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과 이승, 사후세계에 관한 상상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완전히 죽은 후 며칠 만에 살아났다는 사례나 임사 체험으로 천국을 보았다는 사람들, 심지어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큰 수술을 받던 중 천국에서 신과 대화를 나누도 왔다는 아이의 증언도 있으니 정말 죽음 후의 삶이 있나 싶다가도, 그렇다면 왜 그들의 말이 조금씩 다른가에 대한 해답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 도리어 의심을 키운다. 요는 사후세계가 완전히 증명된 것도, 증명되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찜찜함을 그냥 두지 않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죽음 후의 삶을 자유롭게 그리기 시작했다. 이야기 안에서의 사후세계는 차이가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하고 신선할수록,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도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다. 생전의 크고 작은 죄가 사후에 평가받는다는 동양 지옥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 동명이인을 대신해 천국(굿플레이스)으로 ‘잘못’ 보내진 주인공의 삶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넷플릭스 드라마 《굿플레이스》는 이성이 지배한다고 평가받는 현대에도 여전히 사후세계가 널리 인기를 얻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의 경향에 따라 이런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을 넘어선, 일상과 흡사한 공간의 사후세계도 등장하는 추세라는 점이다. ‘사후’는 꼭 거대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Yes’라고 답하지는 않아도 좋다. 죽음은 작은 정거장과 같으며 이후에도 특별히 바뀌는 것 없이 저승에서 두 번째 삶을 산다면 그것도 나름의 운치가 있지 않을까. 중국 작가 마오우의 소설 『열여섯 밤의 주방』1은 이런 사후관의 유행을 반영하듯 작은 주방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지옥주방에서 일하는 맹파는 거창할 것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들의 요청에 따라 생전 먹었던 음식을 만든다. 이 소설의 본바탕은 중국 전통의 사후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작가는 공간의 극한 축소를 통해 지옥의 일상화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이 장편 시리즈는 온라인 연재 조회수 1억 뷰를 달성하며 국내에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위와 같은 맥락에 따라 이동건 작가의 소설 〈고별〉 또한 저승을 환상적으로 축소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죽음의 정거장은 어느 오두막집이다.
연인과 다툰 직후, 사후를 경험했다고 생각한 주인공 ‘나’는 지금 기묘한 오두막집에서 뜨거운 차를 내리는 중이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
작가는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의 입을 빌려 소설 안에 설정된 독특한 사후관을 밝힌다. 위에서 소개한 『열여섯 밤의 주방』과 마찬가지로 〈고별〉은 ‘오두막집’이라는 작고 평범한 공간을 내세운다. 한 가지 더, ‘나’가 있는 곳은 “사후세계 같은 곳”이며 동시에 “휴식처”이자 정거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 내 생각에는 나는 죽었다. 어느 특정 종교는 믿지 않지만 여기는 사후세계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죽기 직전에 잠시 들르는 휴식처 같은 곳이 이 오두막이라는 추정을 한다.”
‘나’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오두막집이 사후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그에게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이었으며, 연인인 N과의 이별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독자는 그곳이 사후세계가 확실하다는 점을 몇몇 단서로 파악할 수 있다. 오두막집에 찾아온 여러 사람 중 누군가는 “다른 나라의 사람이었지만 놀랍게도 말이 통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써내면 성경보다 많이 팔렸으리라고 장담하는 ‘나’의 목소리에는 근거 있는 호탕함마저 깃들어 있다. 그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풀려나가면 어떨까. 『열여섯 밤의 주방』과의 차별점이 있어야 하겠지만, 훌륭한 시리즈 소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나’에게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우리는 그의 스토리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나’는 사후인지 현실인지도 판단하지 못하던 이곳을 점점 죽음 이후의 세계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레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의 연인인 N 또한 오두막집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사랑은 죽음으로 갈라질 때 가장 슬프다. 사후세계를 배경 공간으로 선택한 만큼, 작가가 이 소설에 주인공의 애인을 등장시켰다는 점은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N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나’가 천국도 지옥도 가지 않은 중간지대에서 머무는 이유는 오직 N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은 반드시 그곳을 거쳐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다림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가 죽기 직전의 상황을 잠시 떠올려 보자. 그는 연인인 N과의 다툼을 마지막으로 그곳에 왔다. 둘은 잠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뒤로 하고 갈라서기 직전의 관계에 몰렸다. 사후세계에서 ‘나’는 N을 볼 수 없다는 그리움과 동시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극렬한 다툼 이후 갑작스레 발생한 이별은 셀 수 없는 갈래의 감정을 낳을 수 있다. 두려움, 그리움, 외로움, 후회, 분노, 절망. 그러나 ‘나’의 오두막집 생활은 그의 심리가 아닌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와 N의 싸움은 소설의 굵은 분기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자는 ‘나’와 N이 왜 싸우고 헤어졌는지 이 소설 안에서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둘이 생전에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그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 애정의 농도는 어떠했는지를 소설 안에서 거의 찾아낼 수 없다. 둘의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죽음 직전의 다툼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나’의 죽음에 훨씬 풍부한 의미를 실을 수 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에 이유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 싸움은 두 연인의 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정보를 내비쳐야 한다. 그와 동시에 오두막집의 재회 장면에서 ‘나’의 발화인 “사랑해”가 복잡다단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나’와 N의 관계가 이야기 내부에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나’와 N의 관계를 충분히 고민했다면,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등장하는 한 아이를 살펴보자. 이 꼬마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다. ‘나’는 N과의 재회 후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주어진 몫을 산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을 통해 자신이 젊은 시절 살았던 오두막집에 재차 방문한다. 그 안에는 한 꼬마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이가 내미는 사진 속에 있는 건 ‘나’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꼬마가 ‘나’의 반영인 인물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내민 사진은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사진뿐 아니라 ‘꼬마’라는 아이는 무엇을 은유하고 있을까. 어린 나이에 꼬마는 어째서 사후세계의 문턱에 서 있는 걸까. 꼬마와 N의 공통점은 독자의 머리에서 매력적인 질문을 무수히 만들어내지만 그 답을 끝내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마주 대하는 ‘나’의 행동에서도 약간의 어긋남이 느껴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N과 꼬마의 ‘전사(뒷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완벽한 한 사람의 인생을 글로 적을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N과 ‘나’, 꼬마와 ‘나’의 관계가 어떤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적어도 작가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신을 독자에게 이야기로 전달할 때, 각 인물의 행동에는 생동감 있는 인과가 부여되고 사실감이 더해질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인물의 전사에 다소의 아쉬움이 느껴짐에도 한 가지 의미가 구축되는 이유는 ‘나’가 다시 살아나서 남은 삶을 보내고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진행에 있다. 사후세계에 두 번 방문한 ‘나’에게는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두 번의 사후체험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나’의 첫 번째 죽음과 두 번째 죽음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죽음에서 오두막이 ‘기다리는’ 공간이었다면 두 번째 죽음에서 오두막은 ‘기다려지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나’는 오두막 안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기를, 그것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N이기를 고대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웬 꼬마가 있다. 여기서 ‘나’가 느끼는 감정은 어떻게 변화할까. 단순한 아쉬움으로 끝내기에는 오두막이, 꼬마가, ‘나’의 죽음이 잘 짜인 하나의 틀처럼 남겨져 있다. 그 안에 내용을 채워야 한다. 꼬마가 내미는 사진이 ‘나’와 매우 밀접했다면 어떨까. 꼬마가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리하여 꼬마와 ‘나’는 그 오두막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작가의 상상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고별〉 안에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빛나는 사건이 고루 숨겨져 있다. 그것을 ‘나’의 삶과 N의 관계, 꼬마의 의미와 오두막의 공간성을 살려 풀어낸다면, 이 소설은 훌륭한 사후세계의 반영이 될 것이다. 단촐하게 꾸며진, 하지만 아늑하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중간 지점. 그렇게 작가가 만들어낸 작고 소중한 사후관이 내재한 빛을 충분히 뿜어내기를 기대한다.
맺으며
여러 콘텐츠의 꾸준한 유행으로 사랑받는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택하는 건 예상보다 첨예한 동시에 폭넓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소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화, 파편화, 분열화되었다지만 그 안에서 생긴 작고 소중한 우리의 세계는 나뉘어지고 부서진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본래 조그마했으며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있다. 나와 가까운 ‘우리’의 사후세계를 구축하고자 발을 디딘 작가의 소설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은 독자로서 그 오두막집에 들르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오두막집을 두 번이나 들른 최초의 방문자로서 ‘나’의 죽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기를 바란다.
사랑과 이별이 어우러지는 사후의 정류장에서 재회하는 삶과 죽음은 ‘고별’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교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