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에서 감도는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나의 그림과 떠나감에 대하여 (작가: Pip, 작품정보)
리뷰어: 하늘, 17년 5월, 조회 80

휴일 아침, 30대가 된 ‘나’는 문득 어떠한 향기에 이끌려 탁자 앞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 티백을 꺼내어 향기로운 차를 마십니다. 한 모금씩 차를 넘길 때마다 14년 전, 고등학교 때 도서실에서 만난 ‘누나’의 모습이 한 장면씩 떠오릅니다.

‘나의 그림과 떠나감에 대하여’는 현재의 주인공이 어떠한 매개를 통해 과거의 사랑을 만나고 그 감정을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경우 어떠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단편은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주인공은 시간을 넘나들지만 이야기 구조는 장르적이지 않습니다. 이게 회상인지 진짜로 넘어간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그 대신에 얻어낸 것은 연기처럼 피어나는 특정한 이미지입니다. 차분한 어조와 세밀한 표현들로, 정말로 독자는 화자가 실제로 그려내는 것 같은 감정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읽고 나면 한때 열렬한 짝사랑에 마음 아파했던 소년의 감정만이 오롯이 건져집니다. 판타지 카테고리에 있지만 그런 면에서 이 단편은 장르물이라기보다 어린 시절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청춘소설에 가깝습니다.

빠르게 훑어 내려갈 수 있는 글은 아닙니다. 상황 설명을 어느 정도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주인공의 시야를 묘사하기 때문에, 때로는 문장을 두어 번 읽어야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서술이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글은 그 기법이 소재와 맞물려서 상승효과를 냅니다. 향기로운 차를 머금은 것처럼 글 사이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를 더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단번에 어떤 모습인지 파악이 되는 것만이 보기 좋은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련하게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은 그런 모양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 ‘나의 그림과 떠나감에 대하여’는 그런 맛을 느낄 수 있는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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