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더 잔혹하다. 때때로 현실이 더 잔인하듯이.
이 이야기가 그렇다. 흔히들 팩트폭행이라고 하는 것처럼. 정말 어느 지방지 귀퉁이에 조차 실리지 못할 것 같은 단촐한 사고사 이야기는, 과장된 감정이나 지나친 교조적 태도 없이 건조하고 무덤덤하게 사실을 전달하지만 그 사실성으로 인해 깊숙하게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한 소년이 있다. 지름길로 학교에 가고 싶었던 소년은 결국 죽는다. 그 작다면 작을, 소박한 욕망 때문에.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보면 사정은 조금 복잡해진다. 소년의 욕망은 왜 문제가 되었나? 그가 금지된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금지 되었나? 소년과 그들은 같은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질적 존재인 소년이 그 집단 만의 것을 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얘기는 넣어두자.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크게 3집단으로 나뉘고, 각 집단은 ‘집’으로 대표된다. 신축고급아파트, 임대아파트, 다세대주택. 각각의 집은 그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소년은, 다세대 주택- 그 중에서도 반지하-에 거주한다. 이 거주지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소년은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공부도 못하며 말썽꾸러기다. 소년의 교실 속 사회적 위치도 그의 거주지와 별반 차이 없어보인다.
그러나 소년은 다소 무모하고 담대하다. 그래서 높은 곳을 향해 거침없이 오른다. 소년의 그런 태도에는 상층부를 향한 도약의 욕망이 느껴진다. 안주하지 않는 아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 어쩌면 이 아이는, 가능성이 희박할지언정, 반지하를 탈출해 신축아파트 탑층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집단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존 집단은 외부 집단을 철저히 배척한다. ‘그들이 내 집단 고유의 아비투스를 훼손하며 오염시킬지도 모른다. 혹은 내 집단이 저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사회적 지위가 추락할지 모른다.’ 그러한 공포는 자연스럽게 타집단에 대한 혐오와 편견, 배척을 부른다. 안돼, 너희는 여기 올 수 없어.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만의 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금지된 것을 원했고, 몰래 그곳에 들어갔으며, 결국 죽었다.
아이의 죽음은 무엇 때문인가? 금지된 것을 욕망한 그 자신의 무모함? 기본적 보육조차 할 능력이 없으면서 무턱대고 자식을 낳은 그 부모의 무책임과 무지? 굳게 문을 닫아걸고 외부인의 침입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의 단호한 배타성?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소년에게는, 하늘을 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