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첫머리. 주인공은 자신의 일기장을 본다. 생에 불현듯 닥쳐온 어마어마한 일을 맞닥뜨린 날 그녀의 일기장에는 색에 관한 이야기만 가득하다.
난 정말로 모든 사람이 색의 농도와 채도를 다르게 보고 있다고 믿어.
처음엔 좀 의아했다. 왜 이렇게 시작할까? 그러다 색을 ‘사건, 일, 행위’로 바꾸자 조금은 이해하기 쉬웠다. 모든 사람에게, 어떤 ‘일’은 저마다 다른 깊이와 무게로 보일 수 있겠구나 하고.
글에서 ‘사건’ 또는 ‘일’은 크게 3가지가 나온다.
첫째, 주인공 남편이 회사의 죄를 홀로 덮어쓰는 것
둘째, 주인공 아들의 명문 중학교 입학
셋째, 주인공 아들의 자살
이 세가지 사건은 다양한 농도와 채도를 가진 색으로 표상된다. 첫 사건의 경우, 누군가에겐 회사 지침을 어기고 일을 대충 처리한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람의 경미한 범죄로 보인다. 누군가에겐 자기 커리어를 위한 한건 기사거리고, 누군가에겐 회사 이미지를 위해 희생양을 찾아 덮어 씌워야 할 골칫거리 일이며 또 누군가에겐, 자식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두번째 사건은 어떠한가. 부모에겐 자신들의 뭔가를 희생해서라도 마련한 희망이었으되, 자식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세번째는 특히 가슴아픈데, 누군가에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자 아픔이고 한이 될 일이, 누군가에겐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일환이고 누군가에겐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게 하는 번거로운 위험거리다. 그리고 대다수에겐 관심없고 알 필요 없는 범상한 일이다. 당사자의 아픔과 나머지의 인식은 그 간격이 너무나 아득하고 멀어서 도무지 접점이 없어 보이고, 때문에 그들의 공감받지 못함, 이해받지 못함은 더욱 절절하고 슬프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 인식의 ‘다름’을 한탄하는 그녀 자신은 어떠했나? 그녀는 아들의 인식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대부분의 많은 부모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자신과 아들이 다른 존재임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와 남편은 ‘자신들의’ 컴플렉스와 열등감을 아들에게 투사해 아들도 ‘자기들과’같은 아픔을 겪을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그리고 그 아픔을 대물리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다. 정작 자신들은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기에 짐작도 할 수 없을 어떤 또 다른 힘듦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아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아이는 그곳에서 어땠을까? 주인공의 입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아이의 마음을 엿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상상해 본다. 한창 자존감이 외줄타듯 위태로운 시기. 또래들의 시선과 평가 하나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 십상인 시기에 아이는 그곳에서 극단적 이질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그들과 다르다는 자각. 거기에서 오는 고립감과 단절감. 아마도 부모를 향했을 원망과 죄책감, 또래들을 향했을 질투와 미움 등을 아이는 뭉뚱그려 ‘악마’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악마를 끊어내려는, 여리고 미약했을 아이가 처음엔 외부로 드러냈던 탈출의 욕망은, 결국 제게로 향하고 만다.
그녀의 비극은 결국 거기 있지 않았을까? 아들과는 너무도 다른 색으로 인식했던 학교 생활. 그로인해 그녀와 남편 역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전혀 다른 색으로 보는 사람들 틈에 방치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서로를 부여잡고 우는 마지막을 읽으며 생각한다. 서로의 색이 다르다는 것은, 너와 내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은, 서로가 닿을 수 없는 고립된 존재라는 것은, 얼마나 쓸쓸하고 힘들고 외로운 일인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