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가 된다. 또한 부모에게도 아이는 새로운 하나의 세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관계는 아이와 부모가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서로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는 ‘을’의 입장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보통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서는 어린 자식이 ‘을’의 입장에 선다. 장성한 자식이야 성인이니 스스로 앞가림도 할 수 있겠지만 미성년 자식, 특히나 어린 아이일 경우에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생존과 성장에 관한 모든 걸 의지해야하기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도 갑을관계가 성립된다고 본다. 혈연일 경우에도 이럴진대 핏줄로 연결되어있지 않다면 과연 아이는 어떤 심정일까.
‘나’는 입양된 아이였고, 이후 성장해 가정을 꾸린 후에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딸 혜은이를 입양한다. ‘나’와 혜은이의 공통점은 둘 다 입양된 아이라는 것과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각고의 노력 끝에 임신을 하게 되자, ‘나’는 수양딸 혜은이한테서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
“세상에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절대 못 버리는 법이란다.”
‘나’의 엄마가 언젠가 들려주었던 한 마디. 엄마의 입을 빌려 가장 역설적으로 ‘나’의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문장이 아니었을까.
결국 ‘나’는 뜨거운 물을 엎질러 친자를 유산하도록 유도하면서 엄마를 버렸고, 본인이 입양한 수양딸 혜은이를 찔러 죽임으로써 자식을 버렸다.
혈연이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 엄마 밑에서 자라면서 받았던 사랑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걸까. 자신과 핏줄로 이어진 것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인 걸까. ‘나’와 혜은이를 보면 뻐꾸기가 생각난다. 다른 새의 둥지에 탁란을 해서 크는 뻐꾸기. 부모의 친자식은 치워버리고 자기 혼자 모든 걸 욕심껏 독차지해서 크는 뻐꾸기.
‘나’는 죽어서 과연 누구를 만났을지 궁금하다. 먼저 보낸 아기일까 아니면 제 손으로 죽인 혜은이일까. 누구를 만났든 ‘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