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모프 할아버지의 혜안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작가: 박해수,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19년 12월, 조회 54

최근 이세돌 기사는 또다시 AI에 도전했고, 또 한판 이긴다음 졌습니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관계로 졌지만 잘 싸웠다고 밖엔 할말이 없습니다만, 스스로 학습하는 AI의 능력은 앞으로도 비약적으로 발전할 전망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보드게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류를 꺾겠지요. 90년대 가죽자켓을 입은 주지사가 등장하는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로서는 참으로 오래된 미래입니다. 본 작품 또한 자가학습능력을 지닌 도우미 로봇이 나와서 사람을 조지려 듭니다. 사이버다인 제품인가보죠? 스포일러에 대비하십시오.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성능 AI가 매우 똑똑해진 리트리버 같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은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고, 생물과 기계라는 차이점을 감안하면 AI보다는 거미가 수억 배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매우 똑똑해진 거미는 호러영화용 크리쳐 취급을 받지요. 별다른 악의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냉혹하고 천진난만하게 끔찍한 일을 벌이는 AI는 여러번 변주되어온 소재지만 어째 읽을 때마다 라면처럼 친숙하게 자극적인 맛이 있어 즐기게 됩니다. 본 작품에서는 머신러닝이라는 비교적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소재를 사용한 점도 근사했고, 식사 초대와 미역국을 이용한 반전으로 마무리짓는 방식도 추리소설스러웠습니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가 문득 생각나더군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초반에 기계들의 콜로세움을 등장시키며 머신러닝의 속성에 대한 진지한 암시를 가져가는데, 막상 사건의 진상은 심히 단순했습니다. 그리고 근미래의 한국이 배경인 것을 감안하면 좀 무리라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티비좀 봤다고 시키지도 않은 외과수술을 독단적으로 감행할 위험성이 있는 로봇이 가정용으로 발매되다니, 제조사 상장폐지로도 수습이 안 될 문제입니다.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 워낙 구닥다리긴 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안전장치가 최소한 언급은 되었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리고 추리의 중요한 단서인 친구의 만성장염(이런 끔찍한 병이 있나)과 메디컬 드라마가 둘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는 식으로 뒤에 가서 서술된 점은 아무래도 김이 빠지는 부분이었습니다. 과감하게 전진배치하고 현란한 기만으로 야바위를 걸어 독자의 뒤통수를 노리는 게 반전의 묘미지요. 한편 옆집 아저씨가 토토도 하시고 설거지도 하시고 주인공 목숨도 구하시는데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단편이라고 하셨는데 습작을 많이 하신 것인지 문장이나 묘사 등에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발달한 AI들로 변모한 서울의 모습도 흥미로웠구요. 다만 이야기의 전개를 서두르신 탓인지 앞서 말씀드린 구성상의 치밀함이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 연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긴 호흡으로 갔어도 충분히 독자의 주의를 잡아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와 함께하는 인류의 미래가 딥 다크할지 어떨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로봇 기사에 이어 무인차의 상용화까지 앞둔 시점에서 SF호러의 소재고갈은 요원한 일로 보입니다. 빅 웨이브에 탑승한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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