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있어 SF는 매력적인 장르다. 그것은 과학적 사고가 제공하는 생경한 통찰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서술하고, 일상의 무미건조한 색채를 이방의 빛과 향기로 덧씌우는 비술이다. 체세포를 구멍 뚫린 푸실리fusilli1로 만들어버리는 태양 복사를 맞으며 곡예 비행을 하는 이야기는 독자를 전율케 한다. 그러면서도 양자 사이에 얽힌 기묘한 인연이 거리와 시간을 뛰어넘어 메시지를 전할 때, 우리는 어떤 장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낭만을 느낀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SF에 사용된 소재가 아무리 멀고 공상적인 것이어도, 그 안에서 전개되는 테마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깝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점 때문에, SF의 작품성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작가의 역량에 크게 좌우된다.
앞선 발언에 뜨끔했을 창작자들에게 한 가지 위로의 말을 하자면, 다행히 우리는 상상력의 부재나 소재의 고갈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금시대의 문필가들이 사는 세계는 공상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터무니없고 이상하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권위자들이 쌓은 제반 연구를 자신의 이름으로 팔기 위해 약 1500마리의 동물을 희생한 E.M이 “사고 상황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 전기차”와 “252조 주가 손실”의 주인공이라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기술에 대한 눈부신 낭만과 맹목적인 적개심이 공존했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삽입물이 유발하는 신경 손상이나 접착제 누출, 또는 사용자가 면역 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조용히 사후지원을 중단하는 기업 등의 문제를 우려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도 치명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볼 수 있는 환경을 누리고 있다. 그에 비하면, 중성자별과 블랙홀의 랑데부는 그저 머나먼 왕국의 왈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번 리뷰의 주인공, 적사각 작가의 SF소설 《우리의 밤》은 필자에게 어떤 작품이었을까?
본작은 “스레드”라 불리는 BCI 임플란트가 상용화된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스레드라는 명칭은 실을 의미하는 단어 thread를 연상케 하는데, 이 단어는 “인터넷상에서 특정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일련의 투고(글타래)”를 지칭하기도 한다.2 그러한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스레드는 단순히 뇌와 컴퓨터 간의 정보 교환을 중계하는 걸 넘어 타인과의 소통까지 가능한 기술이다. 과연 ‘인연의 끈’이나 ‘인터넷 포럼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매력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스레드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한국 독자들에게 있어 매우 친숙한 영역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통역,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리고 노동 환경 등 ― 모두 현대인의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는 일상적 요소들이다. 여기에 “쓴 한약” 같은 관용적인 표현이나 ‘대학 합격을 조건으로 수술을 약속 받는’ 익숙한 풍경이 더해져 스레드는 더욱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 이처럼 ‘일상을 변주하는’ 전략은 현명한 것인데, 익숙한 개념은 작은 차이로도 신선함을 유발하고 주목을 받으며, 그러한 범주에서 처리되는 동안은 낯설거나 전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3이다.
이외에도 스레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단어의 활용 또한 주목할만하다. “니들 스레드”나 “안테나”는 각각 형태/기능 유사성을 통해 이해를 보조하며, 스레드의 오칭인 “시레기”는 ‘쓰레기’를 의미하는 방언으로써 스레드에 대한 인물의 태도를 함축한다. 작중의 개념을 제시함에 있어, 본작은 사회 관습적 언어 체계langue가 지니는 신속하고 직관적인 성질을 슬기롭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범적인 기법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우리의 밤》을 읽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는 상술했듯이 개별적인 표현이나 단어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화자의 특성과 작품의 전달 방식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우는 신조dogma가 강한 서술자로, 이는 화자가 전달하고 비호하는 테제These를 독자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경험과 관점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는 편이므로, 독자는 화자의 신조와 명제를 빈번히 검토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지우는 화자로서 여과되지 않은 견해까지 노출해야 하므로, 경험의 한계와 사고의 미성숙함을 관찰자로부터 공격 받는 위치에 있다. 이는 그녀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만들고, 잠재된 모순의 빙산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 독자가 안티테제Antithese의 독해를 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사고 언어로 대화하면 지치지 않는다.”는 추측은 “사고 언어로 대화하는 데는 숙달이 필요하다.”는 지우 자신의 진술과 모순되며, 니들 스레드의 성능을 설명할 때 예시로 든 뇌 반응 영상4은 오히려 사고 자체가 자원을 요구하는 활동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감정 전달에 대한 지우의 인식은 피상적이기 때문에 청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명제로 남게 된다. 특히 공감에 대한 그녀의 관점은 평범한 청소년의 생각으로 보기 힘든 내용으로, 원죄가 소거된 인간이나 전조작기의 자기중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무모한 믿음이다.
그리고 일련의 비판을 거친 독자는 화자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최종적으로는 작품에 내재된 결점이나 공백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필자의 경우, [①귀 뒤쪽(후두엽 근방)에서 접근해 삽입하는 임플란트가 어떻게 청각피질과 연결될 것인가 ②’본다’는 의식 경험은 슬상선조경로를 통해야 하는데 망막위상을 토대로 하지 않는 정보를 이 경로에 어떻게 개입시킬 것인가 ③해마는 장기기억 생성에는 결정적이지만 작업기억에는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쪽에 삽입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④정서와 공감은 편도체나 거울 뉴런을 통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과는 어떻게 연계를 할 것인가] 같은 작품에 대한 몰입을 저해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떨쳐낼 수 없었다. 이는 핍진성의 부족을 시사하며, 텍스트가 보유한 논지와 수사법이 ‘매력적이지‘ 않을 때 ― 독자가 작품 내부에 발을 들이기를 거부하고 외부 세계에 머무를 때 생기는 현상이다.
본작은 특정 문화권에 소속된 독자들이 근접성을 느낄만한 수사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난독을 유발하는 속도검사의 문제 지문처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본작은 텍스트의 사막과 같은 상태이다. 확정적이고 견고한 텍스트가 석영의 바다처럼 펼쳐진 세계 ― 그런 설명의 메마른 지평 속에 감히 발을 들일 여행자는 많지 않다. 문예는 정합성을 위한 글이 아니고, 작품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은 지능적이되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때문에 독자는 논지가 분명하면 반발하고, 인물이 작가의 목소리로 말하면 어색함을 느낀다. 작품이 무언가를 밝히려 할수록 독자의 지성은 상상의 부재로 목이 마르고, 끝내는 탈진하여 여정을 중단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우리의 밤》을 읽으며 느낀 인상의 요약이다.
본작은 많지는 않으나 분명하게 보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며, 필자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언5하고자 한다.
1.작가는 등장인물을 통제하는 인형사puppeteer가 될 수 없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작가는 “좋은” 인형사가 아니다. 인물은 작가의 외현 의식이 암묵 기억에 내재된 원형prototype과 소통한 결과물이며, 작가는 인물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들을 ‘외부 시각’에서 통제할 수 없다. 오히려 작가의 역할은 인물이라는 이름의 인형marionette에 얼굴과 복식을 부여하는 제작자maker에 가깝다.
인물은 작가의 내적 경험과 사회 문화적 영향의 반영이고, 풍경만을 구성하는 얼굴 없는 인물을 제외하면, 주요 인물들은 이미 그 자체로 작가의 사상과 언어를 표출하는 존재다. 만약 그런 인위적인 존재들이 작품의 대주제를 성령의 음성6처럼 읊게 된다면, 독자의 흥미는 각성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2.고전적인 의미의 주제란, 교향곡의 일정 악절마다 반복되는 고유의 표현처럼 작품 내에서 반복하고 암시하는 ‘무언가’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은 명제일 수도, 분위기일 수도, 또는 여러 추측의 모호한 군집일 수도 있으나, 아무튼 어떤 형태로든 작품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현대 창작 패러다임에 적용할 수 없으며, 현재는 역설적으로 광고 소구를 개발하는 전통적 모형에 그치고 있다.
금세기의 작가들은 주제가 언제·어디서·어떻게 보이는지, 또는 보이지 않는지 같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작가는 주제를 첫 문장부터 탕아처럼 쫓아내고, 어떤 이는 12라운드에 내리꽂는 마지막 오른손처럼 결정타로 사용하며, 혹자는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아무것도 주지 않고 능청스럽게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독자는 여전히 그런 작품들을 즐겁게 읽고, 그들만의 새로운 주제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3.거칠게 말해, 모범적인 한 개 문단은 읽는 이를 사로잡을 마법 같은 문장 하나와 그 마법적인 언어가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도록 받쳐주는 나머지 문장들로 이루어 진다.7 그리고 이 말의 진의는 문학 작품이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데 있다.
필자는 위에서 핍진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핍진성은 텍스트의 신뢰성과 개연성에 대해 독자가 설득되는 정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설득”은 ― 아무리 위대한 문호라 하여도 평생 붙잡을 수 없는 ― 작품의 무모순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적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 그것이 다소 공백이나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 ‘아름다운 길’을 향해 기꺼이 발걸음을 옮긴다. 즉, 문학적 텍스트는 맹점을 줄이고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닌, “매력적인 부분 밖에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독자를 설득한다.
여기 이곳 ― 또 다른 텍스트의 사막8에 순례를 온 독자를 위해, 여행자가 낯선 지평으로 발을 들이게 하는 비술을 남긴다.
작품 속 세계는 정해진 것들로 설명되는 게 아닌, 가능성을 바탕으로 설득되고 이해된다. 우리는 첨예한 논리를 바탕으로 삶을 영유하거나 세계를 이해하지 않는다. 개연적이고 가능한 것이야말로 어림법heuristics을 사용하는 동물이 가지는 세계관이다. 논리의 첨점은 찰나의 순간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안개와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모호한 형식에 불과하다. 마치 신기루처럼, 형상을 바탕으로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그것의 실존은 멀어진다.
외지인이 홀로 베두인을 찾으려면, 신기루를 향해 걸어가기보다는 베두인의 우물에서 주인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9 마찬가지로 정보의 광야에 독자가 발을 들이게 하려면, 그의 목마른 지성을 달래 줄 우물을 파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우물은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울수록 깊고 풍부하다. 즉, 중심 텍스트가 형성하는 의미의 층은 우물의 바닥이 아닌 벽이다. 오직 빛이 닿지 않는 음습한 곳에서만 이슬이 마르지 않고, 의식할 수 없는 영역만이 무의식을 활발히 자극한다. 현명한 작가라면, 바닥을 드러낸 우물 바닥에 동방 박사와 베들레헴의 별 모자이크를 그리기보다는, 흐르는 상상력과 서늘한 통찰이 독자의 깊은 의식에 맺히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필자의 미흡한 견해가 작가에게 해가 되거나 본작의 장점을 가리지 않기를 바란다. 과학적 공상에 현실성과 일상적 텍스트를 접목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밤》은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과제가 아님을 ― 단서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성 작품에서는 용례를 찾기 힘든 일상적 텍스트를 어울리게 구사하는 점은 놀랍기까지 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의미작용signification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SF 장르를 원하는 풍토에서 꽃피우려는 과감한 시도’에 주목하고 싶다. 어쩌면 적사각 작가에게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처럼 한 문화권의 텍스트를 살찌우는 장래가 약속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평가의 무대에 발을 내디딘 용기 있는 자에게, 영감의 우기monsoon가 찾아와 마르지 않는 창작의 오아시스를 남기길 필자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