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욕망의 자리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저주의 몫 (작가: 그린레보, 작품정보)
리뷰어: 윤다, 21년 9월, 조회 113

정말 혼란스러워요… 작가님이 떠넘긴(?) 이 혼란스러움을 어떻게든 상쇄하기 위해 리뷰를 적어 봅니다.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건 ‘부조리’라는 키워드입니다. 그 시작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이 원하는 작가가 될 수 없는 주인공의 충족되지 못한 거대한 욕망이고요. 그런데 주인공의 전 남친인 종범은 딱히 발버둥이랄 것 치지 않아도 뭐든 쉽게 쉽게 이루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인데, 하필 주인공이 간절하게 원하지만 결코 이루지는 못할 작가라는 꿈을 이뤘기 때문에 주인공의 엄청난 질투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종범의 특징은 그가 가진 여유롭고도 재수 없는 미소로 상징되고, 주인공은 그 미소를 격렬히 증오하죠. (소설 “미스틱 리버”를 읽어보셨다면 이 미소가 ‘숀’이라는 인물의 여유로운 미소와 닮았다는 걸 아실 거예요.) 이러한 종범의 특징이 본인이 가진 생래적 경향인지 아니면 그를 둘러싼 사회학적 환경(가정환경, 자본, 젠더 등)에서 온 것인지는 명시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종범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네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뭔 상관이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라는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그만큼 우리가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모두와 모두가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고, 그만큼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위치에 처해 있죠. 하지만 우리라는 개인이 하루 종일 인터넷에 의견을 낸다고 해서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의견에는 새 발의 피도 못 미칩니다. 그런 상황을 나타내는 게 SNS입니다. 그리고 종범은 SNS라는 활동을 담당 편집자에게 외주화함으로써 사람들의 수많은 의견들로부터 시달리는 일에 신경을 꺼버리죠. 돈이 많으면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일 따위는 간단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릴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이코노미가 아니라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렇게 종범은 ‘문을 닫고’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해가는 작가이고, 이러한 종범의 유아독존적인 성향을 보완해주는 것이 편집자라는 존재입니다. 편집자는 독자와의 소통을 담당하고, 그럼으로써 종범은 더욱 더 편하게 문을 닫고 혼자만의 노동에 임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런 감정노동의 외주화 때문에 나중에 후폭풍을 맞게 되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종범의 습관은 독자와의 만남 자리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종범은 눈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열광하는 독자가 있어도, 그건 독자 그들만의 감정이지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그들 자신의 몫이라는 건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정말로 재수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종범의 태도는 정은경이라는 열렬한 여성 팬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현 사회에서 문화를 소비하는 수용자들은 단지 문화만을 소비하는 게 아닙니다.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내적인 이야기와 그 윤리, 그 문화를 창작한 창작자의 이야기와 사람됨을 소비하고 그것에 아낌없이 돈을 씀으로써 자신이 응원하는 윤리가 사랑받고 승리하길 원합니다. 그것은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페미니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임금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차별이 하루도 멀다 하고 뉴스에 보도될수록, 여성들은 문화에서나마 여성이 정당하게 대우받거나 최소한 자신의 목소리라도 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에서나마 윤리적 정의가 구현 받기를, 적어도 발화되기를 원하는 여성들의 마음은 『82년생 김지영』의 선풍적인 인기에서 드러난 바 있습니다. 한편 페미니즘 물결의 영향권 아래 있는 2030 여성들이 여성향적인(단순히 여성향적이라기보다 ‘여성에 대한 처우를 신경 쓰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표현력 부족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작품과 작가를 후원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윤리에 무감한(소위 “빻은”) 작품과 작가를 비난하고 불매하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물결의 영향권 아래 있는 2030 남성들 또한 ‘페미니즘이 묻은’ 작품과 작가를 격렬히 비난하고 불매합니다.

 

자신이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사상을 후원하거나 불매하는, 이러한 젊은 세대들의 가치 중심적 소비는 비단 페미니즘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를 저지른 창작자의 작품을 불매하는 심리에서도, 지구 생태계나 노동자 윤리를 고려하는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는 심리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는 다음과 같은 은경의 말로 대변됩니다. “좋은 거니까, 작가님도 좋은 사람이셔야죠.” 작품 내의 윤리가 바람직하면, 작품을 창조한 주체 또한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남성향적인 작품이 주를 이루는 웹소설 판타지 장르의 클리셰―‘찌질한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며 주변의 존경과 여자들의 순종을 받는’―를 따르지 않는 “나태성좌”는 은경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작품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작품이 국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는 점은 남성향 판타지에 지친 은경에게는 자신이 응원하는 윤리와 사상이 현실에서도 승리했다는 정의 구현의 느낌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경은 이 이야기의 작가가 여타 남성향 판타지 작가와 마찬가지로 윤리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배신감과 억울함을 느끼죠. 뿐만 아니라 은경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마음을 주었던 장면도 그저 기술적으로 잘 구현된 설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배신감은 배가 됩니다. (여기서 예술의 영원한 주제인 감성과 이성의 반목도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믿는 윤리가 승리하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종범을 후원한 은경의 욕망에는 이미 모순이 들어 있습니다. 은경이 믿는 윤리란, 넓게 말하면 ‘마땅히 그럴 만한 사람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모든 이야기에서,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구현하길 원하는 정의의 모든 것이 아닐까요?) 은경 입장에서는 다른 남성향 작품과 차별화된 윤리를 보여주는 종범의 작품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건 정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종범은 자신이 쓴 웹소설로 수백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경에게 비윤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윤리적인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백 배, 천 배의 돈을 버는 것은 부조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돈이 있는 곳에 돈이 몰리는 부조리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문법이기도 합니다.

 

그런 부조리함 때문에, 은경에게 종범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기실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이미 어마어마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자본의 흐름을 은경 개인으로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은경 자신이 종범이 성공하는 데 한몫을 보탰지만, 자본의 축복을 거두는 것은 은경의 영향권을 벗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은경은 종범에게 저주를 내림으로써, 부조리한 축복을 부조리한 저주로 상쇄시킴으로써 정의를 구현하려 합니다. 또한 은경은 SNS 선동으로 자본의 축복을 일부 거두는 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은 정은경의 존재가 연막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저주의 오리지널은 주인공 수연에게 있습니다. 주인공은 ‘혼자만 잘났고’ ‘자기가 잘나서 결과가 잘 나오는 줄 알며’ ‘부당 이득을 취한다는 의식이 없는’ 종범을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저에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쉽게 가지는, 자신은 결코 되지 못할 ‘작가’라는 존재가 된 종범에 대한 질시가 있습니다. 다음은 저의 잘못된, 심지어 위험한 감상일지도 모릅니다만,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성긴 인상을 적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은경-수연으로 대변되는 중심인물은 ‘페미니즘적인 정의를 구현하고픈 욕망’보다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정의를 구현하고픈 욕망’이 앞서고, 둘 모두가 포함된 ‘사회 윤리를 구현하고 싶은 욕망’보다 ‘자기실현의 욕망’이 앞섭니다. 수연이라는 주인공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따라서 페미니즘적인 가치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상도 아니며, 자신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작가의 꿈이라는 ‘자기실현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욕망조차 아닙니다. 욕망은 욕망의 대상으로 가는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작가가 되는 것은 수연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욕망의 대상으로 향할 길이나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연을 지배하는 것은 “내용 없는 충동”입니다. “……싶다, ……싶다.”

 

이러한 실현될 수 없는 욕망, 이미 깨져 있어 욕망조차 아닌 욕망은 물건을 소비하는 형태로 빗나간 채 구현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열렬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과 “도대체 뭘 찾는 건데?”라는 남편의 물음에 수연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엇나간 방식으로나마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보석을 사 모을 뿐입니다.

 

결말에서 보석을 쥔 수연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차, 싶었습니다. 수연이 원하는 것이 정말 ‘자기실현의 욕망’이었을지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수연이 손에 넣었다는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종범이 자신이 내린 저주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꼴이었을까요? 닫혀 있던 종범의 문을 자신이 처음으로 열었다는 사실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라면, 자신이 종범에게 내렸지만 결국 종범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마땅히 되돌려진 저주, 즉 자기파괴라는 욕망이었을까요?

 

소설의 내적 규칙은 자기파괴적 엔딩을 향해 굳건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 마음대로 욱여넣은 해피엔딩입니다.

 

저는 수연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파괴의 욕망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수연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포자기 상태로 보였으니까요. 수연도 결국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기실현과 자기만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한편으로 불만족스럽고 한편으로 만족스러운 상태로 살아가기를 원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해온 게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작가가 아니다.”라는 수연의 말은 해결책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수연이 열심히 소설을 써보려다 안 된 것도 아니고,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수연이가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기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자기만족을 누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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