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에 작가님이 던져놓으신 인용문이 사뭇 비장하여 더욱 기대하면서 보게 된 작품입니다.
거기에 최근에 읽었던 작가님의 전작이 워낙 완성도도 높고 제 취향의 최고점을 콕콕 찍었던 지라(‘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 호러팬이시라면 이 작품도 추천드립니다) 읽기전부터 혹시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면서 들여다 본 이작품, 역시나 작가님은 실망이라는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일단 작가님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 사건, 감정등을 너무 잘 알고계시는 것 같습니다. 전작에서 살인봇(?)의 뒷모습만으로 꿈에 나올 정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셨는데, 이번 작품은 숨이 턱턱 막히는 미래상을 일필휘지로 쭉쭉 그려내셨습니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인류는 밑도끝도 없이 모두가 꿈꾸던 영생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상상했던 만큼 빛나질 않네요. 변형인간이라 부르는 괴물들의 등장은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핸디켑이라 해도, 현대에 들어서 생기기 시작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이 영원한 세상을 천국이 아닌 지옥의 입구 정도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미 삶의 퀄리티의 차이를 규정짓는 피라미드가 태산처럼 솟아올라 고착회되어버린 세상에서 주인공 태기는 신분 상승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염원하지만, 그 사다리는 잡힐 듯 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생각합니다. 이제 죽지도 않는데 돈만 많으면 영원히 삶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 아닌가하고 말이죠.
생각해보니 너무나 무서운 광경이 상상됩니다. 오늘날 물질이라는 토대위에 공고히 쌓여진 사람들간의 격차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치는 정도로는 극복이 힘들 정도의 높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시간, 곧 죽음이죠.
그것마저 없어진다면 이미 피라미드의 최첨단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걱정해야 할 건 단 한가지일 겁니다.
내 위치를 지키는 것, 떨어지지 않는 것.
우리가 영생을 아름답게 그려보는 이면에는 그것이 가능할 정도라면 삶의 질은 당연히 어느정도 갖추어져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공존하기 때문이죠. 가상의 유토피아를 그린 여러 작품에서도 그 두가지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했구요.
이 작품에서 작가님은 그런 저와 독자분들의 기대를 현실적으로 박살내리셨네요. 격하게 반박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에 더 우울해집니다.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영원히 이어가야 하고, 까마득히 보이는 마천루에 사는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쾌락을 즐기는 세상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변종 인간들의 등장은 그나마 남아있던 영생의 축복마저 영원한 저주로 바꾸어버립니다.
저 높은 곳의 아름다운 낙원은 보이지 않고, 한발자국만 헛디디면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줄타기하듯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돌진하던 태기의 최후(최후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를 목도하면 그야말로 한편의 지옥도를 지켜본 것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감이 뒤따릅니다. 올라갈 수는 없고 떨어지는 것만이 가능한 세상에 대한 절망은 작품 중 태기의 동료인 양정의 목소리로 작가님이 표현하려 하신 것 같습니다.
“도망치지 마. 넌 항상 내가 마약이나 하면서 현실도피한다고 조롱했지만 실은 그 반대야.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건 바로 너야. 우린 이 세상의 꼭대기에 결코 올라설 수 없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말이야. 먹이사슬은 이미 완성됐어. 치고 올라갈 틈이 없다고.
사람들이 왜 마약에 매달리는지 알아? 자기가 누군지 잊고 싶기 때문이야.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거든. 모든 걸 잊은 채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거지.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방식이야.
영생을 소재로 한 글에서 이 정도로 암울한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 또 잇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무엇보다 두려운 건 지옥과도 같은 글 속의 세상에, 모든 것을 내던지듯 달리는 주인공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친구의 상황에 하기 싫지만 공감이 간다는 겁니다.
변종인간의 속삭임에 감염(?)되어 영원히 자해를 계속해야 되는 삶과 아귀들에게 물어뜯기며 기약없는 순간의 쾌락과 고통을 함꼐 느껴야 되는 삶은 아마 지옥도의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들인데, 현대적으로 각색되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는 건 작가님의 뛰어난 글솜씨덕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만큼 지옥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인 것 같기도 해서 먹먹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정통 호러물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공포를 느끼게 되는 지점을 잘 아시는 작가님의 감각과 뛰어난 구성 , 전개로 막힘없이 완독할 수 있는 재미있는 SF공포소설입니다.
굳이 장르를 구분짓고 싶지는 않네요. 어떤 장르의 팬이시든 만족스러운 글읽기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