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를 아는 만큼 외로워집니다. 타인을 아는 만큼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깨닫게 되고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단편적일 뿐이라, 그 비어있는 만큼에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지만, 실망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우리는 그 만큼 병들어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순간에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면 어떨까요. 이 소설은 그 후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소연과 재경과의 만남은 일방향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음악실의 좁은 창문으로 재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좁은 창문은 소연의 관계에 대한 시선의 상징으로 읽히며, 폐쇄적이고 수동적이나, 외로움을 느끼는 상황을 드러냅니다. 때문에 소연은 재경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한 채 말을 걸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이후 일방향적 관계는 쌍무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소연의 외로움을 발견한 재경은 소연에게 관계를 주기만 하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특히 드러나는 장면은 예전에 친했던 친구와 싸웠고 그 친구와 이별하게 된 소연에게 휴대폰을 건네 화해 시키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구체화 됩니다. 여기서 소연은 자신에 대해 여실히 모르고 있음을 보입니다. 외로움을 알고 있으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재경은 나의 외로움을 알기에, 나는 재경을 통해서 외로움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둘 사이에는 침묵이 맴돌 수 밖에 없었으나, 재경은 이 침묵을 긍정해줍니다. 하지만 이 침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재경 역시 외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조는 재경이 소연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연이 끝내 학교라는 공간에 적응할 수 없었듯, 너 역시 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학교는 정상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상성에서 유리된 두 사람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시간대가 다르긴 하지만) 소연은 결국 직장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표를 냈고, 재경은 새롭게 취직한 곳에서 비정규직에서 정직원으로 채용됩니다. 이 차이는 재경은는 외로움을 받아들였지만 소연은 외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한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재경이 외로움을 받아들인 근거는 포기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발견됩니다. 사고로 손가락을 다치고, 아버지마저 잃은 재경은 끝내 바이올린을 그만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의 부탁에 따라 바이올린을 연주해주는데, 개인의 방식으로 상처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10년 후 재경이 바이올린 연주회를 여는 데에서 더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이 지점에서 최초로 소연과 재경의 외로움은 교차되나, 소연은 끝내 재경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는 너를 탓합니다. 자신과 상의 없이 정직원이 되어 일터를 옮기고, 자신의 괴로운 상황을 결코 말하지 않는 재경에게 소연은 자신의 외로움의 이유는 재경이라며 이유 없이 탓합니다. 그렇게 영원히 헤어짐을 알았을 때 나는 네가 전해준 외로움의 흔적이나마 붙잡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를 찾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10년이 흘러 소연은, 너를 통해 나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 소연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너를 만난 나는, 우연한 외로움을 깨닫고 스스로를 반추합니다. 이 외로움을 깨닫지 못하고 병들어있던 소연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전에는 재경과 함께 있었던 전화박스를 찾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곳에 있습니다.
재경이 준 연주회 팜플렛을 본 소연은 과연 그 곳으로 갈까요? 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소연이 마지막으로 재경과의 인연을 되찾기 위해서는 가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외로움이 절절하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