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푸른색 숨결을 내뱉지 않는다 공모(감상)

대상작품: 푸른 신명(神命) (작가: 장아미, 작품정보)
리뷰어: 새벽마라, 5월 12일, 조회 46

 (경고: 높은 수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7페이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술술 읽히는 글입니다. 담담하고도 평이한 문체가 거슬림 없이 줄글을 넘기게 하면서도, 입을 다문 채 눈빛으로 말하는 예언자의 기록 같은 느낌이라 글 전체적으로 서늘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작품 자체의 감상에 앞서, 이 정도의 문체를 보여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먼저 감탄하게 되네요. 문체의 평가는 지극히 취향의 영역이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저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소설 내의 시간적 배경은 중기에서 후기의 조선으로 보입니다. “오라버니”와 범연 노인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표현으로 유추하면 경신 대기근을 염두에 두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경신 대기근이 1670년부터 1671년까지 있었던 재난임을 고려하면 안경의 존재도 그리 어색하진 않습니다. 안경이 처음 조선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16세기 말엽이고, 당장 3년 후에 즉위하는 숙종 또한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다만 아직 왕도 쓴 적 없는 안경을 자녀에게 구해다 줄만큼 권세 있는 집안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것치고 작중에 등장하는 “오라버니”의 태도는 상당히 급진적입니다. 권세 있는 집안의 적장자이면서 가산을 처분하고 산 속으로 숨어드는 선택 하며, 흙 만지는 농부들의 말을 모아 책으로 남기려는 지식에 대한 개방적 면모도 그렇고. 여종 분이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부친에게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니까요. 효의 나라 조선에서 그리 일반적인 인물상은 아니겠죠.

사실 17세기 말의 조선보다는 현대적 가치관에 보다 부합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본다면, 서술자인 주인공이 관찰할 대상으로서의 편의성을 좀 더 고려한 인물 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평이한 호러 소설의 플롯으로 보았습니다. 대기근에 이어 역병을 정통으로 맞고, 가세가 기운데다가 현실에 환멸을 느낀 “오라버니”의 주도로 가솔들과 마을의 주민 몇은 밤이 이슥한 사이 마을을 떠납니다. 그 이후, 산 속을 뒤지다가 마을을 꾸릴만한 땅을 찾아내는 것이 이 소설의 전반부 요약입니다. 물론 이 산 속에는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구전이 얽혀있고, “오라버니”는 이를 당연히 무시하죠. 소설의 후반부는 이 경고를 무시한 “오라버니”와 가솔들에게 닥친 재앙에 대한 내용을 기술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흥미롭게 읽은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이 소설의 주동 인물인 “오라버니”가 빠르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불안해하는 범연 노인에게 면박을 주던 “오라버니”가, 노파의 분신焚身을 보며 신적 존재에 대한 불안을 주워섬기는 태도는 조금 신선했거든요. 이게 단순히 “오라버니”라는 캐릭터의 현명함 때문일지, 아니면 그저 불안감을 조성하는 역할조차 맡아버린 역할 포화일지는 모르겠지만요.

만약 이 부분을 일부러 클리셰를 비틀겠다는 생각으로 구상하셨다면 그 도전에 고개를 끄덕여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라버니” 같은 캐릭터는 보다 완고한 느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인물의 결말은 주로 주변의 불안 어린 경고를 무시하다가, 자책 어린 중얼거림과 함께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보편적이죠. 제 취향이 잔뜩 묻은 방향이기도 하고요.

다만 그 결정에 합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건 아마 범연 노인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안해하는 “오라버니”와 역할을 바꿔 산 속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범연 노인을 처음 읽을 때는 그저 그의 보수성이 이미 산 속 마을에 터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이미 그때 범연 노인은 신을 목격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을 목격해 본연의 현명함을 잃어버린 범연 노인과 “오라버니”를 대조하고 싶으셨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불안해하는 여론을 범연 노인이 코웃음치는 장면으로 이을 수 있지 않을지….

음, 그. 작가님?

쓰다가 든 생각인데, 설마 이 시점에서 분신하는 노파를 보고도 불안해 할 여론이 없었던 건 아니겠죠? 이 시점에서 이미 “오라버니” 외의 인간은 모두. 뭐, 그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부분만큼은 진심으로 감탄하게 됩니다.

 

이어서 두 번째 포인트는, 깊은 겨울날 어느샌가 안경에 의지하지 않게 되는 주인공입니다. 사실 이 연출을 읽었을 때 반가움과 함께 그리움이 들었습니다. 2002년에 개봉했던 <스파이더맨>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잖아요. 거미에 물린 피터 파커가 능력을 얻으면서 안경을 벗는 장면 말입니다. 스파이더맨과 경아 모두 외부의 것이 내부로 혼입되며 변이를 겪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히어로 영화의 연출을 호러 소설에서, 그것도 정반대 방향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쓰였다는 점에서 발상의 유연함이 돋보였습니다.

 

다만 마지막 포인트에서만큼은,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를 찍게 됩니다. 주인공 경아는 대체 언제 잠식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결국 풀리지 않아서요. 어쩌면 제가 놓치고 있는 포인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아의 첫 번째 접촉은 “오라버니”가 찾아 헤매던 마을터에 도달해서 꿈을 꾼 순간입니다. 소설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그 장면에서 경아는 처음으로 산에 자리잡은 “그것”과 접촉했고, 때로는 덩굴손으로. 때로는 꽃으로 나타나는 “그것”을 마주하면서 천천히 잠식되어 가죠. 작품 내의 주민들에게는 안타깝지만, 독자로서는 경아의 변모를 천천히 짚어나가는 맛이 있었습니다.

꿈 이후 경아는 죽기 직전의 소년에게서 희열을 읽어냅니다. 자신이 그 쪽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굳이 나무가 쓰러지는 숲속으로 걸어들어간 그 소년 말입니다. 어쩌면 소년이 나무를 피하지 못하도록 묶은 것처럼 묘사된 덩굴손은 그저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아가 잠식 끝에 시력을 되찾았듯, 덩굴손이 소년을 휘감아 죽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잠식으로 미쳐 죽고자 한 소년에게 덩굴손이 다가간 것이라는. 이렇게 해석한다면 과한 해석일까요?

그 외에도 경아의 변모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은 많습니다. 멧돼지의 생간 맛을 묘사하는 대목은 숫제 노골적이죠. 밑의 인용문을 그저 남매간의 우애로 이해했다가, “오라버니”는 과연 잠식되었는지 아닌지 숨 속의 풀 내음을 맡는 중이 아니었겠느냐는 가설을 생각한 순간에는 확실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조리하지 않은 돼지 간에서는 풀과 과실, 맑디맑은 계곡물의 맛이 났다.

나는 잠시간 그의 숨 냄새를 맡았다.

다만 앞선 빌드업을 무너뜨리는 구간은, 바로 노파의 분신입니다. 이 구간에서 제 시선을 끈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안 돼. 오라버니. 오라버니.”

( . . . )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젖은 눈을 부릅떴다.

소년이 죽을 때는 받아들였던 눈 가림의 배려를 노파의 죽음에 이르러 부정하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연출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약 소설이 이곳에서 끝난 후, 2편을 준비중이셨다면 전 아마 주인공이 잠식에 굴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직후, 의미 있어보이는 연출과 결연한 의지의 서술을 뒤로한 채 경아는 “오라버니”에게 본인의 잠식을 폭로합니다. 인간적으로 살고 싶었다는, 조선 대의 그것보다도 21세기적 가치관에 맞닿은 “오라버니”의 절규를 비웃으면서 말입니다.

 

제가 소설 관련 학과의 전공자는 아닙니다만, 기억하고 있는 작법 이론 중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시던 교수님이 계신 걸로 기억합니다. “스릴러는 오이디푸스이고, 호러는 무고한 카산드라이다.”

둘 모두 위험에 노출된 주인공을 그리고 있으나 스릴러의 긴장은 자신 또한 가해자일 수 있음의, 무고한 피해자만은 아니었음의 충격과 반전에서 오고. 호러의 공포는 금기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도무지 들어먹지 않는 주변의 행태에 도매금으로 묶여나갈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온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모든 소설이 이론 위에 쓰여야 하는 것은 아니죠. 그럼에도, 익숙치 않은 이론까지 들먹여야 했을 정도로 경아의 변모는 급작스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노파의 죽음이 방아쇠였다고 한다면, 왜 그 노파여야 했는가? 왜 소년은 아니었는가? 소설을 기승전결로 나눠야 한다면 전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할 노파의 분신 파트에서, 자기 혼자 기승결과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씀드리면 이 당혹감이 전달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죽은 노파나 그 불꽃이 무엇의 상징이었다면 달리 유의미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상징이 무엇인지 이해해는 데 실패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았겠느냐, 하는 질문에는 사실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기가 어렵네요. 서술자를 잠식과 변모의 대상으로 선정한 건 물론 영리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변모의 조짐을 드러내놓기엔 반전성이 약화되니까요. 그렇다고 한 번 꺾은 다음 진행하자니, 지금같은 한계가 느껴지고요.

그럼에도 문체에서 느껴지는 내공에 미루어, 분명 앞으로 더 좋은 소설을 써 주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평가의 말을 얹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소소한 사견이나마 앞으로의 창작에 보탬이 되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적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그리고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년 5월의 새벽.

과제를 뒤로 한 채. 어느 학부의 대학생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