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집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2년간 버튼이 닳도록 눌러온 여섯 자리 번호를 잊어버리다니.. 어쩔 수 없이 가족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올리고서야 겨우 기억이 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집에 식구들은 아무도 없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핸드폰 메시지가 울린다. 말도 없이 외박을 하냐는 누나의 문자였다. 그런데 나는 내 방에서 자고 일어나 아직 거실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결국 가족들은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카페로 모였고, 모두가 전날 밤 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아무도 서로를 보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 건가?
기이한 의문은 다같이 집에 들어가면서 밝혀진다. 현관문을 열고 먼저 들어 가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입구는 같은데, 내부로 들어가면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평행 우주가 집에서 펼쳐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갖은 대출을 짊어지고 장만한 집을 이사 갈 수는 없었다. 그때 누나가 말한다. 어차피 집에 있는 시간도 다르고, 겹쳐도 딱히 같이 뭔가를 하는 건 아니니 이대로 살아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렇게 필요한 말은 카톡으로 하거나, 카페에서 만나서 하고, 집에서는 마주하지 못하고 각자 생활을 하는 기묘한 일상이 시작된다.
사실 현대인들에게 같은 집에 살면서 생활은 공유하지 않는 가족의 풍경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설정은 평행 우주라는 개념을 집 안이라는 한정된 세계로 가져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 속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양자역학의 다중우주 이론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SF 작품이야 기존에도 많이 있어 왔지만,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관이 아니라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나날을 그려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이 작품 속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나, 놀라운 서스펜스 혹은 대단원의 클라이막스 같은 게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재미있다.
‘말도 안 되고, 믿기지도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면서, 결국 ‘나’의 공간과 다른 식구들과의 공간간의 접점이 사라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이 위기 의식을 느낀다거나, 당황하지 않는 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지금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지금껏 내가 살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에라이 모르겠다 밥이나 먹어야지, 라고 할 수 있는 시니컬함 말이다.
만약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나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수히 많은 세계’, 즉 다중 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취하거나 취하지 않은 모든 선택과 나에게 영향을 끼친 타인들의 행동 같은 요소가 여러 평행 세계에 사는 수많은 ‘나’를 만들어 냈다면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다중우주에 대한 가능성은 이렇게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두 세계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또다른 나라는 대상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은 평행 세계라는 공간 자체에 중심을 두고, 여러 개의 세계선을 하나의 집, 그 속의 4인 가족에게 제한을 두고 적용해서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고 있다. 그래서 다른 식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내 앞에 펼쳐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작품에서 그려지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언젠가 확장판으로 그 뒤의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