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healing)’ 판타지의 반대말은 ‘딜링(dealing)’ 판타지일까?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고별 (작가: 이동건, 작품정보)
리뷰어: SewoL, 3월 20일, 조회 103

※주의!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 소설 시장에서 주류문학의 등쌀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판타지 장르가 택한 활로는 ‘힐링 판타지’였다. 힐링 판타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 사람은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떠올리면 단박에 이해가 될 것이다. 물론 힐링 판타지가 근래에 생겨난 신규 장르인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힐링 판타지는 종종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대표적인 예로는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 (2009)』 등을 들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존의 힐링 판타지는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었던 반면, 최근의 힐링 판타지는 성인을 대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고 자란 세대가 이제 성인이 됐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랄까.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는 작품들은 대개 공통된 전형성을 띠게 되는데, 힐링 판타지 역시 그렇다. 힐링 판타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째, 비현실적인 환상의 공간이 등장할 것. 둘 째, 환상의 공간의 생리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이 주인공일 것. 셋 째, 독자의 공감을 얻을 만한 현실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고민 상담자들이 등장할 것. 힐링 판타지란 결국 환상의 공간에 대해 알게 된 주인공이 고민 상담자들을 도와주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품고 있던 고민 역시 해소하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 장르이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그랬고, 『나미야잡화점의 기적』이 그랬고, 『위저드 베이커리』가 그랬다.

 

이동건 작가의 「고별」 역시 처음에는 이 같은 힐링 판타지의 전형을 띠는 전개를 보인다. 현실세계와 사후세계 사이의 공간인 ‘오두막’이 나오고, 주인공은 그 안에 머물며 오두막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손님들은 주인공에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술술 들려 주는데, 만일 그들에게 고민이 있고 주인공이 대화를 통해 그 고민을 해소해 주었다면 힐링 판타지의 구색에 들어맞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고별」은 이와 조금 다른 노선을 택한다. 「고별」은 ‘힐링’을 지향하지 않는다. 「고별」은 힐링을 가장하여 독자를 환상의 공간으로 초대한 뒤, 별다른 예고도 없이 매몰차게 현실 속 시궁창으로 내쫓는다. 소설이 묘사하는 환상의 공간이 지닌 따뜻하고 안락한 분위기만큼이나 포근하고 달달한 위로를 기대케 하며 전개되던 이야기는 주인공의 각성과 함께 별안간 매운맛으로 돌변한다. 얼얼해진 입안을 달래줄 뭔가를 기다리며 글을 읽어 내려가면 끝내 그 흔한 쿨피스 한 모금 내주지 않는 작가의 매정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무책임한 방임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기는 하지만, 잠시 곱씹어 보면 ‘역시 이게 현실이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뒷맛은 썩 개운치 않지만.

 

(스포일러 주의!!)

 

한겨울의 통나무 오두막 안에서 주인공은 차와 쿠키를 즐기고 있다. 옆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있고, 창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다. 우리가 이불 속에서 체험하는 것과 같은 안락함을 주인공도 느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속세의 모든 번뇌와 굴레로부터 벗어난 듯 보이는 그의 안정감은 자신이 현재 죽은 상태라는 인지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오두막을 천국 또는 지옥행이 결정되기 전에 머무는 곳쯤으로 여기고 있다. 오두막에는 저절로 리필되는 식재료 및 소모품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주인공은 정성스러운 요리와 차와 쿠키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한다. 처음 그가 오두막을 찾았을 때 그를 맞이해준 노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손님들은 그에게 생전에 겪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사랑하는 연인이자, 죽음의 직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본 얼굴의 주인이며, 가장 마지막으로 다퉜던 사람, ‘N’. 그는 언젠가 N이 오두막에 찾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를 보고 싶지만, 그녀가 되도록 늦게 오두막에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 N이 오두막을 찾았을 때,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던 많은 말 중 겨우 입밖에 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해” 단 한마디뿐이다. “고맙네” 그녀는 말한다. “이제 깨어나자.”

 

이어지는 이야기는 죽은 두 남녀가 환상의 공간에서 재회하여 생전에 겪었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게 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주인공은 사실 죽지 않았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그가 눈을 뜬 곳은 지옥보다 더한 현실이다. 현실에서 그는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하는 불구였고, 지난 몇 년간 그를 간병하던 N은 불어나는 병원비를 더 감당할 수 없었는지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밀린 병원비는 고스란히 빚이 되어 그의 앞에 쌓였다. 독자는 이쯤에서 작가가 주인공을 위해 마련해 뒀을 구원의 손길이 등장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동건 작가의 플롯에 그런 순한맛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불우한 현실 극복을 돕는 것은 그야말로 판타지이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기적적인 그의 불굴의 의지일 따름이다. 그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근실한 삶을 살며 빚을 갚아 나간다. 이제 독자는 고생하는 주인공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보상이 무엇일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플롯에 그런 단내 나는 설정 따위는 사치다. 작가가 준비해 둔 것은 되레 N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일 뿐이다.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주인공을 떠난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며 헤묵은 오해가 풀렸으니, 주인공의 앞날을 밝힐 광명의 전조가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섣불리 그런 감상에 젖기에는 주인공이 처한 현실이 너무도 각박하다. 그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며, 그러는 중에도 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세상의 편협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버는 족족 빚 탕감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노후를 위한 대비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며, 다니기 싫은 직장에 다녀야 하고 하루하루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한다. 이따금 찾아오는 N과 오두막을 향한 그리움도 치열한 현실 속에서는 점점 퇴색되기만 할 뿐이다.

 

“점차 오두막과 사랑했던 누군가의 기억은 흐물거렸다. 단지 오늘과 내일을 위해 일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꿈과 같았던 어떤 곳에 대한 과거. 그곳에 얽매여 있을 만한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주인공은 영겁의 시간 동안 망자들의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오두막을 지켜야 했지만, 정작 소설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소리이다. 말은 별도의 해석 과정을 요하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다. 소리는 직관적이다. 작품은 주인공이 요리하는 과정과 식사하는 모습을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바람결에 눈발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타닥타닥 장작불이 타고 있고, 요리가 불에 익고,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일종의 눈으로 듣는 ASMR이랄까?

 

우리는 시각, 청각과 같은 감각 정보로 현재를 지각한다. 차를 타고 가다 바다 냄새가 나면 실제로 보이지 않아도 근처에 바다가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VR기기를 착용하면 내가 현실세계에 있는지 가상세계에 있는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바쁘다 바빠 현대인에게 있어 자신의 현재 상황, 현실을 지각하기 위한 감각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들의 모든 지향점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취합하는 모든 정보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하고, 미래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일을 한다. ASMR은 당장 현재를 만족시킬 것이 없어, 청각 자극에라도 기대 보려는 현대인의 ‘속임약’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메시지를 현재에 집중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듯하다. 결코 풍족하다 말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주인공이지만, 과연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행복하다 말한 적 없지만, 스스로 불행하다 말한 적도 없다. 그는 다만 현재에 충실할 따름이다. 죽음의 위기를 겪고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 보내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늘을 산다. 데일 카네기는 ‘자기관리론’에서 말한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삶이다”. 우리가 제아무리 과거와 미래에 얽매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다만 하루를 살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죽기 전에 주마등의 형태로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된다고 한다. 과거를 돌이키기에 가장 좋은 시기가 생의 마감을 앞둔 시점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을 위해 작가는 외딴 소나무숲 너머에 통나무 오두막 한 채를 지어 놓았다. 망자들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진진해서 주인공의 배꼽은 물론 눈물 또한 쏙 빼놓는데, 정작 주인공이 기억나는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묶었을 때는 현실의 누구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다. 주인공의 말대로 과거에 “얽매여 있을 이유도 여유도” 없는 곳이 바로 현실, 그리고 현재이기 때문이리라.

 

예순이 넘어 마침내 제 삶을 다하게 된 주인공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오두막을 찾았을 때, 그를 맞이하는 것은 N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꼬마 아이다. 전에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라졌다. 과거를 돌아보고 온전히 추억에 잠길 기회는 현실에서 제 몫을 다한 망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다. 주인공이 오두막에 머무르던 숱한 세월 동안 망자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야 했던 것은 그가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차와 쿠키를 준비한 뒤 아이의 앞에 앉는다. 아이는 노인과 달리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으므로 돌이킬 과거보다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가 더 많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현실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 아이와 달리 N은 제 명을 살다 갔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주인공과 만나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녀에게 나름의 위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그녀를 사랑했고 평생을 잊지 못했던 주인공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그저 그의 삶을 살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그의 기적 같은 삶의 의지를 북돋은 것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N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마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깨어나지 않는 자신을 깨우기 위해 그녀가 대신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삶의 곳곳에는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기 힘든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그리고 그런 마법 같은 일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알아서 일어나지 않는다. 힐링 판타지의 문법이 대개 그러하듯 눈앞에 저절로 환상의 공간이 나타나 주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왕도는 없다. 다만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이쯤에서 제목에도 써먹은 “힐링 판타지의 반대말은 딜링 판타지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보자. 이 작품은 힐링 판타지의 전형을 따르지 않으면서, 힐링 판타지가 기능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현실의 매콤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독자는 아픈데, 작가는 상처에 연고도 발라주지 않는다. 「고별」은 상처를 치료하자고 뭘 바르고 붙이고 하기보다, 다만 그것이 덧나지 않는 선에서 자연 치유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당장 처방전을 써주지 않으니 혹자는 답답한 노릇이겠지만,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 뼈를 맞더라도, 아파하기만 할 게 아니라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은 무감각해지고, 보다 또렷하게 현실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이상, 누룽지맛 사탕의 탈을 쓴 계피맛 사탕 같은 소설, 이동건 작가의 「고별」 리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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