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힐링 괴담. 감상

대상작품: 괴담과 사람들 – 101가지 이야기 (작가: Q씨,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7월 29일, 조회 39

※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러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하위 컨텐츠들을 포괄합니다. Q씨님의 소설 「괴담과 사람들 – 101가지 이야기」는 그중에서 괴담 엽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괴담의 내용들은 당대의 사회상의 점근축을 통한 투영일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보 과잉의 시대 현대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문득 지나쳐버린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은 짧은 엽편의 특성을 살려 기이한 이야기로 내용을 전개해나갑니다. 여기서 특징적이게도, 작가님의 말씀처럼 힐링적인(?)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작가님의 말씀을 하나 더 인용하자면 결말은 있지만 결론은 없는 괴담의 특징을 차치하고서도 독특합니다. 이 힐링의 성질은 기이함이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내지만 곧바로 수복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균열이 설사 실질적인 위험으로 현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현실의 실체를 갖게 되어 기이함과 분리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14화입니다. 여자친구가 실신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되나, 그 행각을 벌인 것은 고등학생 다섯 명으로 밝혀집니다. 그리고 그 곁가지에서 손전등을 든 기이한 무언가는 유유히 사라질 뿐입니다. 이렇듯 ‘Q씨’님의 소설 「괴담과 사람들 – 101가지 이야기」가 기이한 것들 뿐만 아닌 귀신 괴담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힐링적일 수 있는 것은 이 귀신들이 공존이라기보다는 유리된 채 있는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막차 퇴근처럼 자신을 죽여달라며 알 수 없는 죽음의 영역에 걸친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갈매기의 복수처럼 실제로 상해를 입은 경우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서로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 영역이 다소 겹칠 때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실수였던 것 마냥 이내 항상성처럼 서로의 영역이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러프하게 말하자면 소설에서 죽음은 산자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이 기이함은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장소에 무언가 존재할 때, 혹은 무언가 있어야만 할 때 발생합니다. ‘Q씨’님의 소설 「괴담과 사람들 – 101가지 이야기」에서 ‘무언가는’ 항상 현실의 저편에서 존재하며 부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곳에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기이함과 닮았습니다.

호러를 감상하는 감각은 흥분전이이론(excitation transfer theory) 또는 서스펜스 즐거움 모델(model of suspense enjoyment)을 통해 안전한 스릴로써 쥬이상스를 느끼고 즐기는 것으로 짧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러의 공간과 우리의 현실은 분리되는 경향을 가집니다. 설사 호러의 공간이 우리의 현실 속에 자리잡는다고 하더라도, 컨텐츠가 끝난 순간 우리는 호러의 비일상과 분리되어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도시전설은 혹시나 하는 의구심을 통해 공포를 확장합니다. 현대적 괴담은 장소성과 사실성이 공존하며 실제적 상황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호한 분리 속에서 우리는 공포가 끝난 현실을 의심하게 됩니다. 소문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는 괴담이 거짓인 것을 알아도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어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괴담은 익명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그들이 익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존재’들을 찾아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일상이 우리가 타파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립하게 된다면 그것은 향유의 영역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기에 익명이라는 대안은 위험함의 층위를 모호함 속으로 끌어 내려 이들의 존재를 기이함의 영역에 두고자 하는 층위의 전복입니다.

이 전복을 통해 괴담은 ‘너’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된 순간 이야기는 ‘나’는 누군가에게 전달하게 되는 매개가 되며 ‘나’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괴담은 무수한 ‘나’의 이야기입니다. ‘Q씨’님의 소설 「괴담과 사람들 – 101가지 이야기」는 그 축소판으로써 하나의 공간에서 담화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치환되며 테마를 구성합니다. 토도로프가 주창한 그것은 초자연적인 인물의 존재와 그들이 인간의 운명에 끼치는 영향력을 다룬 범-결정론(Pan-determonism)의 주제가 해당합니다다.초현실적인 것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섬뜩하게도 이야기 속에서 내가 마주친 것들은 ‘무언가’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스쳐지나가는 알 수 없는 ‘무언가’일 뿐입니다. 알 수 없다라는 속성은 인간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서사적 공백으로 인한 불쾌감을 야기시킵니다. 이런 불확정성의 경험은 소설이 가진 ‘현실과 긴밀하다는 속성’과 맞물리며 ‘우리의 현실에서’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소설은 우리의 현실의 층위와 소설 내 비현실의 층위를 설정하면서 그사이에 망설임을 유발시킵니다. 소설 내에서도 그것을 인지하는 듯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온 삶의 경험에 맞춰, 그 기이함을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중략)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면 믿음과 의심 사이 그 어딘가에서 배회하는 수밖에 없다.” 

독자는 망설임을 유예하지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망설임을 유예하도록 만드는 것은 작품의 역할입니다. 이 부분이 도드라지는 것은 100화 허수아비입니다. 말하는 허수아비와 대화하다가 미쳐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는, 쥐라는 요사스러운 동물을 제시함으로써 주술적인 맥락에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동시에 농약이라는 소재를 통해 병들어가면서 마주치게 된 환각이라는 맥락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타당해 보이며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하나를 선택한다면 다른 하나는 소거해야 합니다. 이 과정의 끝에서 만약 독자가 현실의 법칙에 타격을 입히지 않고도 묘사된 현상을 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 작품은 다른 장르, 즉 기이 장르에 속합니다. 그와 반대로, 만약 독자가 그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가정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그 작품은 경이 장르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질문을 달리한다면 어떨까요. 귀신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죽음의 이후를 믿고 있나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배회하며 우리는 죽음 자체를 어려워합니다. 그렇지만 소설은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깊숙한 곳에 존재한다고. 그저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그저 그뿐이라고.

 

 

+ 초고의 오류를 찾고 조언을 주신 브리시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감사를 표하려 짧게 남깁니다.

+ 초고를 검토해주신 어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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