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명절이 다가오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주 원인은 바로 명절동안 발생하는 가족 간의 갈등. 시어머니가 며느리만 부려먹는다던지 예비 시댁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시누이에게 면박을 듣고 왔다던지하는 일은 이젠 너무 흔해서 기삿거리조차 되지 못할 정도다. 갈등이 오죽 심하면 친족 간에 칼부림까지 했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보일까.
명절동안 속을 끓인 것을 어딘가에 하소연은 하고 싶은데,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털어놓자니 제 얼굴이 침뱉는 꼴이라 어디 말하기 부끄러울 때 자주 동원되는 수단이 바로 인터넷 커뮤니티다.
쓰니1도 명절동안 시달린 피해자 중 하나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었지만 상관없다던 시집은 어디로 갔을까. 언니라고 부르라던 시누이는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해 ‘썅년’이라는 막말을 쓰니에게 퍼붓는다. 사람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시어머니, 막말과 ‘빙썅2‘짓을 섞어가며 사람을 인격적으로 깔아뭉개는 시누이, 그리고 중간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스란히 아내가 피해를 입게 만드는 무능력한 남편까지. ‘시’자가 붙은 건 시금치라도 보기 싫다며 치를 떨던 어르신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확 와닿지 않은가? 심지어 시집은 고아였던 쓰니보다도 경제력이 형편없어 결혼할 때 쓰니가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했다. 쓰니가 시집살이 스트레스로 피부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돌변하는 꼬락서니란. ‘시집살이 개집살이’라는 민요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건 나만 그런게 아닐 것이다.
마지막 단물까지 쪽쪽 다 빨아먹겠다는 몰염치한 심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아내와 딸과 아들이 창피했던 것인지, 당하기만 하는 며느리가 안타까웠던 것인지.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꿈에 등장해 쓰니에게 복권 당첨이라는 대박을 내려주고 간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후로 쓰니와 나눈 대화가 참 인상깊었다.
“넌 왜 등신처럼 말을 못하고 꾹꾹 담아서 그 지경으로 곯냐?”
“아버님 가족이 저를 못살게 하는 거예요. 제가 등신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나쁜 거 아니에요?”
“나쁘지. 천벌 받는다. 곧 죽을 나에게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앞으로 오래 같이 살아갈 사람에게 잘못한 벌을 받는다. 천벌을 받는다. 너는 그날만 기다려라.”
그렇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죽은 사람은 이제 곁에 없고,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누가 더 중요하겠나.
“진짜 천벌은 이런 거다. 네가 혼자서 더 잘 사는 걸 보는 거.”
“그런데 가족한테 이러셔도 되는 거예요?”
“죽고 나서 음식 해놓고 절하면 뭐하냐? 아예 다른 차원에 있는 내가 그걸 받을 방법이 있나? 있으면 그게 바로 신이지. 자기들 마음 편하려고 산 사람 괴롭히는 짓만 하는데 행여 신이 본들 이뻐하겠어?”
살아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어차피 제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기리는 절차일 뿐인데 상에 올라가는 음식 가짓수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인가.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 두어 가지만 간소하게 올리고 고인을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본질에 맞지 않을까?
소설 분류가 판타지로 되어 있길래 극중에서 초현실적인 요소가 나오나 싶었는데, 복권당첨이라는 결말이 판타지라 그렇게 분류를 선택했다는 작가님의 말을 보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저런 시집에 시달리다가 돈도 없이 이혼하는 여자들이 수두룩한 게 현실인 것을. 이 소설의 결말이 판타지라면 판타지지만 카타르시스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해준다. 대리만족이라는 말이 괜히 유행하는게 아니거든.
이혼을 통해 거지같은 시집에서 탈출한 쓰니는 이제 기운차게 제 2의 인생을 개척할 일만 남았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시집에서 도망가 하고픈 걸 하며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