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은 그 안에 적혀 있던 글씨를 잊어버려도, 우리는 잊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말로?
그런 세계, 혹은 이런 시대에 문학이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 문장은 제가 <책들은 잊어버려도>에 남겼던 단문응원입니다. 생각해보면 꼭 문학에 한정 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예술을 무미건조하게 따지면, 결국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부속품 중에 가장 하찮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치나 경제는 사회의 형식과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학문입니다. 각종 자연과학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며, 앞으로 필요하게 될 여러 기술의 바탕이 됩니다. 인문과학 중에서 역사는 그나마 계속 반추해야 하는 과거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중요도가 높을 것이고요. 철학은, 어쨌든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타이틀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앞서 말한 것들이 다 챙겼다는 전제하에 챙길만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문학은? 앞의 여러 학문, 인간사회의 다른 부속품들에 비하면 중요도가 한참 떨어집니다. 당장 없다고 사회가 붕괴하거나,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소설은 허구입니다. 유교 문명권에서 ‘허구의 사건을 다루는 산문문학’을 ‘소설(小說, 작은 이야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상의 여러 중요한 사실들에 비해 하찮고 쓸데없으며 사문난적과 괴력난신에 가까운 이야기라 보았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얀 분류표에 담긴 분류 미상, 혹은 문학 서적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당연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서 글자가 사라지는 이 원인불명의 역병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복원작업을 하는 사서들도 이런 책들을 매우 귀찮아합니다. 문학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도서를 복원하던 사서들도 설 자리를 잃습니다. 도서관은 병이 퍼지면서 아예 폐관되었습니다. 승현은 쓰고는 있었지만 들춰본 지가 오래였던 소설을 잃었고, 최 부장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시한부 병증으로 삶을 잃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서라는 직업에 원래 주어진 업무는 본작의 인물들이 하는 복원작업과 비슷합니다. 단순히 장서의 대출과 반납만 하는 게 아닙니다. 장서의 적절한 분류와 큐레이션, 장서 보존과 훼손된 장서의 복원, 도서관의 행사 기획 및 운영, 그리고 도서 정보의 이용과 제공에 관한 연구까지 본래 사서의 업무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대출과 반납, 신착도서 분류만 하기에도 너무 바쁜 탓에 다른 업무는 등한시되기도 하는 게 현실이고요.
이 작품 내외의 맥락을 살피면,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등한시되지만 소중한 것’을 잃어갔다는 공통점이 나옵니다.
작품 속 인간들은 책을, 정확히는 문자 언어를 잃었습니다. 이는 문자 독해력이 떨어지고 있는 현실의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MZ세대’ 같은 용어를 쓰면서 재앙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작품 속 인간들은 문학을 등한시합니다. 현실의 문학이나 예술도 AI가 대체할 수 있는 시점에서, 조금씩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예술계열로 취직할 것이 아닌 이상, 당장의 취업이나 자격증 시험에 예술적 소양은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작품 속 사서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개개인으로는 저마다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현실의 사서들도 당장 눈앞에 놓인 업무 때문에, 문헌 정보의 연구자로서의 과업을 멀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서의 업무가 상당수 대체되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묻습니다.
“그런 세계, 혹은 이런 시대에 문학에 가치란 있습니까?”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소멸을 사유하는 생물인 한, 잊고 살아가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도 그 중 하나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원래 우리가 읽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요. 중요한 건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고 이어 나가려는 의지 아니겠습니까.
위 내용은 사선님께서 제 단문응원에 남겨주신 답문입니다. 저는 이 중에서 마지막 문장에 집중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으려는 노력과 이어 나가려는 의지. 저는 이 말이 예술의 계보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 중에는 이름만 알려진 채 전해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주석서나 다른 문헌에서의 언급으로 대략적인 내용이 같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고, 아예 제목만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목도 남겨지지 않은 채 과거에 잊힌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작품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략적인 내용이나 제목만 가지고, 심지어는 실존하는지도 알 수 없는 과거의 작품들마저도 현대에 가져와 새로움 작품으로 만듭니다. 등한시된 것,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건 발굴일 수도 있고, 재발견일 수도 있고, 변형과 활용일 수도 있습니다.
문자 독해력이 우세했던 세대에서 영상 독해력이 우세한 세대가 주를 이루게 되는 것은 재앙이 아닙니다. 그저 사회 변화에 따른 변형과 활용입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쓸데없다며 등한시되기 일쑤고, AI가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고는 있지만 상관없습니다. 사선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언젠가 마음의 갈증을 느껴 그동안 뒤로 했던 예술작품을 발굴해 감상합니다. 그걸 만든 게 꼭 인간이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창작자 입장에서야 AI가 위험한 경쟁자지만, 향유자 입장에선 그렇지 않죠. 게다가 인간이 만들든, AI를 시키든 이러한 낭비 자체가 인간사회의 증거입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사서의 수는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로 대출과 반납, 큐레이션 업무를 대체합니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장서의 분류는 인간 사서 고유의 몫입니다. 오히려 업무 중 일부에서 해방됨으로써 그동안 잘 살피지 않았던 업무를 재발견해, 도서관 행사 운영과 문헌 정보 연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등한시한다고 해서, 잃어버렸다고 해서, 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가치도 있습니다. 결국 승현은, 그리고 지민은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쓰는 족족 사라질 문자언어로 구성된,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구의 이야기를. 그런데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의 마지막 행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신들이 예술을 통해 세계를 창조한 세계관을 구상한 적이 있습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예술가 신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멸망에 가까워지자, 세계 속의 사람들은 예술을 금기로 정했습니다.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가증스러운 신들을 부정하기 위해. 그리고 멸망이 가까운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상황에서, 예술은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예술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그래도 예술의 가치를 되새기고 멸망을 막아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당시의 저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덮어놓고 있었습니다. 사선님의 작품 <책들은 잊어버려도>를 읽고 곱씹으면서, 저는 그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술은 서로를 이어 나갑니다. 우리가 가끔 잊어버릴 정도로 당연한 진리를, 사선님께서 짚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작품을 써주신 사선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