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단편은 사피엔스 작가님의 ‘꼬마, 새별되어 빛나다’의 프리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막과 황무지 배경의 포스트아포칼립스 물에 대한 리뷰 대신, 등장인물 중 선우민의 아버지 선우윤의 20년 전 과거를 소재로, 작가님의 동의를 받고 써보았습니다.
1>
말라붙은 풀과 모래 뿐인 사막 한가운데서 정말로 불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연발화였다. 진태가 선우윤의 어께를 치며 말했다.
“얼른 돌아가자. 귀신불을 보고 있으면 안돼.”
사막에서 저렇게 저절로 타오르는 불을 새별 사막의 정착민들은 귀신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귀신불이 보이면 늘 얼른 도망쳐야 했는데, 그 연기를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은 필시 죽게 된다고들 했다. 선우윤은 급히 모래 둔덕 아래로 도망친 진태와 달리, 끝까지 언덕에 남아서 귀신불이 타올라서 연기를 피어올리고, 결국 그 연기가 사그러드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 사구 아래로 내려오는 그를 진태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윤이 말했다.
“무서운 건 귀신불 따위가 아니야. 정말로 무서운 건 약탈자들이지. 레이더들이 연기가 나는 곳을 습격하니까 생겨난 미신일거야.”
하지만 이미 배낭을 매고 있던 진태는 가죽 가방을 챙겨 걷기 시작했다. 남은 플라스틱 가방 두개를 선우윤이 집어 들었다. 이번에 몰래 지방을 돌며 손에 넣은 새로운 작물의 종자와 묘목들이었다. 선우윤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그래봐야 죽는 것 뿐이잖아. 살아봐야 뭐해…”
그들은 시간과 해의 방향을 확인한 후, 열기 가득한 모래 바람을 거스르며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종자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건너 북쪽으로 왔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럴 때마다 선우윤은 이 뜨거운 모래 남풍이 싫었다. 모래 남풍이 불어오는 사막에서는, 코앞 까지 가기 전에는 백두산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막이 살아서, ‘살기도 싫고, 집도 싫다며? 그냥 거기서 죽어’ 라고 희롱하는 것 같았다. 윤이 앞서가는 진태에게 말했다.
“우리 다음 번엔 남쪽으로 가볼까.”
“남쪽? 바닷가?”
“아니 서쪽으로.”
진태가 갑자기 돌아서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남서쪽으로 가자고?”
“응.”
“남서쪽 어디까지?”
선우윤은 입을 다물었다. 진태가 말했다.
“그거 병이래. 너가 똑똑한거 나도 알아. 하지만 거기가서 죽으려는 사람이 너만 있는게 아니야. 원호 할아버지의 말을 안 믿어?”
“영감이 하는 말 중에 맞는 게 없었어.”
사막 한가운데 솟은 여러 산들과 그 중의 최고 백두산. 사람들은 모래 황무지와 누런 언덕 뿐인 그 고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북쪽으로는 끝없는 사막, 동쪽으로는 바다,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학의 땅이었다. 바닷가 옆 산맥의 거친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오르내리는 난민들이 가끔 있었지만 남서쪽으로는 갈 수 없었다.
황무지와 언덕들을 벗어나 남서쪽으로 가다보면, 푸른 지평선이 반짝이는 강물이 비치지만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 곳은 백년 전에는 평양이라고 불렸던 벌판으로, 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귀신이 다가오는 사람들의 생명을 빨아먹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귀신, 학. 이 지방의 사람들은 누구나 머리가 크면, 그 얘기가 행여나 약탈자들에게 잡혀 죽을까봐 멀리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사실이었다. 어느 시절, 어느 캠프에나 그 경고를 믿지 않고 평양 벌판으로 떠난 치기어린 사내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 곳으로 떠난 이들의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고, 절반은 돌아온다해도 며칠 안에 앓다가 죽었다. 겨우 캠프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버린 그들의 몸에서는, 불길하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아름다운 들판에 나무가 우거지고 강물이 흐르지만, 보이지 않는 학에게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열이 끓고 온 몸의 구멍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위험하다는 걸 느끼고 돌아서도, 이미 늦었다는 걸 온 몸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이 교훈을 주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로 전하고 죽어갔다.
진태가 말했다.
“왜? 핵한테 잡아 먹히고 싶어? 아니면 핵 얘기를 안 믿어?”
“아냐 믿어. 믿어서 가보고 싶어.”
“무슨 말이야?”
“난 죽을 줄도 알면서 거기로 갔던 사람들이 굳이 돌아와서 마을에서 죽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건 애초에 그 놈들이 학을 믿지 않아서 그래. 죽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고 간거야. 그래서 자기가 틀렸으니까 후회하고 돌아온 거지. 하지만 죽을 줄 알고 간다면 돌아올 이유가 있을까?”
“…윤아. 넌 왜 늘 그렇게 비관적이냐.”
“아니. 난 긍정적인거야. 평양성을 지나가면 그 남쪽 바다 밑에는 서울이라는 나라가 있데.”
“서울?”
“어 거기에는 없는 게 없데. 물 속에 엄청난 고대의 물건들이 그대로 잠겨있데.”
“나도 할머니한테 들은 적 있다. 그 말을 믿어?”
선우윤은 배낭을 고쳐 매며 말했다.
“당연히 안 믿지.”
2>
선우윤과 진태는 백두산과 태양을 기준 삼아, 황량한 언덕과 언덕 사이에서 자신들의 캠프의 흔적을 돌며 징표를 찾았다. 약탈자들을 피해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면서, 잠시 떠난 가족들을 위해 남기는 그들만의 암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날 밤에 겨우 캠프를 찾아 돌아왔고, 윤은 네 달 만에 텐트 밖으로 뛰어나온 그의 아내을 보았다.
“아직도 있었어?”
그게 늘 윤의 인사말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선우윤은 아내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는 식물학자였다. 식물학자라고 해도 멀리, 그리고 몰래 숨어 다니며, 야산이나 다른 정착지의 밭에서 못 보던 작물들과 과일의 종자를 훔쳐내는 일이 전부였다. 하여튼 그렇게 몇 달 동안 외지를 돌아다니다가 캠프로 돌아오면 꼭 서너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져 있었다. 그의 아내 규민은, 그의 세번째 여자였다. 이전의 여자들은 몇 달 동안 캠프를 떠나서 식량과 종자를 구하고 돌아오니 어딘가로 잡혀가버린 뒤였다. 가족을 만들고 정을 주어봐야, 잃으면 더 괴롭기만 했다. 그렇다고 선우윤은, 캠프에 처박혀 벌벌 떨면서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약탈자들을 피해 도망다니고 굽신거리는 일꾼 체질도 못되었다.
지금의 아내 규민을 만난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서너달씩 캠프를 떠날 때마다, ‘다음에 돌아오면 이제는 죽었거나 잡혀가 있겠지’하고 생각해왔건만, 벌써 3년이 지난 것이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동부 바닷가의 산맥을 따라서 올라온 난민의 딸이었고, 미처 코를 눌러 싸매지 못했다. 그래서 오똑하게 솟은 콧날을 볼 때마다 그는 무섭고 화가 났다. 이 지방에서는 여자애가 사춘기가 되면 붕대로 코를 싸매어 눌러놓았다. 예쁘면 무조건 약탈자들에게 잡혀가서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백두 산지 근방에는 수십명이 무리를 지은 약탈자의 근거지가 7개 있었고, 그 주변에 수백개의 조그만 캠프에 정착민들이 흩어져 살았다.
약탈자들 중에는 정해진 시기마다 공납을 받는 부류도 있고 자기들이 내키는 대로 뛰쳐나와 쓸어가는 부류도 있었다. 정착민들이 자기들 구역의 재산이자 수입이기 때문에 함부로 쏘거나 죽이지는 않았지만 간혹 그들의 성미가 거슬리는 날에는 지독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규민은 윤의 전처, 전전처가 남긴 자식들도 살뜰히 챙겼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이 넘치고, 자기가 낳은 자식도 버리는 시대인데. 규민이 자기 몫의 음식을 아이들에게 줄 때마다, 윤은 화를 내며 말했다.
“주지마 당신껀 당신이 먹어!”
하지만 규민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면 윤은 정말로 화가 났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굳이 살아남도록 길러봐야 뭐하려고. 그건 절대 아이들을 위하는게 아니야. 그냥 당신 만족이지!”
그러면 규민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진 선우윤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다시 덧붙였다.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몰라. 나는 레이더들에게 자식들이나 부인을 팔고 살아남고 싶지 않아. 죽을 기회가 생기면 미련없이 죽을거야. 그러니 우리 대충 살자고.”
3>
윤은 외지를 돌며 혼자, 혹은 다른 동료와 함께 새로운 작물의 종자를 수집해오는 채집가이자, 좀도둑이었다. 동시에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작물용 급수기의 장인이기도 했다. 선우윤은 긴 철판을 가로로 반으로 접은 후, 그 뾰족해진 테두리에 10센티미터 간격으로 구멍을 뚫었다. 그는 여기저기서 구해온 귀한 쇠막대 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송곳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송곳 역시 쓸만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윤은 자기만의 재료를 사용하여 여러가지 종류의 송곳을 만들어내고 끝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그는 V자형 금속판을 엎어놓고, 정확히 10센티 미터의 간격으로, ‘퍽, 퍽, 퍽, 퍽’ 소리를 내면서 그 꼭지점을 따라서 구멍을 뚫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바의 양쪽을 틀어막고 작물들의 위에 설치해 놓으면, 비가 왔을 때 고인 물들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면서 작물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원리였다. 이 송곳이란 도구를 외지에서 찾아낸 것도 윤이 최초였다. 바깥 땅 여기저기, 땅 속에 묻힌 고대의 유물들 중에는 신기하고 유용한 것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윤의 송곳을 얻어다가 가죽이나 천막을 엮고, 땅을 파거나 작업대를 만드는데 쓰기도 했다.
어느날, 윤이 캠프 근방에서 고물을 줍고 있을 때였다. 언덕 너머의 길가에서 자동차 소리가 났다. 약탈자들이 분명했다. 윤은 돌아서서 도망치려다가 멈칫했다. 평소처럼 여러대의 자동차가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한 대의 자동차가 어딘가에서 헛되이 요란하게 공회전하는 것 같았다. 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언덕을 기어올라 길가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한대의 트럭 카라반이 구덩이에 빠져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한대라도 약탈자야. 피하는게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카라반 뒤에 실린 신기한 도구들 때문이었다. 저런 구시대의 유물과 도구들은 정착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치품에 불과했다. 가지고 있어봐야 레이더들에게 빼앗기는 게 당연했고, 그래서 정착민들끼리 팔거나 살 수도 없었다.
곧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결국 내려섰다. 그는 윤보다 열살 정도가 어려보였다. 덩치는 크지만 순해보이는 인상의 남자로, 트럭의 바퀴 아래 서서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카라반 위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건 뭘까? 윤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윤은 이러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언덕을 내려가 그에게 향했다. 그 남자가 윤을 돌아보자, 먼저 황급히 인사를 건냈다.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이 근처의 정착민입니다.”
“그러면 고맙죠!”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선우윤의 시선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조그만 플라스틱 상자에 와닿았다. 정말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트럭을 빼내야겠는데…어디 판 같은게 없을까? 아! 이것 신기해보여요? 그러면 가져요. 혹시 다른 놈들이 뺏으려고 하면 강만근이 줬다고 해요. 아무도 건들지 않을 겁니다.”
“아 네..그럼 제가 얼른 가서 판을 몇개 가져오겠습니다.”
캠프 근처에 숨겨둔 나무판자를 들고 트럭으로 돌아가는 내내, 윤은 자신에게 준다는 그 플라스틱 상자를 생각했다. 정말? 정말로 그걸 나한테 줄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약탈자들이 정착민들을 상대로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 얼마 후 나무판을 바퀴 밑에 깔자, 트럭은 요란한 엔진음을 내고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몇 미터를 안가다가 멈춘 트럭에서 강만근이 내렸다. 그는 정말로 그 플라스틱 상자를 윤에게 내밀었다.
“자 가져요.”
윤은 조심스럽게 물건을 받아들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아아 이건 무전기라는 겁니다.”
“무전기요?”
“네. 전기로 작동하는데 이걸 가지고 있는 다른 놈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지요.”
“네?”
만근은 무전기 뒤에 달린 손잡이를 몇번 돌리고 주파수 스위치를 올리며 말했다. 바로 무전기에서 요란한 고성이 들려왔다.
“아! 누구야 만근이냐?!”
“왜?”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아버지가 정말로 너 죽인데!”
“안가! 시발 죽이라고 해!”
그리고 강만근은 무전기를 꺼서 다시 윤에게 내밀었다.
“이건 우리 라이더들 사이에선 총보다 귀한 물건입니다. 난 필요 없으니 가져요.”
“저…총보다 귀하다니…그렇다면 혹시 대장님 아니십니까?”
“내가 두목의 친아들이지만 대장은 아니에요 흐흐”
“귀하신 분이신 것같은데..어쩌다 여기에..”
“이제 상관없어 답답한 새끼들! 나는 혼자 남쪽으로 가서 자유롭게 살겁니다!”
“네?…하지만 남쪽에는…”
그가 말했다.
“혹시 주변에 캠프가 있습니까? 오늘 밤 신세 좀 집시다.”
“네..”
그제야 윤은 자신이 지나치게 호기심을 누린 벌을 받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레이더를 캠프에서 묵게한다니, 자칫하면 캠프가 몰살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만근이 말했다
“그리고 그 쪽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뵈는데 형이라고 부를게. 나한테도 말 놓아.”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강만근은 벨트에서 권총을 뽑아 윤의 코앞에 겨누며 말했다..
“만근아라고 불러. 형. 안 그러면 정말로 쏠거야.”
“아 그래그래! 만근아!”
“하하하하”
“으으으…으하..하하하하…”
선우윤은 자신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린 강만근을 따라서 웃어버렸다.
4>
그 날부터 강만근은 캠프 영감의 가장 큰 텐트에서 묵기 시작했다. 차마 사람들에게 호기심 때문에 먼저 다가가서 도와주다가 데려왔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 길에서 라이더와 마주쳤고, 어쩔 수 없이 데려오게 된거라고 둘러대었다. 그래서 모두가 강만근을 무서워했고, 텐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윤만은 그에게 음식을 갖다주려고 매일 그의 텐트에 드나들었다. 그는 매트 위에 하루 종일 누워서 공상에 빠져있었다. 촌장이 내어준 가장 큰 텐트의 한복판에는 카라반에서 내린 알 수 없는 도구와 상자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새 음식 그릇을 내려놓은 선우윤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만근아..”
“왜 형?”
“저 안에는 뭐가 들어있니? 물이니?”
“저거? 저건 물이 아니라 휘발유야.”
“휘발유?”
“응 자동차나 발전기를 돌리는 휘발유”
“자동차를 돌려…?”
만근은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매트에 매달린 천을 길게 찢어냈다. 그리고 기름통 뚜겅을 열고 그 끝을 담갔다가 꺼냈다. 땅바닥에 길게 늘어놓은 천에,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선우윤은 그가 하는 행동, 그가 쓰는 도구 하나하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천에 불이 붙자, 선우윤이 외쳤다.
“불이야! 얼른!”
하지만 강만근은 선우윤이 발을 들어 불을 끄려는 것을 막았다. 흐릿한 불꽃이 기름이 묻은 천에서 일렁일 뿐이었다. 선우윤은 놀라서 외쳤다.
“이럴수가!”
강만근은 천조각의 기름이 묻지 않은 부분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걸로 밤에 불을 밝힐 수도 있지. 이 기름이란 건 아주 귀한 물건이야.”
“아…그러면 이건 뭐야…?”
“그건 라텍스야. 필요하면 그것도 가져가.”
“라텍스?”
“어. 마음대로 갖다가 써. 땡볕에 놓아두지만 마. 불이 날 수도 있으니까.”
“불이 난다고?”
“그래. 몰라? 이 물건들은 땡볕에 사막에 놓아두면 불이 나는 것들 천지야. 그래서 다 여기 내려온 거라고.”
“혼자서 불이 붙는다고? 귀신불처럼?”
“못 믿겠으면 해보던가.”
강만근이 웃으며 라텍스를 한덩이 그에게 던졌다. 선우윤이 말했다.
“만근아 너는 학자니?”
“학자?”
그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배를 잡고 한참 웃었다.
“내 입으로 말하면 웃기지만, 나는 기지에서도 제일 멍청하다고 소문이 난 놈이야. 그런데 나한테 학자라니! 큭큭. 정말 아무리 부락민들이 무식하다지만 너무 심한걸.”
“…”
하지만 그 날부터 윤은 그의 곁에서 하루에 한가지씩, 라이더들의 연료나 기구에 대해 얻어들었다. 강만근은 멍하니 누워있다가, 윤이 찾아오면 귀찮아 하면서도 다정하게 이것저것 알려주곤 했다. 어느새 윤은 정말로 그를 동생처럼 여기게 되어 버렸고, 그가 규민을 심상치 않게 바라보는 낌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며칠 후, 윤은 만근에게 받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매트에 앉아 있었다. 그 때, 강만근이 다가왔다.
“만근아 무슨일이야?”
“혼자 있어?”
“아니..”
“여자는 안에 있나?”
“여자?”
텐트 안에서 겁에 질린 규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강만근이 끅 하고 일부러 트림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생각은 해봤냐? 나쁜 년아. 내가 기다려준 시간이 얼만데.”
“…그게 무슨 말이야 만근아?”
윤이 벌떡 일어났지만, 강만근은 순식간에 텐트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규민이 소리를 지르며 안쪽으로 도망쳤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 나랑 같이 캠프로 가자니까? 이제 지친다 지쳐.”
윤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강만근은 마치 술래잡기 하듯, 그 좁은 텐트 안에서 규민의 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어? 이리와. 나랑 결혼하자고. 내가 북산파를 뒤엎으면 너는 백두의 왕비가 될 수도 있어!”
“만근아!”
강만근은 갑자기 권총을 뽑아들며 윤에게 겨누고 말했다.
“이 미친놈아. 부락민 주제! 너 한번만 더 입 열면 죽을 줄알아!”
하지만 선우윤은 강만근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그러지 마라 만근아. 형한테 이러지마!”
“이게 정말!”
선우윤이 붙잡은 강만근의 손에 잡힌 권총에서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되었다. 반대편 텐트 벽에 거대한 구멍이 났고, 캠프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선우윤과 강만근은 서로 부둥켜 안은채 텐트 안을 구르기 시작했다.
“당장 안 떨어져? 너 정말 죽을래?”
“부탁이다 만근아 이러지 마라 부탁한다 제발”
“이 놈 정말 제정신이 아니잖아? 너 정말 죽었다”
윤은 강만근의 왼주먹으로 무지막지하게 두들겨맞으면서도 그가 붙들고 있는 권총 만은 놓지 않았다. 몸싸움을 하는 사이에, 텐트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에게 받은 물건들은 모두 바닥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 귀하다는 휘발유 한통마저 엎어져서 텐트 바닥에 가득 흘렀다. 두 사람은 휘발유 위로 한참을 구르다가 일어났다. 만근에게 얻어맞고 구석에 처박힌 윤은,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만근은 이상하게도 그를 쏘지 않았다. “이런 제길” 이라고 할 뿐이었다. 윤은 그 상황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만근아 제발 그러지 마라. 나를 좀 봐다오.”
“닥쳐. 당장 죽여버리기 전에.”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얼른 나를 죽여다오. 그런데 왜 안 쏘는거니?”
“이 병신아. 우리 둘다 기름을 뒤집어 썼잖아. 불꽃이 튀면 둘다 타죽는다고!”
윤은 알 것 같았다. 기름에 불이 붙는다더니. 그래서 쏘지 못하는 것이구나. 그렇다. 이제 강만근을 살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가 이대로 캠프를 떠나면 레이더들이 몰려와서 모두를 몰살시키고 규민을 잡아갈 것이다. 늘 이런식이다. 그래서 캠프에 레이더를 들이면 안 되는 것인데,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윤은 입술을 깨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규민은 아직 텐트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윤이 규민에게 말했다.
“규민아. 거기. 그거 들어.”
“뭐를?”
“거기. 박스 위에 물 같은거 들어있는 작은거”
“이거?”
“응”
그건 며칠 전에 강만근이 윤에게 준 라이터였다. 윤이 규민에게 말했다.
“불을 켜. 내가 어제 가르쳐 줬지?”
규민이 몇 번을 시도한 후 라이터에서 불꽃이 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본 강만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발 설마!”
“규민아 그대로 조심해서 입구 쪽으로 가!”
“응? 이게 뭔데? 여보. 이걸 어떻게 하라고?”
규민이는 불꽃이 달린 라이터를 들고 천천히 텐트 입구로 걸어갔다. 텐트 밖, 규민이의 등 뒤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레이더를 들여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등,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는 등의 얘기가 들렸다. 강만근이 외쳤다.
“제길! 같이 죽자 이거냐? 지독한 부락민놈.”
규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라이터를 들고 텐트 입구 바깥으로 물러났다. 이제 선우윤이 ‘그걸 바닥으로 던져!’라고 소리치면 모든게 끝이었다. 강만근이 텐트 입구 쪽으로 슬그머니 나서자, 선우윤이 외쳤다.
“움직이지마! 나쁜 놈. 넌 끝장이야.”
“이런 니미..”
규민은 자기 바로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강만근을 보고 덜덜 떨면서 말했다.
“무슨 말이야? 여보? 끝장이라니?”
“그 라이터 잘 들고 있어. 이제…”
“이제?”
라이터를 바닥으로 던져! 라고 외쳐야하건만, 하지만 그 마지막 말이 선우윤의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살고 싶지 않다…살아봐야 소용없다…때가 되면 기꺼이 죽을 것이다…라고 버릇처럼 말했던 순간들이 무색했다. 어릴 적 모닥불에 검지 손가락을 데어 아팠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죽는다는 것이 무서웠다. 머뭇거리는 윤을 보고 강만근이 조금씩 미소짓기 시작했다.
“뭐야? 왜 뜸 들여?”
그리고는 그는 규민에게 말했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 좀 봐줘라. 니 남편이랑 나를 같이 죽일 셈이냐?”
“네?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당신이 알려줘! 나 이제 어떻게 해야돼?”
그녀는 손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윤이 말했다.
“그거..그 라이터를…조심해서 들고 있어…그리고 그걸…”
“응?”
그때 순식간에 강만근이 규민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텐트 안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꼿꼿이 라이터를 바닥에서 떼어놓았다. 강만근이 피식 웃으며 총구를 그녀의 하복부로 겨누었다. 탕! 그리고 규민의 복부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엄마!”
마침 텐트 앞에 와있던 막내딸 린이 비명을 질렀고, 강만근이 여자 아이를 낚아채서 어께 위로 올린 후 그대로 떠나버렸다.
“규민아!”
그녀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흘리며 천천히 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기진해진 몸뚱이로 죽어가고 있었고, 라이터를 바닥에 떨어뜨리면 모든 것이 불에 타 사라질 순간이었다. 윤은 모든 걸 포기하고 바닥에 나자빠져있었다. 하지만 규민은, 마치 신에게 바치는 불꽃을 봉납하기 위해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두 손목을 공중으로 쳐들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5>
그날 이후, 선우윤은 입을 닫았다. 툭하면 내뱉던 ‘살아서 뭐해’라던가, ‘대충 해’라는 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토록 생명에 회의적이었던 자신이, 하필이면 그 절대적인 순간에,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삶을 맞바꾼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그 순간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지만, 말할 수 없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제 텅 비어버린 텐트, 엄마를 찾는 민의 칭얼거림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캠프의 다른 주민들이 남은 아이들을 데려가서 보살폈지만, 레이더를 데리고 온 선우윤에게는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선우윤은 깨달았다. 시기를 놓쳤을 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만약 이제라도 죽는다면 그 놈을 찾아서 죽이고 같이 죽으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 밤 선우윤은, 자신의 가득찬 송곳 가방을 들고 가장 가까운 레이더의 캠프로 찾아갔다. 멀리 보이는 캠프의 입구에는 보초도 없었다. 감히 어떤 부락민이 레이더를 습격하려 들겠는가. 횃불이 밝히고 있는 정문을 바라보며 선우윤은 몇시간 동안 숨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새벽 3~4시 쯤에 이르러, 윤은 천천히 숙소를 돌기 시작했다. 약탈자들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조용히 기어들어가서, 한명의 심장에, 한 번에 한 개씩 배수구를 뚫어놓았다. 십센티미터 간격으로 한개씩. 늘 하던 대로였다. 그리고, 그러다 들키면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으면 그만이었다.
어느 방에서, 퍽 소리와 함께 한 남자를 보내버리고 얼굴을 확인하며, 강만근이 아닌 것을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옆에서 잠들어있던 여자가 돌아보더니, 죽은 남자와 윤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윤은 순간적으로 그 여자의 가슴에도 똑같은 구멍을 박았다. 하지만 가슴에 꽂힌 송곳의 손잡이를 부여잡은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왠지 그녀는 그의 첫번째 아내 역할을 했었던 여자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부여잡고 입술을 떨면서, 어둠 속에서 윤을 알아보았는지 아닌지 모르는 얼굴로 죽어갔다.
윤은 더 이상 나무 뒤에 숨지도, 기어 다니지도 않았다. 실성한 듯, 약탈자들의 기름 램프까지 챙겨서 숙소를 돌기 시작했다. 그가 한 방에서 나와 다른 방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본 약탈자가, ‘안 자고 뭐해?’라고 하길래, 윤은 ‘할일이 있어’라고 대답했다. 그날, 백두 지역에 있는 7개 지파의 레이더 근거지 중 하나였던 남산파 레이더 60여명이 몰살 당했다.
몇 주 후 또 하나, 또 하나, 모두 총 네 개의 근거지가 한달만에 습격을 당해 전멸했다. 윤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를 통해 레이더들이 혼란에 빠져서 허둥대고 있음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외지에서 침입한 암살단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면 북산파가 독재를 하기 위한 모략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모든 레이더들을 이해못할 방법으로 죽여 놓은 후,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원은 그렇다쳐도, 레이더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총이었다. 하지만 네개의 근거지가 전멸되는 동안, 모든 총기와 전자기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귀신(팬텀)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해의 겨울에 남은 3개의 지파 중에, 북산파와 남은 두개 파의 연합부대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북산파는 패배하여 잔당들은 남쪽으로 도망쳤고, 남은 두개의 파벌 사이에도 배신과 내전이 반복되어, 남은 레이더는 고작 3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자, 부락민들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위해 레이더들을 쓸어버리는 귀신이 강림했으니, 우리가 들고 일어날 때라는 계시였다. 그래서 정착민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과 독립 부대가 결성이 되었다. 그 리더가 캠프 마다 돌아다니며 남자들을 설득해서 프로그램에 가입시켰다.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만 자는 폐인이라고 알려진 선우윤도 억지로 프로그램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초기 정착민들의 부대는 레이더 잔당들과의 전투에 패해서 도망치고 말았다. 아무리 사기가 올랐다고 해도, 싸움에 능숙한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총기의 숫자와 다루는 실력이 열세였다. 그나마 손에 익은 짧은 칼과 나무 창으로는 총을 잘 다루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백명이 넘는 정착민 사내들이 고작 열댓명 정도되는 레이더들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어느 저녁에 레이더 열댓명 정도가 정착민 전투원들을 비웃으며, 캠프의 코앞에 불을 피우고 저녁밥을 해먹고 있었다. 부대의 막사에서는 지휘관의 절반을 잃은 상태에서 차라리 항복하느냐, 오늘밤 마지막 공격을 하느냐라는 문제로 마지막 논쟁이 벌어졌다. 그 때 선우윤이 나서서 말했다. “내가 팬텀이오. 별 말 하지 않겠소. 그냥 오늘밤 기습을 내일로 미뤄주시오.” 모두 황당했지만, 도저히 뭐라고 반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짓말이라도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정착민 지원 부대는 정말로 그 레이더들의 야영지에서 고스란히 죽어 넘어진 시체들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선우윤이 전설적인 무력과 기민함을 갖춘 전사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죽을 장소를 찾아다녔을 뿐이다. 여러 차례 운도 따랐다. 송곳을 들고 숙소에서 나온 그를 본 레이더의 권총이 불발된 적이 두 차례나 있었고, 어둠 속에서 그를 보고서도 자객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돌아누워버린 남자들도 많았다. 그가 전설적인 전사였던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후에 우연히 전설이 된 것 뿐이었다.
그 후로 줄곧 그런 식이었다. 몇 주 정도의 텀을 두고, 소규모의 레이더 캠프의 인원들이 하룻밤 만에 몰살되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백두 지역의 레이더들은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정착민 부대들이 하는 일이란 흰 옷을 입고 시체를 수거하여 장례를 치르는 작업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화이트라이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선우윤은, 백두 지역의 7개의 캠프가 모조리 정리된 후에도, 시체들 속에서 강만근을 찾지 못했다. 아마 그는, 북산파의 내전 당시, 패해서 남쪽으로 도망친 사람들 속에 섞인 모양이었다. 강만근을 죽이려다가 자기도 죽는 것만을 생각해온 선우윤에게, 이렇게 혼란스러운 결과는 없었다. 남쪽땅은 귀신 학이 지배하는 땅이었기 때문에 모두 북산파의 잔당들이 죽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선우윤은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에 그 놈이 분명 살아있을 것이고, 자신은 그 놈을 잡아 죽이는 순간까지만 덤으로 더 살면 되는 것이었다.
모든 레이더의 캠프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총기가 정착민 지원팀에게 압수된 후, 그는 사람들에 의해 새별성 라이더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지독한 암살자라는 걸 모르는 부락민들에게는, 지금 우리 조직의 사령관은 뛰어난 ‘식물학자이자 곡물학자’라고 홍보했다. 모두 늘어나는 식량 사정과 안정되어가는 생활을 선우윤의 덕으로 돌렸다. 선우윤은 더 이상 혼자 야밤에 레이더의 캠프로 기어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팬텀이란 이름은 익명의 소수 정예원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필요하다면 한명을 골라 비슷한 암살 작업을 맡기기도 했지만, 물론 더 이상 송곳이 아니라, 각자의 손에 맞는 짧은 블레이드를 사용하도록 했다.
1년 전 쯤이었다. 태백 능선을 따라 올라온 난민들이, 학의 땅과 서울 바다, 그리고 능선 사이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능선과 학의 땅 사이에, 적당하게 거리를 두면 충분히 사람이 살 수 있고, 그곳에 수많은 정착민의 캠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캠프들을 휘어잡고 있는 서너 개의 레이더들 중 가장 악질인 놈, 그 놈의 이름이 바로 강만근이라고 했다. 선우윤은 20년만에 그 이름을 전해 듣고, 아무런 감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팬텀을 보내 그의 소재를 파악하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강만근이 사는 곳이 확인되면 마지막으로 자기가 직접 찾아가서 잠들어 있는 그 놈의 가슴에 배수구를 뚫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삶을 마감하는 꿈을 몇 번이나 꾸어왔던가. 하지만 선우윤은 두 눈을 반짝이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선우민과 대원들 앞에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제 가서 처리해’라고, 늘 하던 대로 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