 것입니다.
콜로니로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가 어둠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졌었죠. 결말부를 표면적으로 보면 단순히 ‘덮어야 한다’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겁니다. 절대적으로 알 수 없는것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V의 결말부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베넷은 여전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알 수 없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V는 서명했지만 경고했고, 우주의 어두움을 직시했고, “고통 사이로 남몰래 스며든 차가운 어둠의 감각”을 느낍니다. 그가 다른 둘처럼 어둠에 삼켜질까요? 결말부만 봐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베넷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저는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 베넷은 여전히 살아있을겁니다. 우주의 어두움을 알았다면 그 어둠 속에서밖에 살 수 없을테니까요. 살아있는게 더 끔찍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살아있긴 할 겁니다.
V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주와 콜로니 안의 어둠 모두 알았습니다. 콜로니는 어둠을 덮음으로써 어둠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어둠에 박제되어버린 사람들을 묻고도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콜로니에 산다는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 수 있으니까요. 어느 곳에 있더라도, 어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어둠 속에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주는 어두우니 말입니다.
그러니, 작품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콜로니로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독자는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어둠을 직시하고 살아갈 때입니다. 우주는, 우리 따위가 밝힐 수 없을 만큼 어둡다는 사실을 알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