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사탄 실직’
언제부터인지 온라인에서 퍼지고 있는 밈(meme)이다. 악의 기원이자 집합체였던 사탄을 직장에 다니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순식간에 실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유행어는 흔히 상상하기 힘든 수위로 잔인하게 행동하는 인간을 빗댈 때 쓰인다. 악마보다 무섭고 귀신도 잡아가지 않을 만한 사람들. 세상에 저렇게까지 악할 수 있을까 싶은 이들이 저지르는 일은 여전히 우리 주변과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종교와 신의 영역을 이성과 과학이 설명하기 시작한 이후, 영적인 모든 것은 위상의 변화를 겪는 중이다. 인간의 경계 밖의 것, 절대적인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대중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최근 신, 저승사자, 악마, 사후세계의 이미지가 신화적 콘텐츠에 삽입되고 가공됨에 따라 그 내용은 더욱 현대적이고도 다양해졌다. 대표적인 예로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웹툰 《신과 함께》를 들 수 있다. 저승차사의 복장이 말끔한 양복이거나 현대식이라는 점, 인간의 영혼이 무사히 49일간의 재판을 거쳐 환생하도록 돕는 게 다름 아닌 변호사라는 점 등은 이전의 신비하고도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던 사후관을 좀 더 친근하게 만든다.
지옥과 무시무시한 저승사자가 가득하던 저승이 실은 체계가 잘 짜인 일종의 재판소와 같다면 사탄이 직장에 다니지 않을 이유는 또 무엇인가. 하루가 다르게 잔학무도한 사건이 뉴스로 줄줄이 흘러나오는 세상에서 어쩌면 ‘악’이라는 최상위급 존재는 빛이 바래고 있는지 모른다.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그 고통을 조롱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차단하는 사람들. 감정과 감정 사이에 세워진 벽은 소통을 차단하고 자극만을 남긴 채 타인의 삶을 여과하고 있다. 익명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고민과 분노, 슬픔과 괴로움은 그저 수위로 조회수가 매겨지고 발 빠른 누군가는 그것을 조각조각 잘라 붙이는 것만으로도 명성을 얻는다.
오늘도 사탄이 혀를 내두를 만한 사건이 ‘사탄 실직’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한 채 공유된다. 그것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당신에게 찾아온 누군가. 머리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까마귀 탈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왠지 그것이 진짜 까마귀머리처럼 보일 즈음, 그가 가만히 자신의 명함을 내민다. 앞뒤로 대충 살펴보니 어느 회사의 과장인 듯한데, 어리둥절한 당신에게 그는 침울하게 말한다.
실직했습니다
지야 작가의 소설 〈사탄실직〉은 한마디로 ‘힙’하다. 제목에서부터 진하게 풍기는 유행어의 냄새는 독자들에게 이 글을 한 번쯤 클릭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사탄 실직, 어디서 많이 본 말인데. 익숙함에 이끌려 온 사람들은 첫 문장인 “실직했습니다”를 읽고 강력하게 몰입한다. 이 문장의 발화자는 누구인가. 그는 진짜 사탄인가. 사탄이 실직할 수 있는가. 그저 말장난이던 관용어구 하나를 실제의 상황으로 마주하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는 즐거운 상상이 펼쳐진다.
전술하였듯 악마는 악의 근원이자 인간의 역치를 뛰어넘는 능력으로 여러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곤 했다. 그러나 이 소설 안에서 악마와 인간은 전위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묘하게 악해지는 사람에게 실직한 사탄이 찾아와 도리어 ‘악함’을 배우고 복직을 꿈꾼다. 작가는 ‘인간을 더욱 악마답게, 악마를 더욱 인간답게’라는 슬로건 아래 이 소설을 써 내려간 듯하다. 직장을 다녀야 하는 인간은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꼬락서니”의 삶을 살고 있다. “겨우겨우 구한 방은 천장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침수”되고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은 저축은” “놀란 참새 떼처럼 날아가 버렸다”. 시궁창도 이런 시궁창이 없다.
그렇게 살아가던 을현에게 사탄이 찾아왔다. 그 사탄은 이미 한 회사의 과장급 임원이며 말쑥하게 만든 명함도 있다. 한 가지 수상한 점이라면 인간이 아닌 까마귀 모양의 머리를 했다는 정도. 명색이 사탄인데 사람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라면 어디 ‘간지’가 나겠는가. 근데 이 사탄은 조금 우울해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을현에게 찾아온 이유를 밝히며 을현의 사악함을 낱낱이 고발한다. 보통 사람으로 묘사되던 을현은 사실 여느 SNS나 흔하게 있는 “뜨거운 감자” 같은 계정의 운영자다. 사람들의 논의를 부추기고 싸움을 말리지 않는, 자극성으로 몸피를 불리는 그런 계정의 소유주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사탄이 ‘악함’을 의뢰해 오기에는 을현의 ‘악함’이 극단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탄의 의뢰를 받을 정도의 사악한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수십 명을 죽인 연쇄살인마, 거액의 사기를 친 강도, 정신적 세뇌로 인간을 조종하는 거대 종교의 사이비 교주. 온갖 악한의 형상이 머리에 떠오른다. 하지만 사탄의 의뢰를 받은 을현은 어쩐지 이와 거리가 많이 멀어 보인다. 오히려 소설의 도입부 묘사를 보자면, 그는 한없이 선량하고 조금은 불쌍한 소시민 청년일 뿐이다. 그러나 사탄 ‘가빈’은 을현을 분명히 지목해 그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을현의 ‘악’은 방구석에 앉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SNS 계정으로 자극적인 소식을 퍼다 나르는 것, 그게 뭐 어때서. 다들 매일 하는 일 아닌가.
을현의 ‘악’이 악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SNS의 운영 방식을 출제자의(?)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힙’함은 ‘트위터’라는 SNS의 생태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지야 작가는 SNS, 특히 트위터에 해박한 듯하다. ‘사탄 실직’이라는 밈은 하나의 글이 작은 공감을 얻으면 쉽게 공유되고 재생산되는 트위터에서 가장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자극적인 글이 줄 수 있는 명성은 그곳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마음먹고 작정하면 수천 팔로워를 거느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교묘하게 엮어 놓은 자극적인 사진을 적당한 수위의 글과 함께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클릭 하나로 자신의 타임라인에 옮겨 둔다. 한 사람의 공감을 얻은 글은 다른 이의 공감을 쉽게 부른다. 그렇게 수십 개의 공유는 수백 개의 공유를, 수백 개의 공유는 수천 개의 공유를 가능케 한다.
SNS 상의 유명세가 실상의 권력을 만드는 이 사회에서 을현의 세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공유되는 숫자를 보며 웃고 있을지 몰라도 게시글에 찍히는 리트윗 수가 늘어날수록 조회수는 곱절로 증가한다. 사실을 검증하는 데에 서툰 요즘 사람들은 공유와 공감의 수가 많은 정보를 사실화한다. 자극과 선정 사이에서 호기심으로 한두 번 타임라인 사이를 옮겨간 글에는 수천 명의 시선이 달라붙는다. 그들은 ‘너 그거 봤어?’라는 질문에 ‘어 그거 봤어’라고 답할 것이고 ‘그거 진짜 대박이지 않냐’라는 물음에도 ‘장난 아니었지’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그거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에는 어떨까. 분명 직접 눈으로 본 정보인데 옳고 그름이 판단되지 않는다. 그저 깔깔 웃으며 공유해 놓은 자극이 타임라인에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있을 뿐이다. 이제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민감하다. 누구도 토론하거나 논의하지 않는다. 상의 없는 공유가 거대하게 가장된 소문의 울타리를 만든다. 을현은 그 울타리를 자신도 모르게 수백, 수천 개 양산해온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고통으로.
을현은 자신의 계정이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불화는 내가 의도해서 일어난 게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현대 사회의 일면”, “공교롭게도 사람들 간의 의견 차를 극명하게 만드는 것”을 캡처해 올릴 뿐이다. 하지만 이 불화가 을현의 계정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계정을 지울 생각이 없다는 악마의 말에서 이미 그의 얕은 술수가 들통난다. 을현은 자신의 지위를 즐기고 있다. 자신의 계정이 불편하면 차단하거나 뮤트(상호 차단하지 않으면서도 특정 계정의 게시글을 보이지 않게 하는 트위터 내 기능)하면 된다고 떠들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차단하고 뮤트한다면 존재 이유가 없는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맨 처음, ‘사탄과 계약할 만큼 악한 사람’을 떠올려보자는 말에 어떤 이를 생각했는가. 을현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공감의 부재’와 ‘책임의 전가’라는 이름 아래 어쩌면 살인, 사기, 정신 세뇌보다 악랄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는 게시글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그 끝에서 누가 죽든 말든, 물이 새는 나의 집과 몸의 안위만 생각할 뿐이다. 을현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인칭 시점이 끝내 소름 끼치는 이유는 내내 그가 ‘자신의 입장’으로 이야기한다는 데에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을현과 가빈의 대화를 삼인칭으로 관찰한다면, 또는 을현의 계정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나 심지어 가빈의 입장에서 쓰였다면 평면적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을현을 본다면 그의 악이 단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현의 입장을 통과한 그의 악함은 기묘한 자기합리화를 거친다. 그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악을 이용하고 있다. 그에게는 선한 일에 써야 하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겪는 악에서 끌어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을현의 게시글은 단시 ‘타인’의 고통일 뿐일까.
계약 완료입니다
악함으로 사탄을 뛰어넘은 인간 을현은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에 따라 자신의 계정으로 마음껏 돈을 번다. 만약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사탄 실직’이라는 밈을 단순히 활용한 웃기고 단편적인 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소설’로 만들어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가빈이 아무리 순진해 보였다 해도, 사탄은 사탄이다. 소설의 중반까지 작가는 가빈을 끈질기게 평범함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을현에게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은 그의 본질이 악마라는 점을 독자에게 명백히 상기한다. 사탄과의 계약을 가벼이 여긴 그 삶에 예상치 못했던 역경이 밀려 들어온다.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고통과 슬픔이 자신에게 들이닥치자 을현은 극한의 혼란에 빠진다. 이때 태연히 나타난 가빈. 그의 태도는 이전처럼 무심하지만, 이제는 소름이 돋는다. 그는 ‘악’을 활용하는 존재이기에 그것에 무감하다. 을현이 슬픔과 억울함을 담아 외치는 소리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가빈은 수화기 너머의 을현에게 SNS가 “인간의 영혼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장소”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스마트폰이 뇌와 연결된 또다른 장기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 그 안에서 사용 시간이 가장 긴 SNS는 영혼과 접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에 접속한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알고리즘이 퍼다 나르는 영상과 사진을 본다. 하루에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게시물 중 자극적인 내용 한두 개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본다. 많은 사람이 본다는 것은 공감대 형성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내 영혼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의지’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의지는 사악함을 여과하지 못한다.
가빈은 이것을 이용했다. SNS를 타고 돌고 돌아 공유된 악은 을현의 삶을 망가뜨렸다. 가빈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을현에게 일어난 사건은 가빈의 매력적인 이론을 뒷받침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고 동생이 아버지를 잔인하게 찌른다. 이 사건이 을현의 게시물에서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일까. 가빈은 SNS에 영혼을 의탁한 사람들이 ‘을현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을현에게 벌어진 사건을 그렇게 보기에는 개연성이 조금 떨어진다.
아버지가 교통사고 가해자가 되는 것은 인터넷 게시판의 사연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SNS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는 있지만 동생이 아버지를 찌르는 데에 정말 을현의 게시물이 크게 개입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동생의 충동적인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을현의 게시물을 직접 보고 영향을 받았다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떠도는 사연을 중독된 사람처럼 읽었다는 등의 내용이 추가되면 좋다. SNS가 동생에게 악함을 심어주고 그 악함이 현실의 공간에서 실현되었다면 이것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을현의 게시글이 온라인에 퍼짐에 따라 사회 전반적인 악함이 심화하는 상황을 장면으로 추가한다면 어떨까. 이 사회는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수위가 높은 이야기를 원한다면 을현은 멈추지 않고 계정을 운영할 것이다. 특정 콘텐츠에 장시간 노출된 사람들은 당연히 그 방향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원인 모를 잔인한 사고가 급증한다든지, 대중에게 광범위하고도 이상한 정신적 현상이 발생한다면 그것이 을현의 게시물과 관련 있으리라고 충분한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이 계약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을현의 후회는 개인적인 한을 넘어선, 조금 더 사회적인 메시지를 지닐 것이다.
물론 지금의 열린 결말은 을현의 악한 행동이 지속될 것이며, 그것으로 더 많은 죄가 양산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을 암시만 하는 것과 작가만의 상상으로 장면화하여 소설에 풀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요컨대 몇 장면만 추가해도 훨씬 밀도 있는 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추측이다.
분량과 내용을 따져볼 때, 을현이 다시 “고민 상담 게시판”에 들어가 자극을 찾는 결말은 적절하다. 이 소설은 결말을 닫을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사탄의 악을 능가한 인간의 죄는 어디까지 교묘하고 철저해질 것인가. 악의 연대기가 끝날 수 있을 리 없다. 남의 글로 악을 학습하고 타인의 고통을 몇 줄 게시물로 만들어 시시덕거리는 사람들은 오늘도 악마와 계약하는 중이다. 공감과 연대의 부재를 보며 박수치는, 까마귀머리의 악마 가빈의 복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악마는 인간에게 기생하고 그들의 악으로 살아간다.
악의 집합체인 사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이 믿는 모든 초월적 존재는 실상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신화도 언어처럼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신화는 과거보다 친숙하다. 이상적이고 고고하던 영적 존재들은 점점 인간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그들도 직장이 있으며 실직할지도 모른다는 지야 작가의 독특한 상상은 그야말로 현시대에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추상적인 공포의 대상이던 악마는 이제 인간을 보며 고개를 내젓고, 두 손 두 발을 들며 항복한다. 야, 우리 실직했다. 다 같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과장 사탄을 보며 씁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어떤 금기의 선을 넘어 버렸다. 인생의 쓴맛을 곱씹는 사탄의 주위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더욱 어리석어지는 인간들이 보인다. 무차별 실직 앞에 놓인 사탄에게 물러날 곳은 없다. 그들은 복직을 꿈꾼다. 악마보다 사악한 인간들을 통해.
언젠가 정교한 까마귀 모자를 쓴 사람이 슬쩍 다가와 명함을 내민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자.
사탄으로부터?
아니, 우리의 악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