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작품의 전체 줄거리와 주제, 그리고 이에 대한 리뷰어의 무수한 오독誤讀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및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원치 않는 분은 작품을 먼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범죄 사건에 관한 위키 토막글로 시작되는 작품의 도입부는, 검색 의존도가 높은 현대의 독자를 신속히 작품 안으로 끌어오면서도, 동시에 포석으로써의 역할 또한 수행한다.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어 DB 압수수색이 어렵고 영리적 불투명성 문제를 안고 있는 모 위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공적 정보 이외에도 수많은 사적인 관심사가 임의의 작성자에 의해 무분별하게 문서화 되고, 위키는 그 관심의 하찮음 만큼이나 짧은 토막글 역시 여럿 지니고 있다. 금세대는 이미 위키의 ‘신뢰성’과 ‘윤리’에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작품 외적인 인식은 토막글에 제시된 정보가 ‘충분한 설명’인지를 의심하도록 자극한다.
‘서울시/성북구/하월곡동/월곡산’ 등의 지리적 정보와 ’20대 중반/남자’ 같은 신상 정보로부터 독자는 사건의 전말과 피해자의 계층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통계 상의 최빈값과 사회 통념에 기반하여 편향된 결론을 내리는 건 즐거운 읽기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글을 읽는 정신에는 여유와 권태가 있으며, 눈앞에 제시된 새로운 텍스트를 해체하고자 하는 탐독의 영혼은 보다 확고한 정보를 원한다. 반사 반응이 있는 동물은, 비근함 속에 적의를 감춘 세계에서 숨은 의도를 찾으려는 강박에 저항할 수 없다. 틈새를 엿보려다 텍스트의 격류에 휩쓸린 여행자의 경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시대로부터 참으로 멀리 왔다. 고전 서사시의 영웅들은 무결하지는 않되 완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무자비한 남성성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의 시대가 왔고, 미숙한 젊음이 역경 속에 성장하는 이야기가 각광을 받았다. 제 몫을 하는 성인 ― 마이스터 등으로 표현되는 성숙의 지표는 완성되지 못한 남자들의 지향점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격동의 20세기 속에 마모된 무기력한 생존자들이 존재했으며, 그 분위기의 연장선인 21세기 속에 우리는 뜻밖의 남성 등장인물과 마주하고 있다.
(비교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불공정한 아버지의 세계를 전복시키는 대신 모성의 엘리시움을 찾으며 현 발달 단계에 안주하는, 영웅을 지향하지도 방황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발이 묶여 있다고 믿는 이상한 오이디푸스. 현대에는 그런 기이한 형태의 오이디푸스를 어렵잖게 마주할 수 있으며, 그 경험의 현장은 실세계와 허구를 구분하지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 ‘진성’이 지닌 특징은 그만큼 흔하고 익숙하다.
‘진성’이 남긴 글을 보며 그에 관해 회고하는 관찰자는 말한다. “(…)진성 씨가 어떤 사람인지 다 보여. 역시 요즘 세상에선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는지가 어떤 성향을 지닌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게 아닐까?” 비록 독자가 읽어낸 맥락대로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의 말은 어떤 진실을 관통하고 있다. 머리 없는 존재를 마주할 수 없는 ‘진성’이 몰두하게 된 대안 ―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과 광고는 인물 해석에 있어 확고한 방점 역할을 한다.
(실재하는 유명 포털 사이트의 구조를 거의 반영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그곳에서는, “음란물, 차별, 비하, 혐오”를 확대 재생산 함으로써 ‘성문율 위반 4관왕’을 달성하는 게 일상이다. 커뮤니티 이용자의 랑그langue는 적나라함과 비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은 밈meme과 폭력의 언어로만 대화한다. 포털 사이트는 성 상품화를 수반하는 자극적인 광고가 수익 구조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용자들도 그런 환경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 눈에 띈다. ‘진성’의 글을 대하는 이용자들의 태도는 진지하지 않지만, 그가 커뮤니티에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녹아들고 있다는 사실로 하여금 독자는 그의 성분을 특정할 수 있게 된다.
문제 사건을 대하는 ‘진성’의 태도 역시 앞서 형성된 그에 대한 첫인상을 강화한다. 욕설을 하고 숟가락을 던지는 ‘진성’의 반응은 가부장제의 부산물인 일상적 폭력으로부터 학습되었지만, 그것은 스핑크스와 테베의 왕을 죽이기보다는 가족인 ‘두부’와 ‘어머니’를 다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후술할 내용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위안용으로 본다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진성’의 생각은 ‘안심’과 ‘성적 흥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중대한 범죄 위에 ‘무심하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명료히 부각된다. 그는 영상이 일련의 범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팔루스의 오만한 시선으로 그것을 탐하는 데 그친다. 피해자의 신상이 노출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도 머리 없는 여자에게 “꼴릴 리가” 없다며 안도하는 등, ‘진성’은 믿기 힘들 정도로 무감각한 모습을 빈번히 보여준다. 이러한 ‘진성’에 대한 일련의 묘사는 독자가 등장인물로부터 은근히 멀어지기를 권고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성’과 같은 인물의 영향력으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우리는 도달할 수 있는가?”
〈머리 달린 여자〉가 호러로 정의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일컫는 안녕한 하루의 기반은 무수한 운과 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체계적인 커리큘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폭력성은 종종 수천 년에 걸쳐 쌓은 규칙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여전히 친구와 가족의 낯가죽이 가해자의 얼굴로 바뀌는 순간을 두려워하며, 기술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기술 진보의 이면으로부터 다각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지난 해에 발표된 〈아동·청소년 성착취 피해예방과 인권적 구제 방안 실태조사1〉 보고서는 ‘현대의 성범죄를 다루는 데 있어 현 사회가 기술적·제도적으로 얼마나 미비한 상황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그루밍 범죄, 디지털 성착취물의 복사·유포 문제는 폐쇄적으로 진화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다크웹의 등장으로 해결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 ‘성착취’에 대한 법리적 정의 부재, 모호한 양형 기준, 기관 간의 미흡한 협력은 조속한 해결을 바라는 피해자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있다. 결정적으로, 범죄 수법과 매체의 진화 속도에 비해 국가와 사회의 발전은 한없이 느리다.
뉴욕 세네카 폴즈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감성 선언Declaration of Sentiments2〉이 발표된 연도는 1848년이다. 한국에서는 형법 개정을 통해 ‘성범죄’가 ‘정조에 관한 죄’에서 분리되면서 신체의 자기결정권이 조명된 시기가 1995년이다. 과거에는, 비록 느리기는 해도 사회는 언제나 진일보하리라는 믿음이 시민의 의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8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버닝썬’와 ‘n번방’의 시대였다. 사회의 어떤 면은 전혀 개선되지 못했고, 야만은 보다 흉포한 발톱으로 무장한 채 죄 없는 이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런 퇴보로 하여금 극에 달한 ‘공포와 경악의 시대’를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오프라인 모임을 잡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영상 공유 사이트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극사실주의적 불쾌감을 선사한다. ‘진성’이 느낀 그대로, ‘그들’은 혼자가 아니다.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매개자는 그들처럼 어디에나 존재하고 연령과 계층마저 다양하다. 네 사람은 “좀 더 어리면 좋겠어”, “뺏기면 어쩌려고” 같은 물화적 관점으로 여성을 보는 일이 자연스럽다. 그 매끄러운 대화의 흐름이 작품 외부의 공고한 차별로부터 흘러드는 것을 느낄 때, 부조리는 이미 우리를 응시하고 있음을 조용히 고백한다.
‘경현’이 가출 청소년을 노리고 쓴 소위 “동거인을 구하는 글”의 내용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2018년도 아동 청소년 대상 성범죄 동향 분석 보고서3〉에 따르면, 청소년 성매수 가해자의 평균 연령은 34.7세로 ‘경현’의 나이와 비슷하다. 이외에도 〈아동·청소년 온라인그루밍 성범죄 가해자 연령대4〉 자료 중 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9.1%로 20대에 이어 두 번째로 높으며, 오프라인 성범죄의 경우도 30대는 18.7%로 역시 두 번째로 높다. ‘경현’이 오픈채팅방에서 동거인을 “여자친구”라 언급하는 부분은 일부 2030 남성의 인식이 현실로부터 괴리되면서 발생한 그로테스크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기괴한 인식이 실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고 현 사회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성착취물이 제공하는 말초적 자극조차 질려버린 ‘진성’은 성매수를 통해 그의 환상을 충족할 실체를 쥐고자 하지만, 경제력의 한계가 그의 콤플렉스를 자극하기만 할 뿐이다. 가족에게서 투영되는 자격지심의 민낯을 회피하고자 패스트푸드점에 간 ‘진성’은 처음으로 머리가 달린 여자를 보게 된다. 그러나 ‘진성’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특질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의 얼굴이 아닌 ‘두드러진 가슴’이다. 오픈채팅방에 남긴 “존나 예쁨”이라는 표현은 그가 과연 사람의 머리를 신경 쓰기는 했는지 의심하게 한다. “그렇게 바보 같은 당신에게 연락처를 줄 여자는 없다”는 ‘하늘’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들을 믿을 수 있느냐는 ‘하늘’의 질문에 대응하는 ‘진성’의 답변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지몽매함 속에 사회의 불문율을 감추고 있다. ‘진성’은 본인의 발언대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하늘’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이 남자는 완전히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살아온 것처럼 행동한다. “(…)조심해. 요새는 별일이 다 일어난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하늘’이 과연 ‘진성’을 동정했기에 슬픈 표정이 된 것일까? 교묘하게 배치된 문장이, 마치 폭풍 속에 흔들리는 풍향계가 어느 한쪽도 가리키지 못하듯 진위의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처참할 정도로 희박한 ‘진성’의 죄의식은 죽음이 그를 찾아온 순간에도 잘못된 단어를 선택하게 만든다. “우리만 있는 거도 아니고”, “약 먹인 새끼들이 더 나쁜 거 아니냐고”, “왜 우리가 걸린 건데?” 그는 집단 속에서 희석된 책임감과 도덕성의 밑바닥을 드러내고는, 신경 쓰지 않았던 ‘폴라티의 의미’에 대해 나름의 유의미한 발상을 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적어도 어떤 단죄가 내려진다는 결론이 이 극사실주의적 회화에 유일하게 덧붙여진 초현실주의의 조각이 아닐까 싶지만, 필자는 이 부분이 단순히 ‘개연성’이나 ‘해소 감정’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는 건 “신중하지 못하다”고 제언하고자 한다.
‘도끼’라는 단어는 필자에게, 아가멤논의 피로 흥건한 도끼를 들고 자신의 살인을 고백하는 「클뤼타임네스트라5」를 연상케 한다. 고대 비극과 서사시 속 여인들의 복수는 네메시스의 영역에서 이루어졌고, 그녀는 인과응보를 상징하는 신이었다. 상술한 아가멤논, 그리고 이아손과 테레우스 등 ― 저주 받아 마땅한 이들이 응보의 그물에 걸린 모습은 신화에 교훈처럼 남아 있다. 특히나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의 이야기는 필자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다.
물론 필자는 사람을 찢어 죽여 복수한 트라키아의 바쿠스 신도들이 “현대인의 귀감”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적제재의 무제한 허용은 사회의 기본적 틀인 ‘신뢰’를 파괴하고, 시민을 영구적인 투쟁 상태로 전락하게 한다. 필자가 말하려는 건, 성과 폭력 사이에 현존하는 논의가 트라키아의 칼날보다 분명한 출구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해자들을 (마치 고대 로마인이 그러하였듯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선언하는 것 이상의 어떤 공정한 처벌을 내릴 수 있는가?” 현대인의 법 감정은 이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그 주변을 공전하고 있으며, 죄와 벌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현실의 모습은 그보다도 처참하다. ‘진성’을 도끼로 쳐 죽이는 ‘하늘’의 단죄는,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현실 속에 노출된 의분의 인덱스index에 다름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조치는 성범죄 영상의 ‘삭제’다. 완전한 삭제 없이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은, 피해자의 회복 가능성을 낮추고 극단적 선택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 세계의 실망스러운 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2018~2020년 총 심의 건수 중 삭제가 이루어진 비율은 0.18%에 그쳤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도 구제 받지 못한다.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고, 무수한 시선으로부터 도망쳐 보지만 그들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그들만의 언어로 이루어진 기괴한 품평회를 연다. 분노가 가해자의 죽음을 부르짖거나 당신을 파괴할 때까지 악몽은 계속된다.
이것이 〈머리 달린 여자〉가 그려내고 있는 우리 삶의 장르: 실망스럽고 잔인한 세계의 호러다.
〈머리 달린 여자〉는 내적인 서술보다는 작품 외적 맥락을 통해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이 공포를 일으키기에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부족한 것은 아니다. 단지 외재적 맥락이 일으키는 혐오감이 그보다 강해 내재적 정서가 희석되는 것에 가깝다. 본작에는 집단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튼 어떤 공포의 원형을 자극하는 힘이 있으며, 신비가 파훼된 현대에도 죽지 않은 어떤 괴물의 형태가 구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정교한 배치를 지녔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독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를 필자는 조심스럽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