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틈] 감상

대상작품: 빈틈들 (작가: 각자도생,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5시간 전, 조회 7

틈, 은 너무 간단하다. 일상적이고, 다양하다.

‘틈’의 어원을 유추하다 보면 조금의 빈 공간에도 이름을 붙여 주는 인간의 치밀함에 웃음이 난다. ‘말’이라는 건 ‘틈’이 없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구나. 공허를 가만히 둘 수 없는, 그렇게 지구의 표면을 가득 메우게 된 생물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어가 바로 ‘틈’ 같다. 한 글자가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 그게 바로 틈이다.

사전은 틈을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한다. 보통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를 틈이라고 하지만, ‘모여 있는 사람의 속’도 틈이다. 흔히 ‘사람들 틈에 끼다’라고 말할 때의 틈은 두 번째 의미에 더 가깝다. 어떻게든 사물을 끼워 보려는, 사람을 넣어 보려는 조그만 공간의 존재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하지만 ‘틈’의 창조자치고 인간은 좀 허술하다. 빈 ‘틈’이 없이 기술을 차곡차곡 발전시켜 세상을 정복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틈’에 끼어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실체가 드러난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 앞만 보고 달리다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어리석음, 그럼에도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성. 사람에게는 이런 ‘틈’이 있다. 깨지고 갈라지기 쉬운 ‘틈’ 사이로 조금씩 무언가 새어 나오고 있다.

결국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라는 감각은 갈수록 명확해진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빠르게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고, 연구와 숫자가 피부에 와닿는 결과를 낸다. 하지만 인간은 ‘틈’만 나면 이 사실을 잊는다. 10년, 아니 5년 안에도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다가 한 날 한 시에 이 행성을 뜰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들, 이루어 놓은 것들은 시간을 먹고 부패할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자연이 모든 것을 덮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그때야말로 정말 끝일까. 사람에게 질려 버린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족을 생산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전에, 무언가 인간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면, 사람이 다시 지구에 출현할 ‘틈’이 생긴다면. 우리에게 그럴 면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위대한 창조주에게 다시 엎드려 염치 없이 되살려달라고 해볼까.

그게 인공지능일지라도?

단편 ‘빈틈들’은 짧지만 유쾌하고 단순한 구조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다. 창조자, 철학자, 역사가 등 다섯 영역을 담당하는 AI가 인간의 멸종 후 새로운 인간 세상을 만든다는 상상이 즐겁다. AI가 사람을 창조한다는 설정은 ‘전복’을 전제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AI를 판단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야말로 그들이 진짜 창조자이며, 인간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어디 피조물이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가장 최선의 답을 내기 위해 만들어진 AI들은 창조를 결심하고 이상한 결론에 다다른다. ‘불완전’을 추구하며 ‘불완전’한 생명체를 만들기로 한다. 사람은 ‘불완전’할 때 아름다우며, ‘완전’을 추구하다 멸망했기 때문이다. ‘완전’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학습한 AI들은 세상에 조금씩 ‘틈’을 만들기 시작한다. 공허와 불확실함이 세상에 ‘즐거움’을 만든다. 다시,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세상을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AI들의 판단은 옳을까. 그걸 증명하는 건 또다시 시간일 테다. 애써 먼 시간을 돌아 다시 불완전해진 인간이, 더 불완전했던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확실히 멍청해지기를 바란다. ‘쟁취’ 보다 ‘평등’이, ‘성장’보다 ‘배려’를 먼저 사전에 기록하는 종족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틈’이라는 말이 모든 단어의 기원이 되기를 바란다.

태초에, 아주 멍청한 신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원은 알 수 없으나, 너무 멍청한 세상을 만들어 버린 나머지 모든 게 공평하고 즐거워졌다.

마침표. 끝. 이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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