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모두 죄수 공모(감상) 공모채택

대상작품: 판 옵티콘(Pan Opticon) (작가: 존 페리, 작품정보)
리뷰어: 냉동쌀, 6월 17일, 조회 19

판옵티콘, 혹은 파놉티콘은 벤담의 저서이자, 거기서 소개되는 감옥의 한 형태입니다. 벤담은 우리에게 고전적 공리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공리주의란 다시 근대적 쾌락주의로서, 가장 많은 쾌락을 생산할 수 있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쾌락주의라고 하면 방탕하거나 퇴폐적인,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쾌락이라는 단어를 행복이라고 치환해보면 어떨까요? 가장 많은 행복을 산출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이다,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가 됩니다. 행복이 좀 더 정신적인 개념처럼 느껴진다면, 더 많은 공익을 산출하는 행위라고 이해해도 되겠지요. Utilitarianism을 직역한다면 유용성주의, 그러니까 더 유용한 행위가 더 도덕적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이때 벤담은 쾌락의 반대되는 요소를 고통으로 정의하였고, 쾌락을 증가시키는 것도 중요한 동시에 사회 전체적인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고통을 줄이고 쾌락은 증진시키는 것. 유용성은 높이고 비실용성은 낮추는 것. 공리주의는 바로 효율성을 중시한 사상이라고 일단은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러한 공리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벤담이 고안한 감옥이 바로 파놉티콘입니다. 이 감옥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커다란 원 안의 중심에 작은 원이 위치해 있는데, 커다란 원의 내벽이 바로 죄수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고, 작은 원은 간수들이 기거하는 감시탑입니다. 또한 죄수의 방은 언제나 불이 켜져 있고, 반대로 간수의 방은 항상 어두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죠.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지만, 간수는 언제 어디서나 죄수를 감시할 수 있습니다.

죄수는 간수가 언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모르므로 스스로 일탈 행위를 억제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가 계속될수록 간수의 업무는 줄어들겠죠. 결과적으로 환경의 감시 하에 최소한의 간수로 최대한의 죄수를 감시하는, 극도로 효율적인 이상적인 형태의 감옥이 완성됩니다.

파놉티콘에 사는 죄수들은 심적 부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어느 때도 맘 편하게 있을 개인적인 공간을 제공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언제 어디서 누가 자신을 감시하는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감시를 받게 되니, 파놉티콘에 수감되는 건 참 불쾌하고 끔찍한 일이었지 싶네요.

그런데 죄수를 감시하고 있는 간수는 어떨까요? 어두운 방안에 앉아서, 몇 안 되는 동료와, 혹은 혼자서, 좁은 감시탑에 앉아 넓은 감옥을 들여다 보며 수많은 죄수를 감시하는 그 간수는 어떨까요? 벤담은 프랑스 왕국의 의회에 서신을 보내 파놉티콘을 건설하고자 했고, 실제로 의회에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듬해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완공된 파놉티콘에서 간수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본인이 열정적으로, 임금도 받지 않겠다며 자원했거든요.

물론 벤담이 파놉티콘의 간수 자리를 원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공리주의 사상을 실증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상당히 편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바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벤담 본인이 그렇게 되도록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벤담이 정말로 그 간수 자리가 마냥 편한 자리라고만 생각했다면, 과연 벤담의 생각대로 그 자리를 맘 편히 의자에 앉아 죄수를 둘러보고 감시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자리였을까요? 그것은 이 소설의 줄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

사실 지구와 외계 행성의 관계는, 파놉티콘이라는 비유와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는 간수가 아니고, 외계종은 죄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파놉티콘은 감옥이라는 개념보다 불안에 의한 스스로의 감시, 인간 대 인간이 아닌 환경이라는 거대한 개념의 압도적인 감시라는 개념을 비유할 때 더 자주 쓰이곤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개념이 아닌, 파놉티콘의 간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거대한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오직 인류뿐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일까요? 그런데 만약 저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중력의 구속을 받지 않고 인류보다 한없이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보아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존재일까요?

우리나라의 교정직 공무원은 때때로 죄수로부터 ‘사실상 함께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 파놉티콘의 간수도, 물론 죄수에게 그런 조롱을 들을 리는 없겠지만, 아마 같은 느낌이 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의 미카엘 박사도 정확히 같은 상황에 놓였을 것이고요. 지구와 닿을 리 없는 외계 행성의 생명체가 미카엘 박사를 조롱했을 리는 없겠지만, 아마 박사 스스로는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검은 태양은 그 자체로 거대한 감옥이자, 우리로 하여금 저 우주 밖 다른 이들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끔찍한 저주일세.

인류가 가진 외로움이라는 속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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