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saga)라는 제목을 처음 보는 순간 그리 해야겠다고 결심한 대로, 캠벨의 [영웅이 되기 위한 12단계]에 기초한 리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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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세계(The Ordinary World)
여기 이 부엌을 보라. 각종 해산물들이 냉장고와 냉동실 안에서 잠자고 있다.
(중략)
조리대에서 주인장의 손으로 요리되어, 신성한 식탁에 올라, 사람의 입에 들어가면 그들이 나고 자란 바다에서 다시 태어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구원의 관념을.
해산물로 가득 찬 냉장고와, 그 안에서 기묘한 구원의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 해산물들에 대해 화자가 언급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험에의 소명(The Call to Adventure)
절대 폭군이 등장합니다. 영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괴수이자 악이었죠. 평범한 판타지 세계관으로 이야기한다면 마왕이나 드래곤쯤 되겠네요.
반복되는 일상에 질려 다른 성찬을 찾아 밖으로 날아날까,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주인장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친구를 데려왔다. 주인장은 그를 랍스터라 불렀다.
(날아갈까의 오타일까 아닐까, 옮겨 쓰며 고민해봤습니다. 결론은 냅두기로)
당연히 이 폭군을 해치우기 위한 소명은 모두의 것이 됩니다만, 감히 랍스터와 맞설 수 있는 해산물은 없었습니다. 흥미롭게 등장했던 영덕 대게도 삽시간에 사라졌지요.
소명에의 거부(Refusal of the Call)
이런 암담한 나날 속에서 꽃게 형제가 등장합니다. 서해안에서 나고 자란 쌍둥이로 두 마리가 같이 들어왔으나 몸놀림이 독특할 뿐 평범해(신선하고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고)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확히 그 중 하나는), 폭거에 제대로 항거하는 최초의 해산물이 됩니다. 그리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요.
오늘의 희생양은 가리비였다. 랍스터가 무쇠와도 같은 흉기를 내리쳐 그의 갑주를 으깨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눈 깜짝할 새에 번개처럼 랍스터에게 접근했다. 느닷없이 끼어들어 그 흉기를 막아낸 것은 쌍둥이 중 한 꽃게였다. (중략) 모두들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마침내 꽃게가 집게를 랍스터에게 붙들린 것이다. 랍스터가 힘을 주자 집게가 으스러졌다. 집게를 잡혀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거품을 물며 랍스터의 눈을 맹렬히 쏘아봤다. 희생당했던 이들이, 반항했던 이가 종국에 내보이던 체념의 눈빛과는 달랐다. 정말 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게 눈 감추듯 찰나의 시간에 꽃게의 다리와 몸통이 분리됐다. 사체 조각은 역시나 하수구와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맛은, 없었다.
남은 쌍둥이는 항거하지 않습니다. 그저 집게를 분노로 떨고선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어요.
조력자의 등장(Meeting with the Mentor)
위대한 멘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폭정에 항거하지 못하고, 해산물들의 파라다이스로 가지도 못한 채, 그들은 이렇게 끝나고야 마는 것일까요?
첫 관문의 통과(Crossing the Threshold)
랍스터를 떠받드는 새우들이 오만해진 채 다른 해산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괴롭힘의 강도는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만, 드디어 쌍둥이 꽃게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꽃게는 직접적 항거는 하지 않았습니다. 간접적으로 홍합을 구해줬을 뿐이지요.
갑자기 하염없이 거품을 흘리던 꽃게가 움직였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내려와, 상심하여 우두커니 무리와 떨어져 있는 홍합에게 다가갔다. 집게를 들더니 오물을 하나하나 집어 떼어 줬다. 홍합을 굴리던 새우가 와서 수염을 거세게 흔들고 꽃게 앞으로 와 항의했지만, 그는 아랑곳 않았다. 눈을 부라리고 집게를 부딪치며 새우를 쏘아봤다. 겁먹은 새우는 물러났고, 홍합의 빛깔이 살아났다.
(신체 구조상 전복을 구해주진 못했습니다)
별 거 아닌 일 같죠? 용기가 생겨납니다. 용기는 중요한 것입니다. 용기 없이 항거는 이루어질 수 없죠.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깨달은 꽃게는 드디어 자신을 시련 속에 내던지기로 결심합니다.
세 가지 요소와의 만남 : 시험, 협력자, 적대자(Tests, Allies, Enemies)
그 시련의 이름을 간장연이라 합니다.
주인장에게 선택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 간장연에 몸을 맡긴 채 명상을 하다보면 어떠한 경지에 이른다고들 한다.
하지만 주인장(절대적인 힘, 즉 기적)의 손이 아니라면 갈 수 없는 봉인의 땅입니다. 그곳에 꽃게가 스스로를 던지기로 결심했었다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곳이었지요. 꽃게는 동족들의 도움을 얻어, 그렇게 비장하게 간장연 속으로 사라집니다.
꽃게는 봉인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집게를 관 옆에 들이밀었다. (중략) 바깥의 꽃게 무리는 경이에 찬 눈으로 간장연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꽃게가 결의에 찬 눈으로 간장연과 늙은 꽃게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더니, 스텝을 밟았다.
간장연이 그를 집어 삼켰다.
간장연이 그를 집어 삼켰다. 이 얼마나 비장미가 넘치는 장면입니까.
동굴로의 접근(Approaching the Cave)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갑니다. 누군가는 랍스터에게 희생을 당하고, 누군가는 주인에게 구원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재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도 약속의 날이 다가옵니다.
새우 무리가 엄한 데 정신을 파는 동안, 꽃게와 문어, 오징어 무리가 김치 냉장고에 올랐다. 바로 오늘이 약속의 날이었다.
늙은 꽃게가 자신을 희생합니다.
결국 모든 봉인이 풀렸다. 그리고 그의 집게가 부러졌다.
드디어 영웅이 등장합니다. 간장연의 시련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한 자가희생의 영웅입니다. 그 찬탄스러운 묘사 속에서 감격을 함께 나눠보시죠. (전 이 묘사를 볼 때마다 몸에서 소름이 돋습니다. 너무 멋있어서요)
간장연이 그를 토해냈다.
간장연 속에서 솟아난 그 모습은 실로 늠름하고, 위엄 있었다. 이 세상에 잠깐 들렀다 구원 받은 영덕대게의 풍모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눈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 의지를 반영이라도 하듯 흑갈빛 갑주가 은은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그는 집게를 꼼지락 대는 간장게장 무리를 뒤로한 채 늙은 꽃게에게 다가갔다. 부러진 집게를 흑갈빛 집게로 살짝 마주 쥐었다.
적과의 조우(The Ordeal)
자, 이제 결정의 순간입니다. 누구나 다 타는 목마름으로 기대하고 있었겠지요. 간장꽃게로 다시 태어난 주인공 꽃게는 랍스터의 수하인 새우를 하나하나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등장을 알립니다. 그리고, 랍스터가 그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지요.
신성한 식탁 위에 올라온 다른 존재의 기척을 느꼈는지, 랍스터가 흉흉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봤다. 간장꽃게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둘의 전투 묘사는 어느 무협지, 어느 영웅전설의 전투 묘사와도 비할 수 없습니다. 영웅이 폭군과 싸우는 광경의 비장함을 세상 어느 매체의 전투 장면과 비할 수 있을까요.
스텝은 쌍둥이 꽃게가 선보인 예의 그것과 똑 닮았다. 그러나 더욱 강했고, 힘찼다. 간장연에서 숙성된 관절과 갑주가 그에게 유수와도 같은 경지와 힘을 선사한 것이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유연하고 몰아치는 해일처럼 강한. 그가 랍스터 주위를 한참 뱅글뱅글 돌더니 잽싸게 집게를 내찔렀다. 랍스터가 흉기를 내려 가까스로 막았다. 간장꽃게의 집게가 튕겨나갔다. 뜻밖의 선공을 당하자 분을 못 이긴 랍스터가 흉기를 휘둘렀다. 간장꽃게는 재차 스텝을 밟으며 피했다.
영웅의 찬란한 탄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영웅의 장절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가 내뻗은 집게는 이음매를 정확히 꿰뚫었다. 랍스터는 남은 한쪽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간장꽃게를 바라보며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창을 통해 햇빛이 식탁을 비추기 시작했다.
햇빛을 온 몸에 받게 되자, 간장꽃게는 잠에 빠져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며칠밤낮의 싸움 후, 드래곤을 꿰뚫고 산성의 피에 죽음을 맞이한 고대 영웅서사시를 방불케 합니다.
보상(The Reward)
꽃게 스스로의 보상은 아닙니다만- 이 결투의 결과로 생성된 선물이 있습니다.
해산물들의 세상엔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주인장에겐, 간장꽃게의 맛이 찾아오지요.
귀환인가, 일상인가(The Road Back)
이것은 그냥 마지막 부분을 통째로 전합니다.
여기 이 부엌을 보라. 오늘도 따스한 햇살이 신성한 식탁을 비춰 달군다. 이제 모두들 순리대로 요리되어 식탁에 오르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정말로, 평화가 찾아온 것일까? 한 영웅적인 꽃게의 힘으로도 이곳의 틀 자체, 해산물은 그저 요리재료로서의 자신에 순응하고 구원에 열광할 뿐인, 이 체제 자체를 깨부술 순 없었던 걸까?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를 선사할 순 없었던 걸까?
부활(Resurrection)과 귀환(Returning with the Elixir)은 나중을 예비하며 아껴두고
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의 서사시입니까.
아마도 해산물들의 평화로운 냉장고 세계엔 세계를 랍스터의 폭정으로부터 구한 용사인 간장꽃게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장에게 먹혀 바다에서 다시 환생하는 그들의 미묘한 종교(?)관을 따른 부활은 아니겠습니다만, 용사답게 사라져간 꽃게가 분명 서해바다에서 부활해 쌍둥이와 함께 가장 멋있게 스텝을 밟고 있다가, 다시금 폭정이 발생하면 간장에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돌아온다는, 그런 영웅 전설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체제를 깨부수고 모두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를 선사해 주겠지요
아, 그리고 마지막까지 위트를 잃지 않은, 우리의 유쾌한 음유시인(모든 영웅담은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음유시인의 존재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법입니다) 파리에게 이 리뷰를 바칩니다.
참조글 : 영웅이 되기 위한 열두 단계,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