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첫째처럼 가족들의 온 기대를 받는 것도 아니고, 막내처럼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 위로는 첫째에게 치이고 아래로는 막내에게 치여 서러움을 타는 위치가 바로 둘째다. 물론 요새는 다를 수도 있겠으나 일단 내가 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러하다. 내 친구들을 봐도 그렇고.
둘째가 가정 내에서 사랑을 못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한창 학업에 신경을 써줘야 할 큰아이와 어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는 막내에 비해 둘째는 부모님의 관심이 덜하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귀해진 요새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이 하나 키우기도 벅찬 요즈음에 둘째는 가족 내에서 어떤 포지션일까. 예상치 못하게 생긴 애물단지? 아니면 아이가 귀한 시대에 또 찾아와준 사랑둥이?
이 작품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은 둘째다. 첫째도, 막내도 아닌 둘째. 윗집의 둘째 아이도 사라졌고, 윤지가 맡고 있는 학급의 정후도 사라졌다. 그리고 윤지의 애인인 경호는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한 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마저 잊혀졌다. 아무도 사라진 둘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라진 둘째들을 오롯이 기억하는 건 윤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라진 둘째들 중 일부만 기억하거나, 나중에는 그 기억마저 잊어버린다.
윤지의 남자친구인 경호도 차츰차츰 사라진다. 경호는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처음엔 손으로 시작해 발, 성기, 혀 등 신체 일부가 하나씩 없어지다 결국 윤지 앞에서 이불에 휘감긴 채로 존재가 지워졌을 뿐.
경호가 사라지기 전 윤지가 던진 말이 의미심장하다. 혀가 사라진 경호는 눈빛으로만 의사전달을 할 수 있을 뿐,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사라지기 직전 경호가 던진 적의서린 눈빛은 뭘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정곡을 찔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 자신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윤지에 대한 실망? 뭐가 됐든 이제 경호는 사라졌고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윤지가 경호를 보내며 했던 생각을 되짚어보면, 사라진 둘째들은 사회에서 도태된 것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선별된 첫째들이 아닐까. 팍팍한 현실에 날이 갈수록 아이들의 수가 적어지는 현상을 살아있는 둘째들이 사라진다는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재치있게 풀어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취소선)둘째’ 라는 제목은 작품의 주제와 현실을 압축해 보여주는데다 독자의 호기심까지 유발하는 기발한 제목이라 할 수 있겠다.
사라진 둘째들은 어디로 갔을지, 살아남은 첫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후속편이 나와도 재밌을 듯하다.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