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에 호러를 좋아한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층간소음 (작가: 엄성용, 작품정보)
리뷰어: 환상괴담, 20년 9월, 조회 172

로맨스는 풋풋할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고, 투닥투닥거리면서 정들어가는 그 맛에 볼 수도 있고,

고구마 백만개 먹은 거 같은 암 걸리는 전개가 이어지다가도 마지막에 그 갈등의 타래가 풀려나가며

그간 꼬아놓은 매듭이 전부 풀릴 때 비로소 사이다를 원샷 때리는 듯한 청량감이 찾아오게 할 수도 있다.

SF 역시 한없이 웅장할수도 있고, 때론 현실보다 더 촘촘히 미시적인 부분까지 구축해서 독자를 그 세계관에

아주 가둬버릴수도 있다.  어쨌든, 장르 중에는 다양한 식감, 다양한 맛으로 연출할 수 있는 장르가 많다.

 

헌데 호러는 비슷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수작’ 소리를 들으려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칙이 있다.

그게 주술에 의존하든, 괴생물체의 습격이든, 혹은 13일의 금요일 밤 만나기 싫은 괴한과의 조우이든간에

호러는 일단 무섭고 봐야 한다!

귀신이 눈을 아무리 까뒤집어도, 칼로 찔러 유혈이 낭자해도,

살짝이라도 중간에 김이 새면 흥이 쭉 빠져버리는 것이 호러다.

 

물론 당연한 원칙이니만큼 호러 창작인들은 심혈을 기울여 무섭게 쓰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어렵다! 호러 독자들은 호러 창작인보다 더 호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당이 얼쩡거리면 작중 귀신이 ‘죄송합니다~’하고 순순히 물러갈 리 없겠구나, 예측하는 예보관이다.

수상한 괴한이 설쳐대면 그 옆에서 주인공 달래는 동료 A를 벌써 의심하고 있는 기민한 수사관이다.

호러 창작인들은 그런 독자를 이탈없이 붙잡아 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칼을 숨기고 엉뚱한 신발끈 얘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신발끈이 계속 풀리는 것이다. 짜증나게. 잘 묶었는데 또 풀리는 것이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절대 안 풀리는 법을 알아내서 그대로 묶었는데 그래도 풀리는 것이다.

어느새 독자는 예보도, 수사도 하지 않게된다.

몰입한 것이다. 저 놈의 신발끈이 어떻게 될 지, 묶일지, 또 풀릴지…

이때다. 한 눈 팔린 그때 창작인이 칼로 깊숙히 찌르는 것이다.

이때 아주 푹 담궈버려야 호러가 맛있어진다.

 

으아아.

오늘 아주 깊숙히 담궈졌다.

단편 [층간소음]이 날 칼로 찔렀다.

창작인이 설계한 만화경을 들여다보며 “흐헤헤 멋지당” 거리고 있다가

[층간소음]이 준비해놓은 전기톱에 갈려나간 기분이다.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독자인 나는 아직 ‘예측과 수사’를 개시할 때가 아니라며 그 이야기 속에 비무장인 상태로 들어섰다.

층간소음이다. 음음.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나 역시 저번 방에선 층간소음 때문에 많이 시달렸으니까.

어디 볼까. 무슨 상황인지. 주인공이 밑에 사는 집으로부터 항의를 듣는다.

쿵쿵거려서 시끄럽댄다. 주인공이 잘못했네.

근데 주인공은 그런 적이 없다. 그는 지압매트에 발을 올리고 있었고

욕실엔 있지도 않았는데 소리가 났다는 곳은 욕실이다.

주인공은 이웃을 기다리게 한 후 욕실로 다가간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쥐가 됐든 물건이 떨어졌든 욕실에 무언가 있었어야 할테니.

 

이때부터 나는 이 단편이 원고지 몇 매짜리였는지도 까먹은 채로

정신없이 읽어내렸다. 이 맛이다.

이 맛에 호러를 좋아한다.

단숨에 읽어내려가서 다 마신 음료수 뒤집어 털 듯 탈탈 털어도 활자 하나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야 마는 이 느낌.

이웃간에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나는 예측도 수사도 포기한 채

‘날 찔러라~’ 하고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곤 깊숙히 찔렸다. 작가의 설계도가 그대로 작동한 셈이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다.

과대포장이 없는 선물인데 리본 풀고 박스 뜯어보니 내용은 꽉 찬 멋진 선물이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 경고하기도 전에

상황이 날 끌고 들어가 바닥에 머리를 쾅 쾅 찧게 만드는 이 감칠 맛이란.

 

단편 [층간소음]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호러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겠다.

첫째, 일단 무섭고 봐야한다는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둘째, 내가 예측을 하지 않고 극의 흐름에 나를 맡길 수 있을만큼 술술 읽혔다. (몰입했다.)

셋째, 인물들은 체스판의 말처럼 정해진 임무와 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넷째, 분량이 너무 짧아 휘발성이 강하지도, 너무 길어 루즈하지도 않게 딱 앉은 자리에서 박살낼만큼 적당했다.

다섯째, 분명히 주인공의 일상이 비틀어진건데 읽고 나서 괜히 내 일상을 보며 흠칫 놀라게 하는 ‘뒷심’이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이라 어떤 연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라던지, 남이 참고할만한 리뷰는 못 되겠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또 호러를 특히 좋아하는 독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게 읽은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란 전개로 글을 읽기 시작해 마지막엔 ‘설마 내 주위에도…?’란 감상으로 끝난 탓에

어릴 적 괜히 거울이나 밤길을 무서워했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특히 그런 감상을 좋아해 공포라는 장르도 좋아하게 된 분이라면

나는 단편 [층간소음]을 자신있게 권하고 싶다.

보기좋게 푹 찔린 자신을 조우하게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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