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감상)살인이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악행으로 받아들여진다. 살인이란 단어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섬짓할 정도이다. 그래서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을 하기 시작한 시절부터 살인은 항상 모든 매체에 회자되어 왔다.
*** 여중생 살인 사건, **시에서 한 여성이 유아 시신 유기. **동 연쇄살인사건. 살인과 관련된 사건이 알려지면 그 순간 부터 뉴스 메체는 일종의 전쟁을 선포한다. 누가 먼저 그 기사를 쓰고, 누가 더 자극적으로 제목을 달까.
영화 등의 미디어 매체도 마찬가지이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 또한 많은 메세지를 담고 있지만 보여지는 이야기는 ‘공기총 연쇄살인범 안톤 쉬거가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고 어떻게 위기를 헤쳐 나가냐’ 이다. 이 영화는 매순간 입에 담기도 뭣한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지만 평론가들은 열광한다. 그 행위 자체에 많은 메세지와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러 매체에서 살인은 극의 긴장을 위한 장치로 또는 삶과 죽음에 관한 심오한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일종의 클리셰로 사용한다. 이건 <1학년 5반 최유나는 살아 있는 것을 찍지 않는다>도 마찬가지이다.
목련고 시리즈의 두 번째 단편작인 이 작품은 1인칭 화자인 남주와 학생 사진 작가 최유나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 또한 보여지는 이야기는 남자 주인공의 연쇄 살인을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극 중에서 그것을 아는 인물은 최유나이다. 유나는 처음부터 남주의 살인 행각을 알고 있었고,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마치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의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사냥꾼이 안톤 쉬거의 자취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극의 절정에 다다르자 남주는 자신의 사진을 찍었던 최유나의 행동 동기를 알게 된다. 최유나는 ‘살아 있는 것을 찍지 않는 다’란 모토로 사진을 찍어왔던 사진 작가이다. 그 모토는 최유나가 연쇄살인범인 남주를 따라다니고 자신의 집까지 초대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녀는 연쇄살인범인 남주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남주의 사진을 계속 찍어왔던 것이었다.
그렇게 최유나의 행동 동기를 알게된 남주는 뜻밖에도 그녀를 살인하지 않았고, 그녀가 찍은 사진에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한다. 유나 또한 남주의 살인 동기와 행동에 끌리게 되고 모든 오해와 갈등은 해소가 된다. 그렇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이 탄생하게 됨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절정과 결말 부분에서 유나의 행동 동기에 해석이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1학년 5반 최유나는 살아 있는 것을 찍지 않는다.> 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는 다른 결말로 간다. 이 이야기에 악역과 선역은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악역과 선역이 극적으로 갈등을 해소하고 타협하는 방식으로 결말을 이룬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첫 번째 해석은 이렇다. 최유나란 소녀가 생명이 죽은 모습에 만족하지 않았고,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 또한 찍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남주와 감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유나라는 17살 소녀는 매체에 잘못 노출됐거나, 도적적인 관념을 배우지 못한 미성숙한 소녀로 그려진다. 남주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소년 가장과 다름없었다. 남주의 살인 동기는 그런 비참한 현실에서 시작된다. 그 비참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 살인을 취미로 삼아 버렸고, 그렇게 삼은 취미는 극히 개인적인 자기 만족으로 이어졌고 말이다. 한 마디로 남주는 전형적인 후천적 사이코패스 였다. 그러니 누군가가 손만 뻗어 준다면 붙잡을 그 소년이 감정이 파괴되고 우리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한테는 그런 남주는 ‘죽어 가는 것’이라 볼 수가 있겠다. 그러니 어쩌면 유나에게는 그것이 보였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유나는 남주의 사진을 찍고 남주의 행동에 끌렸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두 번째 해석은 이렇다. 최유나란 소녀가 그동안 살아 있지 않는 것을 찍지 않았던 이유는 살인 욕구에 대한 ‘대리 만족’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이 된다면 유나라는 캐릭터가 더 잘 와닿을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사이코패스 적인 성향이 발현되는 아이들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치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의 삶을 끊는 것이 그들에겐 희열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들은 본능적으로 약한 대상을 먼저 해코지 한다. 곤충을 죽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개와 고양이 같은 인간 사회에 적응한 동물들 까지 말이다. 최유나라는 소녀 또한 현실적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힘과 기술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자신이 직접 생명을 해치는 것은 ‘더럽고 힘든 일’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대리 만족으로 죽은 동물들을 찍었고 결국에는 남주가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남주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세 번째 해석은 이렇다. 최유나는 할리퀸 같은 성향의 인물이다. 대중에게 제일 잘 알려진 싸이코패스인 조커의 여자 친구 할리퀸은 처음엔 조커와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학에 심취한 열성적인 의학도였고 그만 조커의 정신 감정을 하다가 조커에게 빠져버린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해석 모두 <노인의 위한 나라>에 나오는 사냥꾼과 유나가 극명히 다른 성향이란 걸 알려준다. <노인의 위한 나라>의 사냥꾼은 연쇄살인마 안톤 쉬거를 이용하려 했지만 최유나는 연쇄살인마인 남주에게 감화되어 버렸다. 그러니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캐릭터와 살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알려진 캐릭터를 한국식으로 재조명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나라는 인물이 이 이야기의 중축이 된 것만으로도 반도 작가의 두 번째 단편선은 흔한 ‘싸이코패스’물의 이야기와는 극명한 차이를 둔다. 왜냐하면 유나라는 인물의 행동과 선택이 우리에겐 살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유나가 만약 필자의 첫 번째 해석에 알맞는 인물이라면 그만큼 할 말이 많아진다. 정말로 살인 행위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정상인이 없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무수한 매체에 노출 되어 있고, 영화에서 묘사되는 살인 행위를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살인 행위는 비단 ‘이유 없는 살인’ 뿐만이 아니다. ‘증오로 인한 살인’이 될 수도 있고, ‘대의를 위한 살인’ ‘생존 욕구에 의한 살인’이 될 수 있다. 이건 스릴러 장르의 매체 뿐만 아니라 히어로, 전쟁, 재난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살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최유나란 소녀의 행동과 선택은 이런 생각을 비튼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