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바라보게 된 습한 타일과 타일 사이의 균열된 실금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손길은 진짜 사람일까? 아니면 주인공인 말하는 스트레스로 인한 악몽의 일환일까? 비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사라진 그 형상을 바라본 그녀는 두려움에 다시금 뒤를 바라본다.
아버지의 음주로 인한 폭행, 엄마의 바람, 동생 방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강한 록 사운드. 이 집의 첫째 딸인 나는 아버지의 폭력은 피했지만 폭력과 욕설로 구타를 당하는 두 사람의 시린 눈빛과 방종으로 인해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있다. 서로의 대화가 없는 가족들의 일상은 저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만 갈 뿐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따스한 눈빛 조차도 없이 그저 마이웨이로 걷는다.
술을 먹었다 하면 욕설과 구타로 일삼는 아버지, 온갖 폭력과 욕설을 감내한 후에 몰래 뒤로 가서 다른 사내를 만나는 엄마, 폭력에 대한 반항과 이 남자 저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동생, 그리고 그것을 모두 방관 하는 내가 있다. 아버지를 말리지도, 폭력을 입지도 않는 그녀의 행동에 동생 혜진은 서스럼없이 무시하고, 썩소를 남기며 그녀를 조롱한다.
주인공인 나는 친구와의 관계 역시 적극적이지 않다. 친구인 선미가 성식을 소개 시켜 주었지만 그와 이렇다 할 관계는 아니다. 여전히 어디에서나 깍두기인 모습은 그녀가 어디에 마음의 닻을 내려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같다.
누군가에게도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들.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에서부터 내려오는 고전처럼 그려져 있어 폭력의 수위에 대해,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이렇게 오래되었음에도 우리는 왜 이 상황을 마주 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풀어낼 수 없는 가정 폭력에 그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술에 취해 자신의 아내를 장롱에 가두고, 두 아이들은 아버지를 욕실에 가두고, 이내 동생 혜진은 언니를 욕실에 가둔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나온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은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설까? 모든 인물이 저마다 자신의 이기심대로 하는 것과 달리 주인공은 그저 가만있다가 자신을 좋아하던 성식이 동생 혜진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동생에게 묻던 순간 동생에 의해 정화 되어 나온다. 결국 모든 이들이 정화되어 나왔지만 동생 혜진만이 살아남았다. 왜 그녀만 정화되지 않았을까?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어느 순간 극복하기 힘든 폭력에 만연되어 있음에도 시간이 흘러 그 순간이 체득이 되면 이내 ‘익숙하게’ 받아 들인다고 한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될 순간 조차도 우리는 늘 그 순간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많은 물음들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욕실의 괴물은 어떤 범주에 들어선 이들만 정화시키는지 애매모호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가장 자신을 표출하지 않았던 나와 친구 조차도 정화된 반면 혜진은 끝까지 살아남았으니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골몰히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균열된 가정 속에서 균열 속에서 나타나는 손길로 의해 정화되는 이야기는 깨진 접시를 다시 이어 붙인 만큼이나 조화롭지 못했다. 현실이라면 균열 속에서 나타나는 손길이 누가 되어야 할까? 라는 고민이 되었을 만큼 현실적이면서 소설 속의 상상이 잘 매치가 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