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은 힘인데 모르는 게 약이다.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올빼미의 화원 (작가: 김성일,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20년 1월, 조회 115

전쟁의 역사는 곧 첩보전의 역사입니다. 아트 오브 워, 손자병법에도 간자를 사용하는 방법이 중요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게 하는 것이 전쟁의 기본이니까요. 모르면 맞아야 하는 것은 철권 할 때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병법의 극의라고 할 수 있듯, 정보전을 이미 제압한 상태라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곳이 전장에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창칼이 부딪치는 세계라도 말입니다.

본 작품 특성상 스포일러가 작품의 재미를 심각하게 떨어트릴 수 있으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리뷰를 그만 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작품은 읽어 보시는 게 참으로 좋습니다. 재미있거든요.

 


  

동방과 서방 두쪽으로 나뉜 진영이 수시로 전쟁을 일삼는 어딘가 고향처럼 친숙한 세계에서 유달리 전화를 피해가며 건실하게 평화를 누리는 에리하라는 소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뒤에는 초기형 화약무기와 마법이 부딪치는 시대상황에 비해 몹시 진보한 정보체계를 구축 및 운영하고 있는 에리하 왕가가 있지요. 주인공 파라나 공주는 계승서열에서는 꽤 떨어져 있으나 이런 가업에는 누구보다 적합한 인재로, 마침 적절한 상대와 적절한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 적절치 못한 손님이 상견례 자리에 끼어 오더니 갑자기 왕국이 하루아침에 아 망했어요. 그래서 급한 김에 왕위를 계승중입니다 아버지 한 다음 우리 집에 불 낸 놈을 찾으러 다니는 중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점은 본 작품이 지닌 기본기입니다. 묘사가 화려하다거나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만큼 치밀하고 어색한 부분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건조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작중의 진지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판타스틱 첩보물이라는 자칫 미묘해질 수 있는 배경을 잘 잡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밀무역은 어떻고 정략결혼이 어떻고 하면서 설명 일변도로 퍼질 것 같았던 스토리를 1부 마지막에 용숨으로 한방에 꺾어버린 점도 좋았습니다. 물론 주요인물들이 팍팍 죽어 나가는 장면이 약간 당혹스럽긴 했지만 주인공의 입장이 왕가의 일원에서 지하세계의 일원으로 바뀌면서 생성된 스릴로 충분히 보상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본 작품은 1인칭 시점은 아니지만 각부 마지막 에피소드(읽을 때마다 시즌 피날레 같아서 몹시 좋았습니다)를 제외하면 대체로 주인공 파라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인공에게 이입하여 함께 모험을 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미스터리의 규모를 생각할 때 세계관 전체적인 조망이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본작의 흑막은 세계질서 전체를 뜯어고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3부까지 읽은 시점에서 그 세계의 미니맵은 한 20%정도 밝혀진 느낌입니다. 특히 동방과 서방의 대립은 그 기원이 모호한데, 일단 동방은 일루미나티 같은 느낌의 태양신전을 중심으로 십자군 비슷한 기분을 내고 있는 것 같지만 뒤로는 밀무역으로 서방의 사치품도 열심히 거래하는,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입니다. 그러나 서방의 경우 사용지역에 제한은 있지만 마법을 쓰고 괴물을 소환하고 용을 부리는 등 동서방의 이질감이 상당합니다. 실상 말만 안 통하면 거의 마왕군인 셈인데, 이 경우 두 세력이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굉장히 많이 들 수 있으나 주인공이 목표로 하는 거래나 교섭의 가능성에는 의문이 듭니다. 동서방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고, 전쟁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이며 싸움질 외에 이면의 민간 교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윤곽을 그리는데 있어 파라나의 행보만 따라가는 것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근간에는 고위 인사의 망명을 이유로 주인공도 서방에 도착했는데, 제법 쾌적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양측간 인적교류가 활발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립지대라도 있는 걸까요?

밝혀진 설정상 서방은 침공시 마법을 쓸 수 없고, 동방은 침공시 화약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짐작컨대 방어측 우세가 너무 강해서 사실 카롤 공방전의 경우도 카롤 점령이 붉은 하늘의 분포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하는 이점이 없는 바에야 카롤을 교두보로 확보한다 해도 동방진출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뭐 실제로도 역사적으로 수년간 질질 끄는 지지부진한 공방은 제법 많이 있었지만, 그 때는 마법과 용이 없고 대신 각자의 전략적 목표가 있었지요. 카롤이 단순히 쿨타임 차서 전쟁하는 장소가 아닌 다음에야 카롤 함락(이를테면 재작년)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최근의 전투 장면에서 이 부분을 크게 느꼈는데, 정찰부대라기엔 묘한 규모인 티그룬의 부대와 서방측의 나무귀신들은 해당 장소에서 왜 조우한 것인지, 양측의 규모는 어느정도인지, 그리고 이러한 마법생물들에 대한 비마법적인 파훼법이 있긴 한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투장면을 보다 보니 대체 어떻게 티그룬이 살아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요소들이 본 작품에 매력을 더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능력은 분석과 추론이고, 이는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상당부분 매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셜록 홈즈를 읽는데 범인이 투명인간이면 안 되는 이유와 같지요. 예를 들어 마수정과 마법사가 있을 경우 천리전음에 가까운 양방향 통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주인공이 구축한 인적 통신망을 상당부분 무색케 합니다. 물론 헤르 같은 사람이 어디나 널려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없으면 당연히 국가 존망을 걸고라도 양성해야 하는 체계일 것입니다. 또한 주인공은 근간에 약간 비약적인 과정을 거쳐 본인의 사명을 깨닫는데, 의도는 좋지만 단독으로 국가지도층을 물리적으로 괴멸시킬 수 있는 비대칭전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과연 가능한 목표일지 우려됩니다.

이세계에서 첩보물을 쓸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처음부터 이능력의 한계나 제약 요소를 강력하게 설정해 두지 않는다면 독자는 새로운 요소가 나올 때마다 지금까지 예상을 펼쳐온 기반이 깎여 나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그 결과 스토리의 치밀함이나 핍진성에서 다소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건 딱히 생각하지 않고 마법검을 휘두르며 마왕성을 향해 돌격하는 작품도 있고, 그것도 잘 쓰면 몹시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본 작품의 주인공은 용사가 아니라 베네치아에서 모사드를 운영하는 공주님인듯하고, 저는 읽는 동안 그 점이 몹시 즐거웠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일 따름입니다.

아직 연재중인 작품에 대해 리뷰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고민되는 일입니다. 괜히 넘겨짚었다가 머쓱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메모해 가며(장편은 안 그러면 잊어버려서…) 읽는 과정이 퍽 즐거웠기에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 심히 고민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됐든 작품이 잘 될 것 같아서요.

구정도 다가오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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