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집을 짓는 남자. 고상하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미치광이의 다른 이름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작품이지만, 화자는 냉소인지 조소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로 천냥 빚을 지는’ 사람의 말버릇인지는 알 수 없을 미묘한 배타성으로 독자의 감정 이입까지도 밀어내는, 한 술 더 떠서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결코 선의나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언동을 보이기도 하는(제가 보기에는 애둘러 이런저런 생각을 갖다붙임으로서 자신이 선의나 호의를 표했다는 사실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식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 장의 등장인물들 말마따나 어느 규격에도 포함되지 않는 기이한 사람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회색지대의 거주민일까요. 자신은 온전히 화자의 역할만을 맡겠다, 그 이외의 어떤 일도 담당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을 긋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화자 ‘행운동’은 독자에게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초반까지는 글 자체에서 술담배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듯한 ‘현실에 지독하게도 찌들어버린 어른’ 같았다면, 점차 ‘서툴지만 불친절하지는 않은 호인’으로 명료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점점 ‘이게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하며 미궁에 빠져드는, 마치 안개 같은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엘르’에서의 이자벨 위페르가 조금 겹쳐보이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말 그대로 사막입니다. 지나치게 고온인 탓에 건조한, 수분이란 수분은 모조리 날아가버린 메마른 불모지. 그런 곳에서 집을 짓고 있으니, 얼마나 행운동이 미친 사람인지는 충분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이었기에, 사막을 오가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처를 제공해줄 수 있었습니다. 본인 말마따나,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자신만의 규격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노력을 굳이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별명인 ‘행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나 할까요. 오아시스가 딱히 사막의 여행자들을 구해주기 위해 거기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있는 거죠.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라. 아무튼 간에 도움이 되긴 한다는 점에서, 행운동이 곧잘 읽던 하드보일드 소설과 지극히 밀접하면서도 또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으면서 연상된 또다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비하자면 좀 더 인간미가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요소들과 그 자신의 재치 있는 입담, 그리고 풍성한 배경지식은 행운동이라는 인물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수단이 되어 줍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작가의 역량인 것이고, 즉, 작가는 소위 ‘글자 만질 줄 아는 재주꾼’인 것이죠. 작가님께서는 재미 없어도 장을 지질 순 없다고 했지만, 붉은 광장을 건축한 건축가들이 다시는 같은 훌륭한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재미 있었기 때문에 장을 지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라면 그냥 작가님을 코카인의 불한당들처럼 가둬놓고 글을 쓰지 않으면 망치질을 하겠지만요.
이건 사족입니다만, 탈고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것인지, 혹은 탈고 과정이란 것 자체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곳곳에서 미묘하게 오타들이 슬쩍슬쩍 보입니다. 처음에는 거슬렸는데, 의외로 읽다보니 작품의 매력 요소 중 하나로 느껴지게 되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세뇌를 당한 셈이죠. mk울트라가 한국에서 성공했을줄은 몰랐습니다만. 아무튼, 쉴 새 없이 재담을 쏟아내는 화자의 ‘잘 정돈된 대사’가 가끔은 조금 작위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오탈자들이 그 위화감을 잘 상쇄시켜 줍니다. 현실로 치자면, 말을 열심히 뱉다가 혀를 씹거나 발음이 꼬이는 것을 표현한 듯한 것이죠. 의도하셨다면 정말 무서운 작가님이십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완전히 결말을 목전에 둔 상태(로 보이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어쩌면 ‘행운동’답다고도 할 수 있는 끝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그는 독자들에게도 끝까지 외부인입니다. 잠시 머물렀다 곧장 떠나는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도, 해명하지도 않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의 표현처럼 ‘혼자 진도를 너무 뺀’ 것이었는지도 모르죠.