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김이현, 퍼리: 가면 밑 문장들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여전히 인간이 되기에는 멀었다 (작가: 헤이나, 작품정보)
리뷰어: 글 쓰는 빗물, 22년 9월, 조회 126

단수 명사지만 늘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1인칭 대명사, ‘나’입니다.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사람의 자아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른 자아를 꺼냅니다. 심리학자 융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자아라는 개념이지요. 근래 이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창작자들이 자신의 캐릭터나 배우 혹은 작품을 통해 대변하는 자아를 지칭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그때 원하는 ‘퍼 슈트’를 갈아입고 매번 다른 퍼리 캐릭터를 화자 삼는 시인, <여전히 인간이 되기에는 멀었다>의 주인공 김이현이 그러하듯이요.

 

김이현은 작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독특한 세계 안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때 말하는 주체는 김이현이나 김이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작품은 ‘퍼리 팬덤’이라는 서브컬쳐를 활용해 이 모순의 흥미로움을 극대화합니다. 퍼리 팬덤이란 수인 캐릭터를 페르소나 삼아 다양한 활동을 하는 집단을 지칭합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자아를 투영했으나 본인과는 다른 가죽을 걸친 캐릭터들을 사회적 자아 삼아 역할극을 하고 그림을 그려 소통합니다. 그곳에서 김이현이 맡은 역할은 고양이나 용의 형상을 한 시인입니다. 동시에 그는 문단 안에서 ‘퍼리 시인’입니다. 양쪽 모두에서 그는 독특하고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이지요. 김이현은 이렇듯 중첩되고 대비되는 페르소나들을 마음껏 교체하며 내면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놓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절필을 선언합니다. 소설은 인터뷰이의 시점으로 그 까닭을 톺아가는 과정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언론, 네티즌, 문인… 여러 이름으로 존재하는 ‘독자’입니다.

 

김이현은 ‘이제는 말들에 지쳤고 더 말할 힘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작가로서 그리고 퍼리 팬덤의 구성원으로서 시라는 매체를 통해 수없는 말을 해왔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말을 읽어냅니다. 여기엔 종종 오독이 자주 곡해가 그리고 언제나 무서울 만큼 정확한 해석이 존재하지요. 작가로서 그는 찬양과 비난에 직면합니다. 그게 그를 소진되게 하고요. 퍼리 팬덤의 일부 사람들은 그의 글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2차 창작물을 생산하고 소비합니다. 김이현은 이를 마냥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에로티시즘이 담긴 퍼리 문학을 내놓습니다. 그 순간 그에겐 비수가 날아와 꽂힙니다. ‘너에겐 모순이 있다.’ 자신의 팬인 인터뷰이 앞에서 김이현은 이 문장을 담담히 인정합니다. 당연합니다. 매번 갈아입는 슈트만큼 다양한 김이현이 김이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김이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실이 김이현을 김이현일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절필을 택합니다.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상 인물의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가 아주 익숙합니다. 퍼리 캐릭터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작가가 연예인이 그리고 개인이 여러 필명과 역할로 살아갑니다. sns의 발달은 세계에 연결과 단절이라는 모순된 선물을 안겨주었듯, 자아들을 파편화하고 전시하는 일을 쉽게 만드는 동시에 이렇게 흩어진 타자의 자아를 그러모아 한 사람으로 짜 맞추는 일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모순적이며 단일한 작가이고, 타자의 모순을 집요하게 읽어낼 수 있는 독자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기이한 풍경에 직면합니다. 잠깐 빌려 입었던 고양이 탈과 털옷이 진짜 내 몸을 잠식하는 것과 같은 장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중요한 것은 본질이 아니라 이미지입니다. 네이버 웹툰 <미쳐 날뛰는 생활툰>의 초판에는 일상툰을 연재하다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매장된 만화가가 ‘필명과 그림체를 바꾸면 돼. 기억하자, 중요한 건 실제가 아니라 이미지야.’라고 되뇌는 컷이 있습니다. 섬뜩하지요. 그것이 그가 삶을 ‘회복’하려는 순간이라는 점에서요. 웹툰 주인공이 기워내고 닦고 빛내려 하는 삶은 단단히 발 디딘 현실이 아니라 잡히지 않고 희뿌연 액정 속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자신의 모순보다 남의 모순이 잘 보이는 것 역시 인간이란 존재의 모순인 것을요. 다만 <미쳐 날뛰는 생활툰>처럼 메타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웹툰의 주인공과는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팬이 보는 앞에서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고, 탈과 장갑을 벗어 불태웁니다. 그 과정은 모두 영상으로 기록되며 공개될 것입니다. 그가 퍼리 캐릭터를 이용해 시를 쓴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또 다른 자신인 캐릭터가 성폭력을 당할 때 쓴소리를 한 것은요? 그러면서 에로틱한 시를 쓴 것은 어떤가요. 적어도 저는, 그리고 그의 시를 모두 읽은 소설 속 화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퍼 슈트를 불태우고 펜을 꺾는 그의 모습은 쓸쓸함 너머의 무언가를 품고 있습니다. 소설 말미에 나오는 편지에서 그는 친구인 독자들에게 말합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멀쩡한 모습으로, 기왕이면 우리가 우리 되는 세계에서’ 만나자고요. 여전히 인간이 되기에는 멀었다고요.

 

그러니 문장의 끝에 이르면 독자는 상상하게 됩니다. 퍼리 시를 쓰는 ‘혜성처럼 등장한 괴물’로서의 페르소나를 잠시 내려놓은 그가 여전히 다채로운 이야기의 저자이자 독자로서 살아갈 모습을요. 페르소나란 기본적으로 사회심리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단어이나, 여기엔 온전하고 통합된 신의 존재 양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이렇게 설명됩니다. ‘지혜와 자유의사를 갖는 독립된 인격적 실체. 삼위일체론에 이용되는 개념으로, 신의 존재 양식을 뜻한다.’ 우리는 인간이되, 여전히 인간이 되려면 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인간이 되어갑니다. 갈라지고 모순된 자아를 모두 끌어안은 채 우뚝 서, 타자의 모든 시를 온전히 읽어내고자 하면서요. 김이현은 어떤 면에서 조금 더 서둘러 그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사람이 되려면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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