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보고 재밌을 것 같아 들어간 작품이 꼭 내 머릿속에서 펼쳐진 상상처럼 재밌는 일은 로또 당첨 확률 만큼이나 낮다. 아니, 그보다는 높다고 해야겠다. 나는 로또를 사지도 않으면서 당첨을 바라는 부류의 인간이고 내 로또 당첨 확률은 늘 0%에 머무니까.
몸을 소재로 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하잘것없는 인간의 몸을 두고 뭐든 해 보려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산출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이런 이야기는 그래서 더 귀하다. 사실 꼭 맨몸이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꼭 물리적으로 뭐든 꿈쳐 둘 주머니 하나 없이 무력한 상태가 되어야만 감정적으로도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외면과 내면의 합치를 이루려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본능인가? 싶다가도, 그냥 단순히 우리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의심이 함께 목욕탕 증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해프닝이란 건 참 재밌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물들이 그 공간에 묶여 있음으로써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불쑥 하게 된다. 다른 차원의 렌즈를 통해 이 광경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보니 네 개의 점이 병목 현상처럼 어떠한 지점에 무리지어 있다가 일순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림이 떠오른다. 그 순간은 오히려 찰나이기 때문에 영원처럼 흐른다. 드디어 문을 열고 돌아온 일상의 풍경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이 있었어? 남는 건 썩은 도끼 자루처럼 허망한 기억뿐이지만 괜찮다. 그마저도 곧 잊어버릴 테니까.
한편으로는, 전부 잊을 걸 이미 알기 때문에 용기를 내 꺼내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더는 서로 연루하지 않을 관계가 주는 규정 지을 수 없는 편안함을 핑계 삼아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속내를 부끄럼 없이 꺼내 보이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목욕탕’이나 ‘맨몸’이라는 설정은 이 무대 위에서 단순히 인물들을 잠시 한곳에 묶어 줄 장치로써만 기능하게 된다. 이들은 서로의 대외적 자아를 알지 못하는 대신 그걸 벗어낸 맨몸을 잠시나마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인간 사회에서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라는 전제 하에) 맨몸의 정보값은 대수롭지 않은 가치를 가지므로 우리가 털어놓는 속내는 하잘것없는 맨몸의 기억과 더불어 비누 거품처럼 쉽게 씻겨 내려간다.
나는 사실 목욕탕을 다닌 기억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멈춰 있어서 내가 가진 대중 목욕탕의 이미지는 전부 미디어를 통해 심어진 가짜 기억이지만, 그래도 ‘아는 몸들’을 읽고 나니 개운하게 씻고 목욕탕을 나서며 풀풀 공중으로 흩어지는 열기와 서늘한 바람 냄새를 절로 상상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시 목욕탕을 함께 쓰는 시대가 올까? 목욕탕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런 날이 다시 와 주면 좋겠다. 요구르트를 쪽쪽 마시며 반쯤 마른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면 뜬금 없이 ‘안다는 게 뭘까?’ 같은 고민을 속으로만 주워섬기며 천천히 발길을 옮기는 그런 겨울날을 상상하고 싶은 9월의 초입이다.
산다는 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