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빠짐없이 죽었고 필연적으로 죽는다. 종으로서의 인간뿐 아니라 생명체 모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느슨하게 확대하면 모든 종이 매 시간 끝을 향해 달리고 있으며 그 끝에는 멸종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도시도, 나라도, 지구도, 끝내 우주도 언젠가는 에너지가 다해 죽으리라는 사실은 암묵적으로, 예외없이 생명체에게 공유되는 전제다. 인간을 비롯한 유기체는 종말론적인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명의 발달 이래 이 행성의 끝을 예언한 사람이 수도 없었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생명의 주기적인 속성을 고려한다면 탄생은 예상이 가능하지만 죽음은 예측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죽음을 예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연히 중첩된 불길한 상황과 그에 잇따른 재난은 일종의 미신이 되기 마련이다. 어느 날에 사람이 대거 죽었고, 그 날과 비슷한 다른 날에 또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 그날과 유사한 상황에 놓일 또다른 날에도 많은 죽음이 발생할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별똥별이 떨어지거나, 어느 별과 어느 별이 일직선에 놓이거나, 어느 새가 울거나, 기이한 동물이 나타나거나. 하나의 현상과 죽음이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믿음. 그것이 현실에 결부될 때,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확대될 때, 샤머니즘적 종말론이 탄생한다. 어쩌면 종말론의 시작은 작은 불길함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인류와 지구는 몇 번을 죽을 뻔했으나 용케 지금까지 살아있다.
과학과 이성이 세상을 장악했다는 시기를 지나며 이런 미신적 종말론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머지않아 재미와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가는 종말론의 소멸이 도래할까. 과학은 첨단으로 발전했고 이제는 지구 밖의 위협을, 정말 모든 생명을 쓸어버릴 만한 재앙을 그것이 다가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예측할 수 있다. 이 행성을 삼킬 만큼 큰 재난이 아니라면 미래의 위험에 대비할 수단 또한 미약하나마 갖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심성이 있는 몇몇 인류는 (심지어) 어지간한 재난에 견딜 수 있는 대피소를 만들어 놓았으며 생존자를 위한 식량이나 작물을 영구 보존하고 있다. 이쯤되면 드디어 인류가 종말을 정복했다고 낙관해볼 만하지 않을까. 질병이 있다면 치료하고, 소행성이 날아온다면 격추하고, 지구 내외부의 위협에는 어느 정도의 방어 태세를 취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말 괜찮다 말할 수 있을까.
유사 이래 가장 안전하다고 해야 마땅한 지금,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그대로 우리 사회는 매우 위험하고 날카롭다. 지금, 천천히, 인간 공동체 내부에서 위협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다르다고 서로를 멀리하고, 내가 만들어둔 안전지대에 네가 들어오면 안 되고, 나의 식량은 너에게 제공할 수 없다. 이런 마음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종말로 인류 전체를 이끌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안전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위험한 시대. 미처 싹을 자를 새도 없이 세상을 뒤덮어버린 이 위협적인 줄기를 우리는 이기심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망해도 싸니까
오메르타 작가의 소설 〈살려줄 이유가 있는가〉의 배경은 종말’론’이 아니라 실제 종말이다. 머지 않아 운석이 지구에 떨어질 것이고, 그것은 인류의 존속에 문제가 될 만한 피해를 이 행성에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 중대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에티오피아 아다마대학교의 ‘살레’ 교수였다는 게 문제였을까. 누구도 이 예언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종말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살레 교수의 짐작은 빗나간다. 이 실수로 인해 살레 교수는 ‘안살레요’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이슈와 밈으로 돌아가는 인터넷 세상에서 그의 몰락은 웃음거리였다. 작가는 가상 세계의 무서운 파급력과 발빠르게 돌아가는 유행의 법칙을 소설의 초반에 활용해 살레 교수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만든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의 흥미거리가 되지만, 신뢰성을 잃은 지 오래다.
이렇게 한바탕 종말의 공포와 그에 따른 허무함이 세계를 휩쓸었을 무렵, 살레 교수의 나라인 에티오피아와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두려움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지수는 보험사에 근무한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파는 직업이다”라는 소설의 강렬한 첫 문장이 말해주듯 이 소설의 주인공 지수는 보험사의 직원이다.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험 상품에는 양면성이 있다. 미래의 사고 확률을 경제적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보험의 특성상 해당 직업 종사자들은 가입자의 두려움을 통해 재화를 벌어들이는 사람들로 해석되곤 한다. 재난과 공포,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은 다수의 이야기에서 실제 재난에 매우 무감하게 그려진다. 때문에 그들은 종종 진짜 재해의 상황에서 가장 잔인하게 묘사된다. 누구의 피해에도 동조하지 않았고, 그것을 발생시키지도 않았지만, 타인의 고통(또는 그 고통이 발생할 가능성)이 그들에게는 재화로 바뀌어 돌아가기 때문이다.1
남의 두려움을 통해 수입을 얻는 보험회사에서 지수에게 닥친 사건은 살레 교수와의 접촉이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살레 교수는 지수의 주머니에 usb를 집어넣는다. 그것으로 지수는 인류에게 다시 재앙이 닥칠 것임을 안내받는다. 이후 서서히 살레 교수의 말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단계적으로 살레 교수의 말이 신뢰성을 회복하고사실화되는 과정은 그가 단지 한 번의 실수로 삶이 왜곡된 비운이 과학자였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에티오피아의 한 과학자가 뒤늦게 명성과 믿음을 얻을 즈음 역설적으로 그의 나라는 가장 큰 위험에 놓인다.
혜성이 순간적인 ‘다이어트’에 성공해 “아프리카만 날아간다는” 사실을 파악했지만,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이 “자기들 나라에는 충돌의 피해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살레 교수 개인에게 향했던 놀림과 왜곡된 관심은 소설의 중반부에서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으로 확대된다. 위태로운 아프리카를 향한 철저한 무관심은 살레 교수가 매장될 때 뜨거웠던 사람들의 반응과는 완전히 다르다. 살레 교수>에티오피아>아프리카로 점차 확대되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독자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의 정체성에 가해지는 세계인의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목격할 수 있다.“트위터 중독자로 유명한 미국 대통령”의 등장은 소설 속 세태를 단적으로 풍자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어렵지 않게 미국의 전직 대통령 중 한 명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혜성의 충돌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이 곧 닥칠 것임에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나라들의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대변한다.
작가는 사회적 소수자로서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개인뿐 아니라 그가 속했던 사회 전체가 무관심 안에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설정하며 이것이 사회 전반의 문제임을 거시적으로 폭로한다. 그리고 다시 배율을 조절해 그 안에 놓인 개인의 미시적 입장을 살핀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작가의 능력은 세계와 개인을 보는 시야의 완급 조절이다. 크게 보아야 할 사건 안에 존재하는 작고 개별적인 시선을 다룰 때에는 문장과 장면 간의 흐름이 섬세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오메르타 작가는 이런 거시-미시의 배율 조절을 부드럽게 해나간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혀 다른 여러 나라의 인물을 끊임없이 교차하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에티오피아의 살레, 한국의 지수, 미국의 케이틀린, 콩고에 있는 케이틀린의 딸 엠마, 그녀를 도운 가이드 꼬마 라파엘과 그의 동생 이녜스, “잠비아를 위해 텍사스를 포기”할 수 없다는 트위터 중독자 미국 대통령.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이 짧은 단편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소설의 세계를 교란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독자의 시선 지평을 넓힌다.
이는 첫째, 작가가 이미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고, 둘째,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두 개의 입장 안에 깔끔하게 정리가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프리카를 구해야 한다는 당연한 입장과 구하지 않겠다는 기이한 입장의 충돌은 작가가 등장시킨 다양한 인물을 한데 모아 둘로 나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프리카는 어떻게 되었나
‘전세계의 무관심 속에 아프리카 대륙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런 결말을 택했다면, 소설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단편은 아주 평면적이지만 직관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직관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는 있었을지언정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아프리카 대륙’만’ 부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람을 남김 없이 죽이기로 한다. 그리고 인류의 종말을 극적으로 그리기 위해 두 가지 장치를 삽입한다. 그중 하나는 외부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아프리카 대륙 안에 남은 일말의 사랑과 연대의 모습이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이야 어떻든 콩고에서 연구 중이던 엠마는 라파엘과 이녜스를 통해 아프리카를 향한 위협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기 위해 보노보를 따르고 끝내 구조대를 맞이한다. 여기서 엠마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구조대를 따라가지 않고 보노보 무리와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엠마는 구조대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보노보의 연대를 본다. 보노보 무리는 “발이 느린 꼬맹이를 둘씩이나 달고” 온 엠마를 기다려주었고 위험에 처한 이녜스를 구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가 잃은 것은 온몸을 덮은 털만이 아니었다”. 작가가 단정적으로 적은 이 문장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엠마가 구조대를 따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연대를 잊은 인류는 멸망하기 딱 좋은 종족이다.
둘째로 작가는 아프리카’만’ 망가뜨리지 않는 대신 조금은 과장된 (그러나 모두가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모두를 서서히 죽인다. 엠마가 구조되지 못한 이후, 혜성이 달을 폭파하게 된 사건은 지구에 드라마틱하게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는 소설보다 훨씬 극적이고 순식간에 벌어질 일이지만) 이 안에서 결국 작가는 ‘살려둘 이유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질문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밝힌다. 그들은 ‘안살레요’를 조롱하던 사람들, 좀 더 크게 보자면 아프리카의 일을 남일처럼 여긴 사람들, 더 크게 보자면 아프리카를 외면한 여러 국가들, 가장 크게 보자면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전세계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내면에 스스로 만들어낸 ‘안살레요’가 있다. ‘안살레요’라는 명칭 안에는 그의 본래 이름인 ‘살레’가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이 멸칭은 그를 ‘안’이라는 부사어로 부정하고 있다. ‘안사요’라는 유행어를 가볍게 표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한 사람의 존재를 단숨에 무화하는 이 말에서 모든 독자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소설의 결말에서 독자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아프리카는 어떻게 되었나’가 아니다. ‘살려줄 이유가 없는’ 인류 전체가 직면한 종말의 형태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혜성이 달을 부순 게 자연현상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작가가 가공한 세계. 그 안에는 반드시 의도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마치며
우리의 마지막이 이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혜성이 ‘에라 더럽다’고 지구가 아닌 달로 향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 소설은 과학의 발전을 뒤로 하고 이타심과 화합을 잊은 우리에게 작가가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다. 살려둘 이유가 없는 우리 인류가 가장 빠르게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다. 차라리 털 달린 동물에서 진화하지 않았다면 이타심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회의감마저 들지만, 아직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인류애를 잃기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 종말을 예언하는 살레 교수는 우리의 주변에 있다.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들을 수용하지 않으면’, ‘당장 누군가를 위한 세상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망하리라고 벽에 소리치듯 외치는 자들의 소리가 발빠르게 퍼지고 있다. 당신과 내가 여기에 귀를 막고 있다면, ‘안살레요’라고 살레 교수를 조롱하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지구의 수명, 자연의 한계가, 인간의 이기심으로 끝나기까지의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나와 당신은 살아있고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살려줄 이유가 있는가’는 질문이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덮치기 전에, 우리가 살아날 가능성을 하나만 찾아보자. 주위를 둘러보고 ‘살레’의 진심을 마주하자. 그것이 거짓말처럼 보여도, 믿어지지 않아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아도 누군가에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걸 이해하자. 그리고 하루빨리 화합하자.
당당히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이 지구와 자연과 우주가 인류에게 다시금 기회를 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