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를 상기시키는 제목입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집단이 개인에 비해 더 큰 죄를 저지르며, 결과적으로 더 큰 해악을 미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복잡한 현대 국가에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제아무리 용을 써봤자 드넓은 호수를 흐릴 수는 없는 법이죠. 반드시 경계하고 언제나 감시를 늦추지 말아야 할 대상은 권력을 지닌 집단의 의지입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요.
제가 보기에 이 작품도 비슷한 주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래수’는 의대를 졸업한 의사지만, ‘바크주커’라는 독재국가에서 선전을 위해 정치범의 뇌를 조작하는 임무를 맡고 있죠. 바크주커의 인민은 국가의 의지에 종속되는데, 그 국가가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되려 그 반대죠. 래수가 명색이 의사임에도 비서 ‘스룬’의 의식불명인 아들을 치료해줄 수 없는 이유는 나라의 의료 자원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건강이 악화된 사람들은 대안도 없이 강제 퇴원해야 하고요. 이 나라의 의료비는 무료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실직적인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연구원 ‘운하이’가 망명을 옵니다.
운하이의 연구분야는 정신 개조인데, 실제로 하는 일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것에 가깝습니다. 의식이 없는 피험자의 코에 운하이가 가져온 무언가를 흘려 넣으면, 순식간에 새사람이 되는 거예요. 기억만 같을 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바크주커 사상에 충실한 인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죠. 이 마법 같은 기술은 바크주커의 지도자인 ‘아루성’ 정권 하에서 자행되던 정치적 숙청을 한결 용이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형과 살인에 비하면 정신 개조는 훨씬 쉽고 안전한 방식이니까요. 래수와 운하이는 실험실에서 은밀하게 숙청 작업을 이어갑니다. 수월하게 자리 잡아갈 것처럼 보이던 숙청 작업은, 이야기 중반부에 서술자 래수의 인상적인 진술을 기점으로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동시에 분위기의 반전과 세계관의 확장도 함께 일어나죠. 무기력했던 개인은 이제 세계를 뒤집을 동력을 갖추게 됩니다. 전 이 시점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가 특히 좋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난 내가 그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국가자본을 빼돌린 혐의로 정신 개조의 대상이 된 래수는 그제야 운하이에게 일의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됩니다. 운하이는 외계의 이주자입니다. 수천 명의 이주자가 운하이와 함께 지구에 왔죠. 이들은 바크주커에서 건강한 지구인의 몸을 취하여 이 나라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기로 미국과 합의한 망명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운하이가 피험자의 코에 흘려 넣었던 정체불명의 물질은 아마도 동료 이주자의 영혼과 흡사한 무엇이었을 겁니다. 피험자가 거짓말처럼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고요. 하지만 운하이는 영혼을 갈아 끼우지 않고도 비슷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운하이는 래수의 몸에 이주자의 영혼을 불어넣는 대신 숙청 이후의 심리검사에서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장치만 심어둡니다. 이주자의 기준에서 볼 때 래수는 애초에 정신 개조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여기까지 읽고 나면 결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는 부패한 국가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현실에서라면 지난한 과업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장치가 있죠. 래수는 독재 정권의 수장을 정신적으로 숙청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성공한다면, 그래서 합리적인 이주자들로 구성된 정부를 꾸릴 수 있게 된다면, 바크주커는 그야말로 아무 탈도 없이 민주국가로 변모할 수 있을 겁니다. 극도로 조용한 혁명의 가능성이 열리는 거죠. 어쩌면 유토피아적 신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이걸 정말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민주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인민이 권력자에 대해 정당한 방법으로 결정권과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은 끝없는 갈등에 있기도 하잖아요. 갈등이 있어야 대화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거니까요. 이런 민주적 과정과 절차는 결과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물론 근사하지만, 원천적으로 일말의 오차와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이주자들의 정부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면 어딘가 오싹해집니다. 위대한 가치는 결코 그렇게 쉽고 말끔하게 주어져선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작가가 마지막 코멘트에 쓴 “바크주커는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존재해서도 안 될 나라라고 생각해요.”라는 말이 이 작품을 비로소 완성시켜준, 꼭 필요했던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