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호러의 퇴폐적 녹청을 감상하려는 이들의 심미안을 위한 지침서 비평

대상작품: 잭오랜턴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 17년 5월, 조회 308

1) 우리는 여전히 신화적 이야기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문학속에 스며든 신화적 주제를 판타지나, 호러 문학 등으로 변형시켜서 읽고 싶어하는 욕구가 여전히 존재한다. 모든 인류의 원시 신화에는 공포적 요소가 분명히 있다. 신화 자체가 호러 문학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어법이겠으나, 그러한 이야기 속에 반영된 인간의 열망이 공포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류가 역사의 유년 시절에서 외부 환경에 대해 지녔을 듯한 감정적 반응, 그것의 잠재적 기폭은 공포 그 자체이며 또한 그런 감정을 극복하려는 동기에 대한 자극임을 부정할 심리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2) 이는 모든 나라의 신화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유독 낙관론적 관념을 강화하고, 합리적인 이념으로 교훈적 주제를 부각시키려 하는 동양의 전통 관념들, 특히 그 관념을 가장 강하게 사회 뿌리에까지 적용하려는 한국과 같은 경우를 특수하다고 부정하려는 시도를 나는 오히려 반대한다. 그러한 전통 관념들 속에 감추어진 세부 사항을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신화적 이야기는 공포적 감정의 기폭을 분명히 잠재하고 있다. 굳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논쟁적 화두를 제시하는 것은 적절치는 않은 듯 하다.

단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화적 이야기가 왜 아직도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의 의의를 언급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지에 대해서 강조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3) 테크놀러지가 궁극적으로 발달하여, 어쩌면 새로운 도약점, 어떤 시대적 전환점에 서 있는 듯한 이 시대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화적 이야기”를 갈구하는 열망이 있다. 바로 기계와 인간의 교환, 인공지능의 비약을 고찰하는 사상적 흐름인 트랜스 휴머니즘, 더 나아가 포스트 휴먼을 생각해보는 이 시점에서, 모든 인류가 보편적인 지점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위기감, 바로 원시 유년기의 인간이 느꼈던 어떤 감정들이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해본다면, 그 시절의 태고적 기억에 대한 향수가 현대의 우리 앞에 놓여진 미래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줄 지도 모른다. 바로 인간을 언제든 먼지처럼 축소시키는 대자연적 재앙을 극복하고 간신히 문명을 이뤄내는데 성공했다고 자평하는 지금의 인간들이, 테크놀로지의 대약진이란 또 다른 “거대한 지평의 도전”앞에서, 고대의 인류처럼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4) 현대의 과학은 우리에게 신의 존재를 고민할 이유를 제거했을 지도, 그 필요에 대한 당위를 빼앗아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제공하는 논리적 동기가 테크놀로지 앞에서도 유용할까. 또한 지금 시대의 인류에게 자연적 재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인간이 원시의 유년기때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도전들을 극복한 역사를 반복할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를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아직도 유년기의 인류를, 본질적인 부분에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여전히 이러한 문제는 “초자연적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코스믹 호러가 현대적으로 유효하고, 그런 장르가 제공하는 우주적인 불안과 공포의 자극이 어떤 문제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는 요소로써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5) “코스믹 호러”는 모든 호러 장르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우리의 감정안에 내재된 본질적인 불안과 공포를 자극한다고 개인적으로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 장르의 주제들은, 신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 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불편의 정서에 가장 근본적으로 닿아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인간들은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오늘날의 우리로썬 상상조차 힘든 고통을 감내하며 그것에 준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것은 대부분 희생 제의와 관련된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신의 지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어린양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만, 비로소 그 장소에 들어설 수 있었다. 부처는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부처와 동시대에 경쟁했던 사상적 지도자는 끝내 단식사에 이르름으로써 믿음을 증명했다. 불교에도 소신공양이란 모호한 관념으로 그런 죽음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굳이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즈텍인과 비슷한 사례는 인류의 역사에 열거가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6) 이러한 고대의 기억들은 극복된 것이 아니라 잠재된 형태로, 인류의 유년기에 대한 원시적 향수를 상징하는 여러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다. “집단 무의식”이란 원형적 관념 뿐 아니라, 우리의 생존적 유전자또한 그 시대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맥락과 이런 해석을 연결한다면, 가장 도약한 테크놀러지의 문명의 멸망이란 주제가, “아틀란티스” 신화라는 주제로써 지금도 풍부한 상상력의 근원을 제공한다는 설명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7) 몇 해전 개봉한 상업만화 “토르”는 아예 인간에 비해 초월적인 힘을 지닌 신들을 사실 외계에서 도래한 문명인들이라고 생각하자는 발상을 제시했다. 그보다 더 공포스런 상상력을 제시하지만 “크툴루 신화”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나오는 발상이다. 그것은 충분히 상상하고 납득이 가능한 발상이다. 개개인에게 어떤 자극적 경험을 주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크툴루 신화는 그 신화를 구성하는 신들에게 붙는 접미사처럼 불사의 생명력으로써, 확장되고 재창조되고 있으니 말이다.

 

8) 크툴루 신화의 본 관념은 러브크래프트의 창조물이다. 이 작품의 작가 또한 러브크래프트와의 접점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이름을 변주함으로써, 완전히 그 관념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히지만, 언어를 조합하는 분위기와 발상을 통해 지금까지도 역동하는 “신화적 이야기”의 흐름에 동참하는 헌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때문에 작가 자신의 창조력과는 별개로, “코즈믹 호러”의 문학적 양식이 갖고 있는 약점적 부분도 공통적으로 공유한다. 이것은 이 글을 쓰는 리뷰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약점이다. 서술 방식이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사변철학적인 폼을 제려는 듯한 태도, 혹은 우주적 존재의 압도적인 권위 때문에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화자, 혹은 캐릭터의 빈약함 등, “고대의 존재”가 내뿜는 장황함을 끝까지 들어주기에 인내심이 약한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고, 궤변적으로 느껴질 부분 또한 충분히 있다. 하지만 문학사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는 시발점으로써는 이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유효하다고 본다.

 

9) 러브크래프트가 “문학에서의 초자연적 공포(http://www.latin21.com/board3/view.php?table=theory_fh&bd_idx=1)”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코스믹 호러”의 진정한 매력은 작위적인 피투성이, 궁금증만을 유발하는 단조로운 살인 행위, 피묻은 뼈다귀 따위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거의 추종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런 전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코스믹 호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 즉 다른 평범한 양식의 호러 장르와는 차별되는 공포를 느끼는 중요한 논리적 설명을 그 자신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스믹 호러”에서 공포와 즐거움을 주는 대상은 바로 외우주의 권능을 그 자체적으로 대변하는 절대적인 힘,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우리의 세계로 느닷없이 닥쳐온 포복하는 존재들, 혼돈의 영역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크툴루 신화에서 고대의 존재들은 단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압도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워낙 불가해하고, 선뜻 다가서기 힘든 존재들이기도 하다. 결국 호불호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이해를 원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약점을 극복해낼 수 있는 부분, 즉 이성적 이해에 대한 욕망과 와닿는 지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 창조한 러브크래프트의 노력이 “니알라토텝”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니알라토텝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 출현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개성으로 러브크래프트의 캐릭터들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고 접근하기가 쉽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화적 원형에서 “악마”의 위치에 가장 근접한 신격체일 것이다. 따라서 니알라 토텝이 호박 머리를 하고 나타나는, 익숙한 캐릭터로 재창조 되거나 혹은 스스로 그런 마스크를 쓴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정말로 니알라 토텝이 실존한다면, 파라오 관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호박머리 토텝이라 해도 이상할게 뭐야!

 

11) 하도 러브크래프트의 문학과 사상에 푹 빠져 버려서, 정말 재밌는 작품을 써낸 작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이상한 샛길로 빠뜨린 것 같다. 리뷰까지 그의 언어를 모방하는 리뷰어의 부족한 재능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라노니, 본인은 진정한 코스믹 호러를 이해할 수 있는 정초로써 이 작품이 충족시키는 분위기적 요소와 감각을 진심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에 빚을 진 모든 작가들은 “그 위대한 창조주의 그림자”가 제시한 사상과 구성을 충분히 이해해야, 심지어는 오독받는 고통또한 감수해야, 그 빚을 벌충할 수 있을 터이다.

 

12) 이 작품에는 외계의 존재들이 우리의 세계의 가장 극단적인 경계에 있는 분위를 발톱으로 긁는 치찰음과, 으스스한 날개짓, 그러한 특수한 감각들을 전달하는 언어가 충분히 강조되고 있다. 이 감각을 어떻게 흡수하여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지금의 영토에서 그러한 매혹에 뛰어드는 창작자들이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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