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사실주의 화가들은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화가들처럼 신화나 역사의 이상화된 주제를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화가가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나 농민, 시민들의 일상을 주요 주제로 삼아 이를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는 그릴 수 없으며 한 시대를 사는 미술가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그릴 수 있다“고 했던 귀스타브 쿠르베의 말은 사실주의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사실주의에 이어 새로운 예술인 인상주의가 등장하게 된 요인으로 크게 3가지가 언급된다. 첫번째 요인은 ‘튜브 물감‘의 등장이다. 튜브 물감은 19세기 중반이 지나 등장했다. 이전에는 안료를 기름에 개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날 갠것은 그날 쓰지 않으면 굳어서 사용할수 없었다. 튜브 물감이 등장하면서 물감 저장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화가들의 행동패턴이 변화할 수 있었다. 화실 밖을 나와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가 가능해지면서 화가들은 대자연과 빛에 심취할수 있게 된 것이다. 두번째 요인은 ‘철도‘의 등장이다. 1840년도 프랑스 철도망의 완성되면서 여유 있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교외 나들이붐이 일었고, 시민들은 이전 시대에 비해 원하는 곳 어디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세번째 요인이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사진‘의 등장이다. 공식 특허 등록을 기준으로 하면 사진의 발명은 1839년 다게르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의 발명으로 인간의 시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사물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나 세부 디테일까지 포착이 가능해졌다.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이전 예술과 다르게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가지고” 독특한 회화적 효과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진의 등장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사실주의 기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물을 바라보는 화가의 주관적인 느낌과 인상이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설단 작가의 <저수지의 시체들>을 읽으며 받았던 첫인상은 마치 사실주의를 넘어 현대미술의 새로운 챕터를 연 인상주의의 태동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설은 본격 논두렁 하드보일드 스릴러를 표방하는 작품소개에 걸맞게 ‘무령’이라는 가상의 촌동네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흥미롭게 조명하고 있다. 극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독창적이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풍경묘사라고 생각한다. 이는 소설의 전반부에 걸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소설의 시작부부터 그 특징이 잘 나타난다. 1화 중에서 해당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태수는 걸음을 멈추고 초소 위쪽 귀퉁이의 양철 갓 씌운 전등이 드리우는 빛의 삼각형을 응시했다. 비스듬한 원뿔형 공간 안에 유유히 떠다니던 눈송이들이 공기의 흐름을 따라 한꺼번에 방향을 틀었다. 마치 잔고기떼처럼.”
“목덜미까지 바짝 세운 검은 양모 코트의 깃이 귓가에서 펄럭였고 동시에 레몬색 불빛을 머금은 눈송이들이 발밑에서 솟구쳐 올랐다. 태수는 빛의 강물을 거스르며 약동하는 노란 생명체들을 쳐다보았다. 바람이 잦아들자 한순간 눈송이들이 공중에 뜬 채 그대로 멈추었다. 마치 누군가 버튼을 눌러 시간을 멈춘 듯 세상이 단 하나의 장면으로 얼어붙었다.”
인상주의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체계로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것처럼, 소설이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영상과 경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차볋하된 분위기나 상황 조성을 가능하게 하는 독창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배경과 독특하게 형성된 분위기 속에서 매력적인 케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특히 등장인물간의 대화는 각각의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잘 드러내면서 극의 전개에도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
“희망적이시네요.”
“뭐가요?”
“희망을 가져야죠. 살아가려면”
“살아가려면 희망을 버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요.”
“어느 쪽을 바라보는지에 달려 있겠죠.”
– 27화 중 –
“제 감정과는 무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감정과 무관한 문제라는 건 없어요.”
“논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논리라는 것 역시도 감정의 갑옷에 불과하죠.”
“과학과 종교가 같다는 말씀이나 다름없군요.”
“과학 역시 일종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죠.”
– 39화 중–
또한 “비극을 통해서만 진실을 보도록 창조된 인간 고유의 눈동자가 검고 단단한 두 점으로 응축되었다.” 같은 문장들은 작가가 가진 아포리즘을 드러내는 동시에 냉철하면서도 무미건조한 하드보일드 소설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인상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차별화된 시각으로 시공간을 조율하는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때로는 소설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설 특유의 감각적이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장면 조성이 때로는 조금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섬세하게 조각한 감정의 결에 발목 잡혀 하드보일드 스릴러 소설 본연의 속도감 있는 전개가 조금 더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범인을 추적하면서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맞이하기 위해 폭발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순간에 감정의 물결을 만나 전개가 둔화되는 것 같은 아쉬움이랄까？ 감각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스타일리쉬한 장면들을 구성해낸 점은 너무나 좋았지만, 소설의 스피디한 전개와 균형을 맞춘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한가지만 더 덧붙인다면 대화체나 챕터 구분 등이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아서 가독성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대화체 표시나 단락 나누기, 띄어쓰기 등이 보강된다면 독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지는데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저수지의 시체들>은 ‘무령’이라는 촌동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트코인과 관련된 지능형 범죄를 매력적인 케릭터와 디테일한 묘사로 표현한 수작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소설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독창적인 시각와 디테일한 묘사, 매력적인 인물들과 잘 짜여진 인물간의 대화들, 삶의 철학과 아포리즘을 담아낸 내용 등에 있다. 작가의 후속작이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