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드물게 존재했던 태평성대에 대한 기록을 읽다 보면 이따금 그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시기 평화와 안녕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으며 또한 누구의 것이었을까. 같은 땅을 밟고 살아가면서도 태평성대에서 당연하게 배제되어야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기술 세계의 끄트머리에 편입된 존재로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편의에 어떤 식으로든 물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안녕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익숙한 이데올로기는 누구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복무하는가. 모든 개체가 완전하게 행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러한 의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우선순위가 한 세계의 윤리관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시절에 무심코 행해지던 관습을 오늘의 기준에 비추어 재검토하려는 시도는 모두 그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죠.
「외자혈손전(外者血孫傳)」은 시대극의 배경을 조선 후기로 설정하고, 시작부터 『홍길동전』의 서두를 인용함으로써 메시지의 초점을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하더라’는 『홍길동전』의 무심한 글귀는, 평범한 이들을 사회가 정한 테두리의 바깥으로 몰아내던 불의한 시대를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요. 「외자혈손전(外者血孫傳)」 역시 그러한 시대적 문제의식을 이어가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무명無名’입니다. 주인공에게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전략은, 역사 속에 실존했으나 어떤 무신경한 관습에 의해 손쉽게 지워진 이들을 상징하는 맥락에서 각별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 ‘외자外者’라는 라벨을 추가로 각인시킵니다. 즉, 「외자혈손전」의 주인공은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 공동체 안에 안정적으로 속할 수도 없는 외로운 처지인 것이죠. 이렇듯 극단적으로 고립된 인물을 통해 이야기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무명의 아버지는 가진 것 많은 양반 가문의 대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대감은 어느 모로 보나 죽어 마땅한 인물인데, 그럼에도 그를 죽이는 역할을 딸에게 부여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악인이라도 제 딸의 손에 죽음을 맞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치밀한 서사가 필요할 겁니다. 「외자혈손전」은 대감을 시대의 불의를 적극적으로 이행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형상화함으로써 결말에 필요한 설득력을 단계적으로 갖추어 나갑니다.
대감이 행하는 악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약자를 억압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지요. 이 둘은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동시대 사회의 비극적 단면을 드러냅니다. 대감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먼지 같은 인물인데, 알다시피 이는 지나간 과거의 일만은 아니니까요. 자신과 다른 존재를 대하는 인간의 모습에는 때때로 소름 끼칠 정도로 가볍고 잔인한 구석이 있습니다.
대감에게 있어서 무명은 집 안에 있어도 어차피 바깥사람입니다. 혼인으로 가문에 최대한의 이익을 안겨주면 되는 도구에 불과하죠. 무명 또한 자신이 날 때부터 객식구 취급을 받고, 고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글공부를 할 수 없고, 원치 않는 혼인에 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남성이 만든 경계의 바깥에서 그들의 규칙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여성의 자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가 바로 피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얼굴입니다. 이는 가부장 세계의 이면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통해 전해져 온 한의 정서이기도 하지요.
윤곽이 드러난 잘못은 바로잡혀야 합니다. 무명의 태도는 점차 균열을 일으키는 저항으로 바뀌어 갑니다. 불의를 자각한 무명은 혼례 전날 밤 자신에게만 들려오는 의문의 목소리를 따라 밤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산 중턱에서 만난 뱀을 통해 모든 불의의 실체가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지요. 대감은 무명의 어머니를 죽인 인물이었고, 이는 물론 남성 중심 세계의 민낯을 상징적으로 폭로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대감의 권세는 오로지 여성을 착취하고 끝내 희생시키는 폭력적인 구조 위에서만 가능한 기만이었던 것이죠.
그런 대감이 무명의 손에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결말입니다. 이 작품을 한 편의 복수극으로 읽는다면, 피해자(또는 그의 혈손)가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 외에 다른 결말은 생각할 수 없어요. 또한 그것은 공고한 남성 기득권이 불의를 자각한 여성에 의해 전복되는 결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외자혈손전」은 잘 짜인 복수극이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에 관한 탁월한 은유이기도 하지요. 여기에 고풍스러운 스토리텔링과 특유의 장르적 색채가 더해지면서 굉장히 몰입도 높은 서사가 완성됩니다.
이야기는 『홍길동전』을 한 번 더 인용하며 막을 내립니다. 태평한 나라에서, 있어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문제 하나가 마침내 바로잡혔음을 암시하는 인용입니다. 이러한 역설적 관점에 따르면, 태평성대란 불의를 외면하는 태도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착시 현상일 수 있습니다. 착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무사와 안녕이 누군가의 지속적인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